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수목사 (양곡교회)

제가 두 개 노회 연합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문 앞에 있는 아주 귀한 난들이 다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이 귀한 난들이 다 죽었구나. 이렇게 시들었으니 회생될 수 없겠구나. 이제 버려야 되겠네.’하는데, 한 달 동안 화분에 물을 한 번도 주지 않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때를 따라 화분에 물을 주던 아내가 미국에 간 지 한 달이 넘었는데 그동안 제가 물을 한 번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난들이 주인을 잘못 만났다고 얼마나 원망했겠습니까? 화분의 난들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살아날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죽더라도 물을 실컷 먹어보기라도 하라고 물을 몇 바가지 퍼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너무 바빠 새벽에 나왔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가니 또 화분의 난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제 생활이 얼마나 바쁜지, 여러분이 보내어 주신 성탄절 카드, 여기저기에서 보내어 주신 카드, 대통령께서 보내 주신 카드도 성탄절에는 읽지 못하고 1월 중순경에 읽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가 또 서울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집에 갔더니 세상에 난들이 부활해 있었습니다. 누가 세워준 것도 아니고 막대기로 받쳐 준 것도 아닌데 푸릇푸릇하고 꼿꼿하게 서 있었습니다. 저를 보고 “어서 오세요.”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확인하기 위해 그것들을 한 번 만져보았더니 힘이 있었습니다. 시들었을 때는 파김치 같았는데, 힘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물이 생명이구나.’
아무리 좋은 나무, 아무리 귀한 꽃이라도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한 달간 물을 주지 않아 다 죽어가던 난에 물을 주니 살아났습니다. 우리 믿음의 나무도 똑같습니다. 5대, 4대, 조상 대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좋은 집안의 사람이라도 때를 따라 은혜의 비를 맞지 않으면 죽습니다. 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 믿음의 향기를 날리는 사람이라도 몇 달간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영혼이 말라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화분의 나무가 물을 공급받아야 사는 것처럼, 우리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와 은혜의 비를 흠뻑 받아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우리는 주님의 화원에 꽃이어서 주님의 은혜의 비를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도 이미 하늘 문은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 있다는 말씀을 드리니 어떤 분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제가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한 장로님이 하늘 문을 열어 달라는 기도를 아주 심한 사투리로 표현하셨습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의 처남 되시는 분인데 ‘하늘 문을 열어재치시고…’라고 하셨는지 뭐라고 하셨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좌우간 이상한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어쨌든 예배 시간에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이 시간에도 목마른 영혼이 만족하게 되고, 시들은 영혼이 푸릇푸릇하게 되고, 힘없는 영혼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백화점의 마네킹에게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 기계로 일하는 로봇에게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느낌, 감정이 있게 만드셔서 우리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대화를 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날마다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간식도 먹으며 살게 하셨습니다. 먹는 재미도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짓기 전에 먼저 오곡백과와 맑은 물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생수의 강이 네 개나 흐르고 있었는데 비손 강바닥에는 금이 있었습니다. 금돌 위로 흐르는 물을 아담과 이브가 마셨던 것입니다. 또 기혼 강, 힛데겔 강, 유브라데 강도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도 주시고 마실 음료도 주셨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져 양식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비상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양식을 주십니다. 엘리야가 마실 물이 없어 죽게 되니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수원지가 좋아 늘 물이 흐르는 그릿 시냇가로 가게 하셨습니다. 물은 마셨지만 먹을 것이 없으니 까마귀를 시켜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법도 사용하십니다.
