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수목사 (양곡교회)

"바보를 칭찬해 보라.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이다."라는 영국의 격언이 있습니다.
사람의 입의 말은 무서운 힘이 있어서 사람을 책망하고 헐면 그 사람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바보라도 칭찬하고 격려하면 일어나서 큰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칭찬은 아첨이 아닙니다. 아첨은 진실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가 쓰는 것입니다. 사람을 유혹하는 자가 쓰는 것이 아첨입니다. 그러나 칭찬은 여러 가지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한 가슴으로 그 사람의 장점을 찾아 일으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한 부인이 시장을 다녀오니 어린 아들이 립스틱으로 화장대의 거울에 무엇을 그려놓아 화장대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야, 너 그림을 아주 훌륭하게 그렸구나.”하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 아이가 당대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잘못을 아심에도 그것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오히려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베드로가 상황이 무서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은 했지만 그 속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끓고 있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그 사랑, 그 마음을 칭찬하시기 위해 세 번씩이나 질문하셔서 수제자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왜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했느냐?”라고 하셨다면, 베드로는 거기에서 무너져 하루에 삼천 명을 구원하는 큰 사역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주님 앞에 나온 나다나엘을 칭찬해 주십니다. 나다나엘도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의롭고 진실하게 살려는 그 마음의 소원을 보신 주님께서 “이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칭찬하십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그런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오늘 처음 뵙는 분인데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나다나엘이 아무도 없는 들판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 진실하고 의롭고 참되게 살고 싶어요.”하며 기도한 것을 예수님께서 아십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만 들으셨는데 예수님께서도 아시니 ‘이분은 하나님과 똑같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하고 깨달은 나다나엘이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이리라.”
여러분이 한 주간 사시며 부엌에서, 운동장 구석에서, 공장 한 구석에서, 자동차 안에서, 길 가면서 하신 기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여러분이 기도하셨지만 주님께서는 다 아시고 여러분을 칭찬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다나엘의 진실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를 칭찬하시고 일으켜 세워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 아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들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로마서 1장 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하고 복음을 전한 로마 교회를 칭찬합니다.
또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서 15절에도 “내 육체에 너희를 시험하는 아픈 가시, 약점이 있음에도 너희가 나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또 예수님처럼 영접하고 귀히 여긴 것과 내 눈이 아플 때 너희 눈까지 빼주려 한 것을 내가 잊지 못한다.”라고 교회들을 칭찬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믿음과 사랑이 큰 것을 칭찬했고(에베소서 1:15), 골로새 교회는 믿음과 사랑에 더하여 그 소망을 하늘에 둔 점을 칭찬했습니다(골로새서 1:4-6).
빌립보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어느 모임을 갖든지 복음으로 교제하는 아름다움이 있었는데, 그것을 칭찬하면서 빌립보서 4장 1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추켜세워 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으로 역사를 일으키고 사랑으로 수고하며 예수님을 향한 소망으로 인내했는데, 그것을 칭찬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후서 1:3-6).
모든 교회들이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장점을 발견하여 칭찬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걱정케 하는 일들이 정말 많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도 장점을 택하여 칭찬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칭찬은 개인을 일으키고 사회를 일으키고 교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칭찬이 얼마나 강한 힘인지 모릅니다.
저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때때로 제 귀를 보곤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저희 마을의 정씨 아저씨에게서 “야, 네 귀가 정말 잘 생겼다.”라는 칭찬을 들은 후부터 제 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저씨께서 돌아가신 지 5년이 지났지만, 저는 아직도 초등학교 5학년 때 들은 그 칭찬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장점을 봅니다.
아이가 공부를 못해도 그 중에서 제일 잘한 과목을 택하여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아내의 음식 솜씨가 좋지 않으면 마음이 올곧은 것을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칭찬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여보, 당신이 얼굴은 못생겼지만 마음은 착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상처를 주는 말이 됩니다.
어느 어리석은 남자가 한 부인에게 “당신은 미인을 보면 질투를 느낍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질투를 느끼다니요? 천만예요. 저는 몇 시간이고 황홀하게 거울을 바라보지요. 그러다가 제 손에 힘이 다하면 거울을 바닥에 내려놓지요.”
자기 자신을 미인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여자는 누구나 다 자신이 아름답기를 원하고 자신이 최고의 미인이 되기를 바라는 심층의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아내가 비록 호박꽃 같아도 남편은 아내를 장미꽃이라고 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남편의 칭찬은 아내를 일으키는 것이 됩니다.
아내도 남편의 장점을 찾아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장점이 없으면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마가 훤하다든지 발걸음이 빠르다든지 한 가지는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장점을 자꾸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아가, 너는 하나님께서 우리 집에 보내신 천사란다. 고맙다. 나는 네 편이다. 내가 너를 도와 줄 테니 힘이 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해라.”
