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삼우목사 (잠실중앙교회)

사람은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존재입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피조물 중에 사람만이 자신을 돌아볼 줄 압니다. 자기를 성찰함으로 잘못된 것을 고치면서 바른 삶, 바른 모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성찰은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됨이 자기 성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는 정말 중요한 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성찰한다고 하면서 시시한 것들을 붙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항상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자신을 점검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하든, 그보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내가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 또한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보다 진지하게 나를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명예를 얼마나 얻었느냐 하는 것은 좀 접어두십시다. 얼마나 출세했느냐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아무 소용없는 것들입니다. 또 이런 것들은 굳이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수시로 점검하고 있습니다. 정말 물어야 할 것,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 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이 물어 보시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 귀중한 것을 물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경이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래서 우리도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소원,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을 알았으며,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사랑하는 자가 되었는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진정 사랑을 알았느냐, 사랑에 살고 있느냐,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숙이 있습니다. 나아가 인생의 진정한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여기 있습니다. 사랑했으면 성공했습니다. 사랑하지 못했다면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들 사랑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랑을 모르고 있고,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사랑했습니다. 사랑으로 키웠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녀가 성장한 다음 부모를 미워하고 원망합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자녀만 전적으로 나쁜 것이고 내 사랑에는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사랑합니다. 극진히 사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상대방에게만 문제가 있겠습니까? 내 사랑도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새롭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사랑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괴롭고, 사랑이 없기에 나약하고, 사랑이 없기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분명히 하십니다. 이제는 세상적인 지식이나 나의 경험을 가지고 사랑 운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전혀 다릅니다. 적어도 성경은 자기중심적인, 자기욕구, 자기감정을 넘어서지 못하는 본능적인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욕망의 포로가 되어, 오히려 행복을 파괴하는 그러한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지식은 차라리 모르는 것 보다 훨씬 더 못한 법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랑의 개념을 일단 완전히 백지화시키고 사랑을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고전 13장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 1-3절까지의 말씀으로 사랑의 중요성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4절 이하에서는 사랑의 성격을 하나하나 지적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사랑의 성품으로 오래 참는 것과 온유하다는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오래 참는 것이 보다 내적인 면을 뜻한다면, 온유하다는 말은 보다 외적이요 적극적인 면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두 성품을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먼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습니다. 여기 참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마크로투미아" 란 말인데 한 단어로 그 의미를 번역하기가 어려운 심오한 단어입니다. 그냥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집살이는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 소경 노릇 삼 년 해야 무난히 성공할 수 있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물론 요즈음 그렇게 사는 사람 있겠습니까만, 아무튼 무조건 참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 처음에는 비교적 잘 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억지로 참는 것은 언젠가는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폭발하다보니 우리나라 사람들 부부싸움도 무섭게 하고, 또 이혼율도 점점 높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참는다는 말, 이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십 년을 찾았다고 하면서 폭발하는데 그렇게 되면 십 년을 참은 것이 아니라 십 년을 별러온 것 밖에 안 됩니다. 사랑의 인내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면서 참는 그런 참음이 아닙니다.