40년 간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사막에서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떡가루,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살도록 해 주셨음을 감사합시다. 먹는 것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대충 먹고 살자.’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먹는 것이 생명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또 먹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일이 있으면 잔치를 벌이고 먹지 않습니까? 귀한 손님이 오셔도 먹고, 아들이 군에서 휴가를 와도 먹습니다. 먹는 것이 삶의 기쁨인 것입니다. 원래 금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으로 고생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먹지 않으면 부모는 걱정하게 됩니다. 자식이 잘 먹을 때 부모가 기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인생의 큰 문제, 큰 역경이 있어서 밥이 넘어가지 않을 때는 금식 기도해야 하지만, 평소에는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하며 맛있게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하면서 맛있게 드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식탁에 축복과 즐거움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앞으로 우리 회사가 잘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해고당하면 어떻게 하지? 우리 가게가 잘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무엇을 먹고 살지?’하는 걱정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먹여 주십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 26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할렐루야!
여러분과 저는 하늘의 새보다 귀합니다. 자식이 먹고 마시는 것은 부모가 다 예비하듯, 우리의 양식은 하나님께서 염려하시고 예비해 두십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 굶게 하지 않으십니다. 먹여 주십니다. 우리가 북한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교회를 불태우고 교회 문을 닫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굶게 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면 만나를 내려 주셔서라도 먹여 주시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먹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리고 같은 음식이라도 그 음식을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육군소위와 함께 하는 식사와 육군 대장과 함께 하는 식사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장관과 함께 하는 식사와 대통령과 함께 하는 식사는 같은 미역국을 먹어도 그 의미가 다릅니다.
그러면 가장 귀하고 가장 의미 있는 식탁은 어떤 식탁이겠습니까?
성찬의 식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찬은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직접 떼어주시는 것입니다. 군에서 휴가 나온 아들에게 어머니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듯,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시는 떡과 잔이 바로 성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찬의 자리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 떡과 잔은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주시며 “이것을 받아라. 이것은 내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을 주시며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을 먹는 시간에 그것은 빵이지만 주님의 살을 먹는 것과 같은 능력과 신령한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를 뽑아 담은 것이 아닌 포도주이지만 그 잔을 마실 때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과 같은 능력과 축복이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4절, 55절에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한복음 6장 58절에는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대하면 우리가 얼마나 귀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몸이 예수님의 몸처럼, 우리 혈관에 예수님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찬을 계속해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까지 행해야 합니까? 천국에 갈 때까지입니다. 천국에 가면 성찬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성찬식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성찬식을 행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성찬식을 행할 때 영적인 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 받아 구원을 받고 마귀와 죄의 사슬에서 자유를 얻고 영생을 얻었지만 사는 것이 바빠서 그 믿음, 그 기쁨, 그 자유, 그 감격이 줄어들 수 있는데 성찬식을 할 때 그것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성찬식의 뿌리와 예표는 구약의 유월절 만찬에 있는데, 출애굽기 12장 1절에서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유월절에 친히 명하셨습니다. 식구 수대로 어린양을 준비하여 구워서 먹되 쓴 나물과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과 아울러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양을 잡을 때 그 피를 우슬초에 적셔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죽음의 천사들이 전 애굽을 샅샅이 뒤져 모든 집의 장남과 짐승의 첫 새끼를 쳐죽일 것인데, 그때 양의 피가 있는 집은 그냥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응답을 가져다 주는 천사, 축복을 가져다 주는 천사가 있는가 하면, 재앙과 채찍, 심판을 행하는 천사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는 죽음의 천사, 심판의 천사가 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축복하는 천사가 오기를 바랍니다. 기도 응답을 갖고 오는 천사가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도 축복의 천사, 기도 응답을 갖고 오는 천사만 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를 보내시면 그 천사들이 집집마다 들어가서 그 집의 장남과 짐승의 첫 새끼를 다 죽이는데,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피가 묻혀 있는 집은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집에 죄가 있어도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2장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이 말씀은, 한 번의 식사로 끝내지 말고 매 유월절에 기념 식사를 해서 자자손손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셨다. 애굽의 바로를 꺾으시고 바로의 사슬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택하셨다.”하는 것을 알려 주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계속해서 성찬식을 행하여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몸을 찢으셨구나.’하는 감격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쇠사슬에서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죄의 쇠사슬에서, 지옥의 쇠사슬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구약의 유월절에는 육신의 생명만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성찬을 먹을 때마다 그 감격이 새로워져서 기뻐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성찬식은 매주일에 해야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매주에, 또는 밤마다 성찬식을 했습니다. 모이면 성찬식을 했습니다. 지금은 성찬식을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1년에 몇 번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하는데, 성찬을 먹고 마실 때마다 신비로운 은혜가 다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구나.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 내가 자유를 얻었구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묘지를 정하면서도 잘못 정했다가 집안이 망할까봐 덜덜 떱니다. 결혼식도 궁합을 보며 날짜를 잡습니다. 이사도 조심해서 합니다. 박사가 되고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도 쩔쩔매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구원의 감격이 더 새로워지고 찬송하게 되는 것이 성찬의 축복이고 목적인 것입니다.

