이병각목사 (예담교회)

바울은 사도 중에 사도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로, 로마까지 가서 순교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하고, 많은 교회를 세운 목회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배경에서 이렇게 훌륭한 일군이 되었겠습니까? 바울은 굉장히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을 것이고, 훌륭한 부모 밑에서 믿음의 양육을 잘 받았을 것이고, 교회의 배경도 남들보다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바울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에 유명한 핍박자였고, 다메섹에까지 가서 기독교인들을 잡으려 한 예수님에게 증오심을 가진 광적인 핍박자였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인 중에 유대교인으로 바리새파였습니다. 소아시아 다소에서 예루살렘에 유학 와서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율법 학자가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상식으로 생각하면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다는 것은 전혀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습니까? 척박한 땅에서 빛이 피고 열매 맺는 그런 아름다운 역사가 있었습니까?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요 핍박자 중에 핍박자인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순교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근거나 공로가 없이도 인정받고 용납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공로 없이 우호적으로 대해 주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이 바울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같이 못된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죄인의 괴수를 하나님의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치시는 분, 치유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은 자연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1. 하나님의 치유

어느 미군이 2차 대전 때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체험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지역에서 독일군과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극적으로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아군 보다 많은 적을 포로로 생포했는데, 본인은 그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 당했습니다. 그 병원은 독일군의 병원이었습니다. 독일군 병사는 부상을 당한 자신을 정성으로 치료했습니다. 이 미군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독일군은 나쁜 놈들이고, 원수라고 배워왔는데, 독일군을 마귀나 괴물쯤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인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부상당한 적군을 치료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인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던 독일군이 아니었습니다. 적개심도 분노도 다 허구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이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살았던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상과 지식을 가지고 살았던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어떤 수준으로 살았던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건전한 자존감을 가지고 살았던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교만한 사람이었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능한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미천한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는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깜짝 놀랄 정도로 우리를 고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세상에서 살면서 많은 사건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상처를 받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많이 변질되고 왜곡되어집니다. 마음고생하며 살다보면 때로는 적개심을 가지고 전투적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마귀나 적군쯤으로 생각합니다.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달리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밝은 곳이 전혀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적과 동지가 절대 구분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미군 병사가 경험한 것처럼, 알고 보면 세상은 우리가 아는 세상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적보다 이웃이 많고, 경쟁자 보다 돕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실패보다 성공이 더 많고, 미움보다 사랑이 더 많고, 혼자라 아니라 함께 하는 친구나 이웃이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나 세상과의 관계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엄격한 심판자인 줄 알았는데, 자비하신 아버지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해도 늘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지금 있는 모습 이대로 좋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이해심이 많고 관대하신 분인지 모릅니다. 늘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밤낮으로 나와 함께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더 잘해야 칭찬할 줄 알았는데, 그만 해도 잘했다고 칭찬하십니다. 놀라운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알았던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은혜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시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사형 당한 형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과 근본적인 관계를 개선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인간관계나 삶의 경험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고통 받는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삼일 걸을 걷다가 광야에서 쓴 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먹을 수 없는 물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넣자, 쓴 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쓴 물을 달게 만든 나무는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쓴 물을 단물로 만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그 사랑을 기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극성이 있다고 합니다. 분노와 순종(현실 수긍), 장점과 단점이 그것입니다. 분노의 극성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비판적이고 파괴적으로 나타납니다. 남을 시기합니다. 이런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용서하고 관용하게 됩니다. 순종과 현실 수긍의 극성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언제가 자기주장을 하지 못합니다. 남을 위해 천사 아닌 천사가 됩니다. 속으로는 자신이 싫으면서도 남 앞에서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남을 생각해서입니다. 이런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자기주장을 하고 자기표현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단점의 극성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 받습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학대합니다. 자신감이 없습니다. 의기소침합니다. 이런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담대하게 되고 자신감을 회복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장점의 극성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완전주의를 지향합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합니다. 늘 일합니다. 쉬지 않습니다. 목표를 달성하면 또 다른 목표를 정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쉼이 없습니다. 남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편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사랑을 경험하면 있는 그대로 만족하고 즐거워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려서 경험한 부모의 품이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은 대인 관계나 사회생활에서 문제가 없습니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잘 극복합니다. 부모 밑에서 적당한 칭찬과 적당한 책망을 잘 소화해낸 사람은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았거나 학대를 당했거나 상처를 받은 사람은 온전하게 살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부모의 품에서 안식을 경험한 자녀는 부모의 품을 기억하고 잠을 이룹니다. 잔혹한 유대인 나치수용소에서 견딘 사람은 부모의 품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부모의 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걱정과 두려움에 잠을 설칩니다. 폭풍이 일어나는 바다에 버려진 배와 같습니다. 부모의 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사랑과 용납입니다. 이것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다른 명예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인격적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방치해서도 안 되지만, 과잉보호해서도 안 됩니다. 잘 한 것은 칭찬하고 못한 것을 책망해야 합니다. 부모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미래는 자녀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녀들의 미래는 부모의 품에 달려 있습니다. 보호자와 양육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들에게 독초를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독초를 먹는 자녀들은 자신에게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지독한 독을 토해 낼 것입니다. 부모를 보면 그 자녀와 가정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부모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부모가 폭력적이면 하나님을 폭력적으로 생각하고, 부모가 무책임하면 하나님도 무책임한 분으로 생각하고, 부모가 감정적이면 하나님도 감정적이라고 생각하고, 부모가 관용하지 않고 엄격하면 하나님도 인색하고 엄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왜곡됩니다. 이런 아픈 경험이 있습니까? 부모에게서 얻는 잘못된 이미지들을 빨리 잊어버립시다. 하나님은 우리 부모와 다른 분입니다. 부모는 우리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부모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육신의 부모 보다 더 귀한 것이 영의 부모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칭찬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은 세상을 잘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감사함으로 하루를 마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때로 실수하고 잘못해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 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느 좋은 부모를 모신 자녀 보다 다 잘 살수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어려서 필요하지만, 영의 부모는 인생을 살면 살수록 더 필요합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육신의 부모의 역할을 줄어들지만,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과 관계는 날이 갈수록 중요해집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치유합니다.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훼손하는 것은 부모와의 잘못된 경험만이 아닙니다. 친구나 이웃이나 우리가 아는 사람들과 좋지 않은 관계가 하나님과 관계를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건이나 좋지 않은 경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합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은 쉽게 은혜에서 떨어집니다. 의심하고 갈등합니다. 하나님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의 문제 때문입니다. 사업이 안 되고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쉽게 은혜에서 떠납니다. 하나님과 문제가 아니라 삶에서 얻은 상처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넘어지고, 혹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면서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대의명분은 뭐라고 하든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상처를 받고 실패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일이 잘 안 되면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교회나 남의 탓합니다. 심지어 목사님 탓으로 돌립니다. 실패한 좋지 않은 감정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십자가 붙들고 치유 받고 치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반대로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성공한 사람은 은혜가 풍성합니다. 교회나 목사님이 별로 은혜를 베풀지도 않았는데 풍성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일정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형편에서도 동일합니다. 차이는 받아들이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은혜가 풍성하다 안하다는 우리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세상의 성공이나 실패와 무관합니다.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에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도, 사업이 잘 안 되어도,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엉망이 되어도 더욱 십자가에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동안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으로 감사합시다. 욥은 시험을 당해서 자녀 10명을 잃고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라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의 실패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지난날과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읍시다. 하나님은 실언하지 않습니다.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한번 우리를 회복하실 것을 믿읍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은혜 위에 은혜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인도하실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시다. 찬송함으로 나아갑시다. 찬송하는 만큼 십자가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만큼 십자가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만큼 십자가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경청의 방에 들어가는 것만큼 십자가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드리십시다.