본문의 오래 참는다는 이 단어는 베드로후서의 주제가 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베드로후서는 바로 이 단어로 주님의 재림이 왜 더딘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베드로후서 3:9입니다. 거기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 여기 참는다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참아 주시는 것- 바로 그 참으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참으십니까? 이를 악물고 기다리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마지못해 억지로 기다리시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으심 속에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소망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오래 참는 것은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찾는 것입니다. 소망과 기쁨으로 참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인내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랑하기에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데 오히려 오해를 받고, 사랑하는데, 오히려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참다 보면 고통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점점 메말라집니다. 결국 세월이 지나다보면 우리의 마음에 사랑은 사라지고 증오심만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는 아셔야 합니다. 고통을 당하고, 미움을 받았다고 같이 미워하게 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참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은 고통마저도 기쁨으로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사랑을 위한 수고, 사랑을 위한 고통 괴롭지 않습니다. 이 수고와 이 고통을 통하여 사랑이 진정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할 때 얼마든지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랑의 결과가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위해 뿌리는 이 모든 수고의 결과, 마지막 열매를 믿습니다. 하나님 죄인들을 향해 참으실 때 죄인들이 결국은 회개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마지막 결과를 믿기에 오래 참으면서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말할 때, 아브라함은 오래 참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첫 아들 이삭을 낳은 것이 그로부터 25년 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참고 기다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정말 사랑으로 참고 기다리신 분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누릴 만한 믿음의 사람이 될 때까지 사실은 참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아브라함은 계속 흔들렸고 비틀거렸지만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결국은 믿음의 사람이 될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허물과 실수를 다 덮어 주시면서 참으셨습니다. 25년을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인내 속에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붙잡히시던 날 밤입니다. 주님 이제 붙잡히시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데, 제자들은 이 결정적인 시간에도 누가 높으냐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조금도 낙심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지금은 한심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니 그 날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입니다. 그 날까지 낙심하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이런 기다림의 마음을 갖게 했습니까? 바로 이 사건을 말씀하는 거기 성경은 “예수님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고 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끝까지 기대를 버리지 않고 참고 기다리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인내하게 합니다. 끝까지 기쁨으로 기다리게 합니다.

요한 웨슬레의 아버지가 한번은 그의 아내인 수산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어떻게 그처럼 참으면서 저 돌대가리 같은 아이들에게 스무 번을 똑같은 말로 타이를 수가 있단 말이오" 그때 웨슬레의 어머니는 "여보, 제가 만약 열아홉 번만 이야기하고 말았다면 내 수고가 모두 헛될 뻔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자녀에게 스무 번을 똑같이 다시 말할 수 있는 어머니의 이 사랑, 이 참음, 이것이 영국을 영적으로 뒤집어 놓은 요한 웨슬레의 형제들이 자라날 수 있었던 어머니의 가슴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같은 음성으로 다시 말할 수 있습니까? 두 번만 이야기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음성이 높아지지 않습니까? 사랑한다고 쉽게 생각하지 맙시다. 사랑이 그렇게 내 감정대로, 내 욕구대로 다 해버리는 싸구려가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기쁨으로 참습니다.

사랑의 진실과 참음의 길이는 비례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참고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참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사랑은 온유를 베풉니다. 여기 온유라는 말 헬라어로 ''크레스튜오마이'' 라는 단어인데 신약성경에서 우리 본문에 단 한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한다는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오래 참음이 누군가가 내게 상처를 주어도 기쁨으로 견디는 것이라면, 온유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에게 오히려 선을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의 가슴으로 품에 안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온유함은 오래 참음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렇게 설명해 보십시다. 팔레스틴 지역에는 백합화가 주로 골짜기의 가시덤불 속에서 피어납니다. 그러다보니 백합화가 가시에 찔립니다. 찔리면서도 참으면서 꽃을 피웁니다. 이 참는 것이 인내입니다. 그러나 백합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시에 찔림으로 그 향기는 더욱 먼 곳까지 날아가게 됩니다. 찔림으로 오히려 향기를 발하는 이것이 온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사납고 포악하고 무정한지 모릅니다. 딤후 3:3에 보면 말세에는 “사람들이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그 다음 사나우며” 라고 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사람들이 얼마나 사납고 파악합니까? 정말 겁나는 세상입니다. 운전하다고 조금 실수라도 해보세요. 마구 인상을 그리고 삿대질을 해댑니다. 사람들이 전부 화를 내려고 벼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납고 포악한 시대에 그래도 세상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 것은 사랑의 온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한번 보세요. 엔진이 전부가 쇳덩어리로 되어 있습니다. 쇠 성분끼리 돌아갑니다. 어떻게 쇠 성분끼리 돌아가는데 망가지지가 않습니까? 그 사이사이에 엔진오일이라는 기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윤활유가 쇳덩어리들 사이에 들어가 쇳덩어리들이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합니다. 윤활유가 없으면 엔진은 몇 초 못 가 다 망가져 버립니다. 사랑의 온유함이, 바로 이 윤활유와 같습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간관계에 온유함이 들어감으로 서로 부딪치면서도 망가지지 않습니다. 서로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만들어줍니다.