그 다음, 성찬을 먹는 사람은 스스로 죄를 끊게 됩니다.
은혜를 받아도 죄를 끊게 됩니다.
이번 집회 때, 최첨단 사업을 하시는 회사 사장님이 제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우들은 저를 좋은 크리스천으로 보고 있지만, 저는 죄인입니다. 이러이러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 첫날 은혜를 받고 그런 것들을 다 끊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바로 살겠습니다.”
그러면서 감격해 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죄를 끊게 됩니다.
성찬의 은혜를 받으면 정말 죄를 끊게 됩니다.
내가 머리로 음란한 생각, 악한 생각을 한 것 때문에 주님께서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내가 해서 안 될 일을 내 손으로 했기 때문에 주님의 양손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내가 가서는 안 될 길을 내 발로 가서 지은 죄 때문에 주님의 발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내가 품어서 안 될 욕심을 품었기 때문에 주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리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성찬을 먹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고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 내 몸이 주님의 몸이고, 내 혈관에 주님의 피가 흐르는데…. 우리 주님을 슬프시게 하지 말아야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두 번 지시도록 내가 죄를 지으면 안 되지.’하는 새로운 각오,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의 목적이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깨달음이 옵니다.
제 비몽사몽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얀 옷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이 직경 1cm, 길이 3m 정도 되는 큰 침을 갖고 나타나셔서 제 얼굴은 보지도 않으시고 제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욱’ 하시며 제 오른 발등을 꽉 찍으셨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양말을 벗고 발등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 발등에 분명히 못 자국 같은 것이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삼일 동안 정말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오고가는 곳 중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곳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생각 없이 그냥 다녔는데,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제가 그 곳에 발을 딱 끊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곳만 다니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들어가는 그 장소, 여러분이 들어가서 쉬는 그 곳을 아내가 알아도 좋고 아이들이 알아도 좋습니까? 방송국에서 비디오로 찍어 방송해도 좋습니까? 여러분이 잠시 쉬는 그 곳을 신문에 내어도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구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욥기 31장 4절에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Does he not see my ways and count my every step?)』
우리가 성찬을 먹으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니 발로 죄를 지으러 가기도 어렵고 손으로 죄를 짓기도 어렵고, 또 변하여 죄를 끊고 새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클라라라는 여인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쾌락을 누리기 위해 자기 몸을 던져 용감하게 세상을 즐기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회개했습니다. 성찬식을 한 다음에는 아름다운 팔찌와 진주 목걸이를 버리고 팔과 목에 쇠사슬을 걸고는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어쩌다 형제를 비방하면 ‘정말 허물이 많은 내가, 참으로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내가 어찌 형제를 비방했나?’하고 마음 아파하며 삼일간 혀에 집게를 집어놓고 고통을 주면서 죄를 끊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귀걸이와 목걸이를 다 버리고 쇠사슬을 걸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정신 자세는 배워야 됩니다.