3. 치유를 경험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하심을 맛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고 환영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을 계획하신 분입니다. 성자는 성부의 뜻대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입니다. 성령님은 누구이십니까? 무슨 일을 하시는 분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는 영입니다. 예수님이 보내는 영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시는 영이십니다.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는 말 그대로 우리를 도우시는 영입니다. 우리의 상담자이고 변호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치유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도덕주의나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안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내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신앙을 습관이나 관습으로 다루어서 안 됩니다. 우리 내면에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시는 인격이신 성령과의 교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도록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얼마나 마음을 여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래야 치유하시는 성령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상담을 받으려는 사람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한나가 마음의 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 는 마음이 슬픈 여자” 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해서 마음이 아픈 여자였습니다. 수가성의 여인과 같이, “나는 남편을 다섯 두고도 마음의 안식을 얻지 못한 여자”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하고 양심의 고통으로 마른 땅이 갈라지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 자신의 죄를 시인한 것과 같이 숨겨둔 무엇이라도 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의사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 더 쉬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표현할 때 친밀함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친밀한 것이 신랑과 신부입니다. 신랑 신부와 같이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될 때 강한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만처럼 자신의 문둥병을 드러내는 만큼 치유의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위선과 체면과 상처를 감싼 그 어떤 것이라도 다 풀고 하나님께 다 내어놓읍시다.
하나님의 치유는 단회적이나 일시적이 아닙니다. 지속적이고 계속됩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한 것은 일시적인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아시아를 세 번 선교하고 마지막에는 로마까지 갔습니다. 은혜는 바울의 일평생 지속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겸손함으로 복음을 위해 수고를 다 했습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지속적으로 변화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9절).” 감당치 못한다는 것은 현재 동사입니다. 바울은 지난날만 아니라 지금 현재도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현재형으로 말합니다. 과거만 아니라 현재도 죄인의 괴수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현재 진행형이고, 바울에게 하나님의 치유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어머니학교를 다녀온 집사님들 이야기가 참 좋았는데, 한번 참석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참석할 때마다 은혜가 새롭다고 합니다. 가정세미나가 그렇습니다. 한 번 들은 지식으로 가정이 치유되지 않습니다. 새 생활 세미나가 그렇습니다. 셀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그렇습니다. 한걸음씩 쉬지 않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조금 은혜를 받고 치유를 받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대개의 경우 다시 돌아갔을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이 다시 상처를 받지 않았습니까? 다시 완전주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다시 낙심과 좌절의 구렁텅이로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다시 죄짓는 습관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다시 메뚜기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독수리의 담대함과 용기를 잃고 다시 참새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치유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