나아가 온유함이 완악한 대상도 녹여냅니다. 거친 사람 같이 거칠게 대하면 부서집니다. 내가 온유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상대방마저 부드럽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단단한 강철 조각 하나가 있었습니다. 도끼, 톱, 망치와 불꽃이 그것을 깨뜨리려고 모였습니다. “내가 깰 수 있지.” 도끼가 말했습니다. 도끼는 힘차게 강철을 내려쳤습니다. 그러나 몇 번 내려쳐도 끄떡하지 않았고 도리어 날만 무뎌져졌습니다. “내게 맡겨둬.” 톱이 말했습니다. 강철 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르려고 노력했으나 그만 톱니만 모두 닳아 깨지고 말았습니다. 톱도 옆으로 비켜서고 말았습니다. 망치가 나섰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실패할 줄 알았어. 내가 하는 방법을 보여주지.” 그러나 힘껏 내리쳐도 망치 머리만 나갈 뿐 강철은 아무 이상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고 부드러운 불꽃이 말했습니다. “내가 해볼까?” “그만둬, 네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모두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불꽃은 물결치듯 강철을 감싸 안고 강철이 자기 속에서 완전히 녹기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강철을 불꽃에 녹아 내렸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불꽃이 강철을 녹이듯 온유함이 상대방을 녹입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의 온유함으로 내 주위를 품에 앉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온유함이 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 온유함이 우리 교회를 원활하고 은혜롭게 만들고, 그 온유함이 우리 사회를 망가지지 않게 만듭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 지셨을 때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이놈들 두고 보자, 하시며 참으신 것 아닙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채찍에 맞으실 때도 말이 없으셨고, 조롱을 받을 때도, 침 뱉음을 당할 때도, 십자가에 마침내 못 박히실 때도, 말없이 기쁨으로 다 참으셨습니다. 온유의 가슴으로 죄인들을 품에 품었습니다. 이 사랑이 인류를 죄에서 구워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승리합니다.

아주 모범적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다 일류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훌륭한 부부였습니다. 남편은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었고 아내는 대학 교수였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정말 자랑스러운 부부였습니다. 외식을 즐기고 부부 동반으로 파티에 참석을 하고, 그야말로 어울리는 한 쌍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는 항상 긴장이 있었습니다. 서로 갖출 예의를 다 갖추고 조그마한 실수도 하지 아니했지만, 서로가 속으로 내가 잘났다, 내가 잘못 안 한다, 피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음 속에 점차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루는 별 대수롭지 않은 우연한 일이 있은 다음,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내가 잘못했소, 미안하오" 라고 말했는데,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삼 일을 울었답니다. 결혼 생활 20년 만에 처음 들어보니 "여보, 내가 잘못했소, 미안하오."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이 그렇게 고맙고, 감격스러워 삼 일을 울었답니다.

서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못 하고,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 하고 살아가는데, 선물이 무슨 소용이 있고, 예의 바른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온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해야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묵묵히 참으면서 온유로 사랑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거기 진정한 사랑이 있고,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합니다. 오래 참음과 온유함으로 참 사랑을 배워가는 여러분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그 사랑으로 인해 고통이 있고 불만이 쌓였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 깊은 곳이 병든 것임을 압니다. 이제 참 사랑의 모습을 배웁니다. 주께서 십자가의 보여주신 그 모습에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한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 사랑함으로 어떤 아픔도 기쁨으로 참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히려 온유함으로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실로 참 사랑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