누구든지 성찬의 은혜를 알면 죄를 끊게 됩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십자가 상 앞에서 한 신사가 무릎 꿇은 자세로 두 손을 들고 눈물을 뚝뚝뚝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여행객이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점잖아 보이는 신사가 막 울며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 직면하면 우리의 더러운 죄, 흉한 죄, 음란한 죄… 모든 죄가 미워집니다. 그리고 주님을 닮아 새 마음을 품게 되고 새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공이 무엇입니까?
백만 명 교인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가 되면 성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인이 백만 명인 교회의 목사님이라도 그 삶이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면 그 목사님은 성공한 목사님이 아닙니다. 교인이 20명밖에 안 되는 시골 교회의 목사님이라도 그 인격과 삶이 주님을 닮았다면 귀한 목사님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5만 명 사원을 거느린 사장이 되고, 200명 의사를 거느린 병원 원장이 되고, 검찰총장이 되고, 군의 대장이 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꿈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11절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끌려온 여자를 돌로 치려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부끄러워 도망을 갑니다. 모두 도망가고 아무도 없을 때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으십니다.
“여인아, 너를 정죄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아라.”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신 것은 “앞으로 계속 죄를 지어라. 내가 다 용서해 준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이 말씀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다시는 범치 않는 그런 끊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미국에 니미치라는 항공 모함이 있는데, 이름을 그렇게 붙인 사연이 있습니다.
한 해군 대장이 항공 모함을 방문하여 귀한 행사를 치르기로 되어 있는데, 대장 계급장이 그만 망가져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의 행사에는 계급장이 가장 큰 상징이니 계급장 없이 행사를 치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군함에 있는 해군들 중에서 대장 계급장을 갖고 있는 사람은 빨리 신고하라.''고 급히 전달했습니다.
마침 대장 계급장을 호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니미치라는 소위가 있어서 대장이 그 계급장을 달고 행사를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대장이 니미치 소위를 불러 물었습니다.
“자네는 소위인데 왜 대장 계급장을 갖고 다니는가?”
“제가 소위로 임관하는 날, 앞으로 대장이 되라고 제 애인이 대장 계급장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다닙니다.”
“굉장히 훌륭한 애인을 두었구먼. 열심히 해서 자네도 대장이 되게.”
그 후 니미치가 열심히 복무해서 정말 대장이 되었습니다.
애인이 준 대장 계급장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나는 대장이 되리라. 나는 대장이 된다.’하며 열심히 복무하니 대장이 된 것입니다.
꿈은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귀한 꿈은 호주머니가 아니라 우리 안에, 우리 영혼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영혼에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 말이, 내 삶이 주님을 닮아야지.’하는 꿈을 갖고 사셔서 우리를 보는 사람이 주님을 보는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하면, 내가 죽을 자리에서 주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삶의 목적이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마다 ‘나는 이제 주님을 위해 살아야지.’하게 되는데,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6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따라 합시다.
“성찬 받은 자의 가장 큰 사명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중국의 한 주방장이 미국의 큰 식당에 초청을 받아갔는데 한 달 월급이 2만 불이었답니다. 한 달에 2만 불이면 약 2천 4백만 원으로 연봉이 약 3억 원이 됩니다. 우리 중 연봉이 3억 원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중국에 있는 그 주방장의 형이 어떤 실수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답니다. 중국 법은 형제가 대신 사형을 받을 수 있답니다. 형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주방장은 형을 대신해서 자기가 사형을 받기로 했습니다. 자신은 결혼하지 않은 혼자 몸이니 죽어도 괜찮지만 형수와 조카들이 있는 형이 죽으면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공한 주방장이 중국으로 돌아가서 형 대신 사형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희생적인 동생입니까?
우리는 형제를 조금 도와 주는 것도 얼마나 어려워합니까? 남편이 동생을 도와 주려고 하면 아내가 싫어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형을 위해 생명을 대신했으니 그 형이 동생을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동생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만일 그 동생이 형 대신 죽으면서 “형님,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것을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다면 형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일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내가 죽을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면서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라.”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가복음 1장 38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우리 주님께서 제일 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을 먹을 때마다 ‘나도 전도해야지. 내가 전도해야지.’하며 복음 전도의 불이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감동 깊은 글을 읽었습니다.