이것이 그리스도인 시어머니의 마음인 것입니다.
며느리도 시어머니의 장점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장점을 발견하면 행복한 믿음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의 약점, 교회의 좋지 않은 점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불행한 믿음 생활을 하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월급도 받지 못하고 일했습니다. 부잣집에서 총애 받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었지만 불평하지 않고 성실히 일하니 그 앞길이 열렸습니다. 회사에서 좋지 않은 점만 보고 불평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원입니다. 그저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직장이 있는 것을 감사하고, 일할 것이 있음을 감사하고, 그저 밝은 점을 보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업하다가 부도가 났을 때 부도난 것만 생각하면 자살해야 됩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건강이 있고 사랑스러운 아들딸이 있고 아내가 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계신다.’라고 생각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점만 보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흑인으로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는 백인 정부에 의해 26년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가 출옥할 때 사람들은 그가 아주 허약한 상태로 나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5년만 옥살이를 해도 파김치가 되어 나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26년간 옥살이를 한 만델라는 감옥 밖의 사람들보다 더 건강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강제 노동에 끌려갈 때 불평하며 죽지 못해 끌려갔지만 나는 감옥에 있다가 밝은 하늘을 보게 된 것에 감사했습니다. 배추를 기를 때는 생명이 자라는 것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내가 26년간 감옥에서 살았지만 좋은 점만 보고 늘 감사하며 기쁘게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소아마비라는 단점을 가졌음에도 자기의 장점을 본 루즈벨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단점과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단점만 보는 사람은 거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상황에서 장점을 찾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금이 쏟아져 나오던 한 금광이 폐광되었는데 거기에 있는 큰 창고를 어떤 분이 고물상으로 사용하기 위해 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창고에 가득 쌓인 먼지를 보는 순간 반짝 하는 생각이 떠올라 먼지를 태웠더니 큰 금덩이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재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먼지는 제련할 때 떨어진 금가루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 주변에서 큰 이익도 얻고 행복과 기쁨도 발견하게 됩니다.
단점만 보는 사람은 250평 저택에 살면서도 불평하지만, 장점을 보고 감사할 점을 찾는 사람은 언제나 기쁘게 삽니다.
우리나라의 허 모 교수는 부자인데도 자동차가 없습니다. 그분이 미국에서 유학할 때, 그분이 존경하던 선생님께서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시는 것을 보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보다 평균 수명이 10년 더 길답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에도 훨씬 더 건강하답니다. 그것을 아는 선생님께서 일부러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셨던 것입니다.
‘우리 집에만 자동차가 없다.’라고 생각하면 불평의 요소가 되지만, ‘자동차가 없으면 10년 더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산다.’라고 생각하면 자동차를 갖고 사는 사람보다 더 기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장점을 보는 안경을 선물로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루하루가 감사합니다. 사는 것이 기쁨이고, 사는 것이 보람이고, 사는 것이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본 고린도 교회의 장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먼저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기억한 것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이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과거지사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너희가 나를 기억하는구나.”
사도행전 18장 1절에서 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눈물과 기도로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해서 교회를 세운 후 그 교회를 떠나 로마로, 에베소로, 데살로니가로 다녔습니다. 바울은 한 교회의 목회자가 아니라 선교사, 떠돌이 전도자였습니다. 그래도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잊지 않고 일이 생기면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를 바울은 늘 고마워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기억하니 내가 칭찬하노라.”하며 칭찬한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기억한 것이 그들에게도 복이 됩니다.
자식이 부모님을 기억하면 효자가 될 뿐 아니라 그릇된 길로 가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실 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올곧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핏덩이로 태어난 내가 어머니의 손길로, 아버지의 사랑으로, 가족의 도움으로, 이웃의 도움으로, 학교의 도움으로, 선배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을 기억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 자기 혼자의 힘으로 선 것처럼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베토벤은 인류 역사상 한 두 사람 있을까 말까할 정도로 탁월한 음악의 대가입니다. 그는 천재이면서도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차르트도 탄복했습니다.
그가 어느 이층집에 세를 얻어 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주인이 사는 아래층에 물이 똑똑 떨어졌습니다. 주인이 이층을 향해 무엇을 하기에 물이 자꾸 떨어지느냐고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 대답도 없고 물만 계속해서 떨어졌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하인을 올려보냈습니다. 이층에 올라간 하인은 그 자리에 부동 자세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토벤이 피아노를 얼마나 열심히 치는지 그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 피아노를 치던 베토벤이 손가락이 아프니 손을 양동이의 물에 담갔다가 턴 후 다시 피아노를 쳤습니다. 그 물이 마루 밑으로 새어 떨어졌던 것입니다. 하인이 와서 서 있는 것도 모르고 그는 피아노만 쳤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피아노를 쳐서 그의 피아노 건반에는 홈이 패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세계 최고의 음악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인생의 고비였던 서른 두 살에 자살하려 했습니다. 그가 열 일곱 살 때 사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서른 두 살에는 청각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음악가에게 청각 장애는 절망적인 일입니다. 절망한 그는 유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자살하려는 순간, 그의 머리에 어머니의 얼굴이 스쳤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사랑해 주던 어머니를 생각하니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유서를 찢어버리고 다시 일어나 기도하면서 인류를 위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우리 양곡교회가 여기에 이렇게 서게 된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몇 분이 크게 헌신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분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친형제도 못할 일을 제게 해 주신 고마운 분들도 계시는데, 그분들을 위해서는 제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은혜를 끼쳐주신 분들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누구보다 항상 기억해야 할 분은 예수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20대 때 너무너무 바쁘게 살았습니다. 1인 3역을 하며 살았습니다. 공부하면서 돈을 벌고, 또 기관을 섬기느라 잠을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습니다. 가끔 공중 목욕탕에 가면 탕 안에서 깜빡 졸다 물 속에 빠지기도 하고, 이발소에서 이발하다가도 졸고, 얼마나 바쁘고 피곤하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하루는 너무 피곤해서 다락방에 올라가 잠시 누웠을 때 잠이 들었다 깼는데, 잠에서 깨는 순간 제 가슴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모릅니다.
‘내게는 왜 이렇게 책임이 많은고? 왜 나는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고 일을 해야 하나?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나는 왜 이렇게 뼈빠지게 고생해야 하나?’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세상이 공허했습니다.
그 시간이 8, 9초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별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그렇다. 주님이 계신다. 내 주님이 계신다. 그래, 내 주님이 계신다.’
그래서 제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믿고 살아오면서 인생의 공허를 느낀 적이 그때 한 번 8, 9초 정도였는데, 그것도 예수님이 떠오르니, 예수님이 기억되니 사라 졌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기억하면 삶의 어떠한 어려운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복이 됩니다.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 모 목사님이 계십니다. 깨끗하고 정의롭고 인격이 아주 귀하신 분인데 며칠 전에 그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분에게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1차선 도로를 운전해 가고 있는데 앞의 트럭이 너무 천천히 달려서 추월하려고 약간 옆으로 나갔다가 반대편 차선의 승용차가 차선을 넘어 목사님 차선으로 막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운전자가 졸고 있구나.’라고 생각한 목사님은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앞에 있던 트럭 운전 기사는 그냥 가다가 승용차와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이 속히 차를 세우고 내려가 보니 승용차 운전자는 즉사했고 트럭 운전자는 핸들에 끼인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트럭이 부딪치고 난 후 돌면서 반대편 차선으로 가 있어서 만일 목사님이 그 사건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100% 트럭 운전자가 잘못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상황을 그대로 설명한 후 트럭 운전기사를 병원으로 싣고 가는 것을 보고 나서 목사님이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에게 전화가 빗발치듯 왔습니다. 승용차 운전자의 가족이 “제발 트럭 운전 기사에게도 조금은 잘못이 있다고 말해 주세요. 그래야 우리가 보험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라고 거절했는데, 나중에 더 가슴 아픈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의 부인이, 목사님이 대학생 시절에 교회에서 가르쳤던 고등부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사고를 당한 그 사람의 형제가 목사님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회계사가 될 때까지는 믿음 생활을 잘 했던 그가 돈을 많이 벌고 나서는 그만 예수님도 잊고 교회도 잊고 세상일에 파묻혀 살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목사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는지 모릅니다.
시편 50편 22절, 23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면, 예수님을 기억하고 살면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져 피곤할지 몰라도 그것이 우리의 생명, 우리의 복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면 술집에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면 음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면 나쁜 짓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마운 분들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보다 우리 하나님, 우리 예수님을 기억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03편 1절에서 5절에 말씀하십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십시다.

바울이 본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장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전해준 유전을 그대로 지킨 것입니다. 고린도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교회를 떠난 후 편지로 보낸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 하는 1년 6개월 동안 많은 말씀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유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의 ‘유전’은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전한 모든 설교를 포함해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말합니다. 창세기 공부, 마태복음 공부, 아버지 학교, 부부 세미나 등도 좋지만 그것은 그저 코끼리의 일부분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전체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전한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의 모든 귀한 것을 뽑은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바꾸지 못합니다. 뉴스를 보도하는 아나운서가 뉴스를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아나운서는 뉴스를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든 어느 목회자든 성경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그대로 전했고,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한 말씀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오늘도 증거된 말씀을 가감하면 안 되고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말씀의 핵심은 사도신경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먼저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구원 역사를 계획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 다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우리 죄를 사하시고 무덤에 들어가셔서 우리의 죽음을 맛보시고 극복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 주신 것, 이제 반드시 재림하셔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실 것을 믿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성경 안에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 많아도 성경은 도덕 교과서가 아닙니다. 불교나 다른 이단 종교도 선을 행합니다. 성경에는 선이 가득하지만 성경은 선한 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구제하라는 말씀이 많지만 성경은 구제를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시고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성령님께서 믿게 하시는 구원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하면 믿지 못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바로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한 존재에 세 인격(three persons)이 있습니다. 성부는 성자와 다릅니다. 성자는 성부가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도 성자도 아닙니다. 다 다른 인격자이십니다. 그런데 신비하게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다르면서도 하나가 되어 계시는 신비로운 존재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가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암컷과 수컷이 교미해서 새끼를 낳는 것은 생물학적 차원입니다. 아버지는 남자이고 딸은 여자이지만 남자인 아버지와 딸인 여자가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 과학적 측면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아버지와 딸이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은 사회 과학자가 하는 말입니다.
삼위일체는 생물학적 차원도 아니고 사회학적 차원도 아닙니다. 하늘나라 차원입니다. 때문에 이 신비는 나락을 찧으면 쌀이 나오고 밤송이를 까면 밤이 나오듯 성경을 해석하고 정리하면 나오지만 그냥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 믿게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이 한 하나님이심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멘 하신 것은 성령 받은 증거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교리를 잘 지켰습니다.
이것을 지키면 든든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이신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내 죄를 담당하신 분이 나의 주 예수님이신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지금도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는데,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으시는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성경을 자꾸만 읽게 하셔서 모든 생활을 성경에 맞추어 살게 하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세상 풍조가 바뀌어도 그 해답은 바뀌지 않습니다. 정보화 사회가 되었지만 정보가 해답이 아닙니다. 과학 시대라도 과학이 해답이 아닙니다. 미국의 과학이 최첨단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들의 인공위성도 떨어집니다. 산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많은 정보가 수집되어도 거기에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답은 오직 예수님이고 성경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개인의 해답도 성경에 있고 가정의 행복도 성경에 있습니다. 무슨 잡지나 여성 운동가들에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난 금요일 오후, 우리나라의 유명한 여성지의 기자 두 사람이 제가 참석해 있던 모임에 찾아와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강하게 말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우리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도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한국 교회는 엄청난 사회봉사, 엄청난 선을 행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가정을 지키는 것이다. 이 사회의 이혼이 아무리 급증해도 교회는 그렇지 않다. 20년이 넘도록 내가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우리 교회에는 이혼하는 가정이 거의 없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극복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세 가정이 결혼해서 한 가정이 무너지다가 지금은 다섯 가정이 결혼하면 두 가정이 무너진답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질 것입니다. 전에는 여자들이 이혼하면 살길이 없었는데 지금은 직장을 가져 살아갈 수 있으니 쉽게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맞벌이 부부는 이혼할 가능성이 많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남편들이여, 아내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도록 능력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가정도 편안하고 교회도 됩니다. 맞벌이를 하지 않아야 여자들이 교회에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자가 직장을 가지면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말세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면 행복할 줄 압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편이 아닌 숨겨둔 애인을 만나면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있다고 그것이 더 좋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 가까이에서 사는 한 남자가 출장 갔다오는 길에 한 숙박업소에 들어가 다른 여자를 불렀답니다. 출장 갔던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 하루 일찍 돌아왔는데 아내에게 권태를 느끼던 남편이 집 근처까지 왔다가 숙박업소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다른 여자와 밤을 즐기고 다음 날 집에 가려고 다른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방에 들어오는 여자는 바로 자기 아내였습니다. 충격을 받은 남자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세상은, 마귀는 우리를 속입니다.
“선악과를 먹어라. 그러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된다.”
그러나 먹으면 망합니다.
가정의 행복은 성경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마귀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마크는 심장, 하트인데, 심장은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뿐입니다. 아내도 남편에게 하나뿐인 자기 심장을 다 쏟고, 남편도 자기 심장을 아내에게 다 주고, 그래야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아내를 두고 남편을 두고 딴 짓을 하면 행복해집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인격, 양심, 가정, 자식이 다 파괴되고, 사회가 파괴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는 산소를 마시고 밥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말씀은 바뀌지 않습니다. 옷은 바뀌어도 말씀은 바뀌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축복이고, 이웃에게는 등불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장점만 보는 안경을 선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은혜를 끼친 분들을 기억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 변함 없이 우리의 삶의 지표가 되는 유전, 전승, 말씀을 붙잡고 살아서 가슴을 치며 후회하지 않고, 하루하루 감사하고 벅찬 감격 속에서 은총을 먹으며 사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