부산의 한 부자가 아주 영리한 진돗개를 길렀습니다. 그 진돗개가 길 건너편의 정육점에 가서 고기도 사다 주었습니다. 바구니에 고기 한 근 값을 넣어주면 고기 한 근을 사오고, 두 근 값을 넣어주면 두 근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 그 집 앞에도 정육점이 있어서 주인은 바구니에 고기 한 근 값을 넣어주며 영리한 개에게 고기를 사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개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누군가 개를 도적질해 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오후, 시장을 보러 나간 부인은 건너편에서 개가 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반가워서 막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개가 주인을 보고 푹 쓰러지더니 죽었습니다. 바구니에는 썩은 고기 한 근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개가 부산까지 갔다온 것입니다.
아무리 영리해도 개는 개입니다. 사람이라면 바로 앞에 있는 정육점에 가지, 부산까지 가겠습니까?
그러나 그 개의 충성을 보십시오.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을 위해 고기를 먹지도 않고 목숨을 걸고 돌아왔습니다. 사명을 끝내고 죽었습니다. 개도 주인에게 그렇게 충성하는데,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도 주시고, 피도 주시고, 성령도 주시고, 천국도 주시고,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너무 인색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정말 한 방울의 땀이라도 주님을 위해 흘리고, 1초의 시간이라도 주님을 위해 써야 합니다. 돈을 벌어도, 결혼을 해도, 대학 교수가 되어도, 의사가 되어도, 사장이 되어도, 대장이 되어도, 대통령이 되어도 주님을 위해 되고, 또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성찬을 대하면 그 속에 주님께서 계셔서 결국 임마누엘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어디에 가도 ‘내 몸에 주님께서 계신다.’하는 것을 아니 든든합니다. 그리고 살고 나면 주님께서 함께 하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렇게 큰 열매를 맺고 이렇게 큰 복음 사역을 이루셨습니까?”
“내가 이룬 것이 아니오. 주님께서 나를 써서 이루신 것이지요.”
사도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도 감히, 감히 그렇게 말합니다. 어젯밤 8시 30분에서 9시까지 방송에 나오는 제 설교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저런 신비로운 말씀이 나오나?’하고 놀랐습니다. 저는 그런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려 드렸습니다.
우리가 살고 나면 ‘주님께서 하셨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제가 사는 것이 아주 작아도 주님께서 연주하시면 세계에 감동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메모해 두지 않아서 이름을 밝혀 드리지는 못하겠는데, 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인산인해를 이룬 청중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했습니다. 그 연주가 얼마나 기가 막힌지 모두 기립 박수를 하며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바이올리니스트가 그 자리에서 바이올린을 발로 밟아 부수어 버렸습니다. 모두 놀랐습니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보통 수억 원의 값이 나가는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는데, 어떤 바이올린은 이십억 원도 한다고 하는데, 부수어 버렸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때 바이올리니스트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이것은 아주 값싼 형편없는 고물 바이올린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주 값진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앞의 연주나 뒤의 연주나 거의 비슷했습니다.
어떤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가 하는 것보다 누가 연주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성찬을 먹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연주해 주십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산다싱의 전기를 읽어보면, 깜짝 깜짝 놀랄 일이 많습니다.
산다싱이 티벧으로 전도를 가는데 큰 냇물이 나타났습니다. 물은 깊고 날씨는 춥고 더구나 수영도 못하니 산다싱은 낙심하여 냇가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닥불이 보였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던 사람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도와 드리리다.”하더니 순식간에 산다싱에게 와서 “자, 내 어깨에 타시오.”라고 했습니다. 산다싱이 그 어깨에 타자마자 그 사람이 또 순식간에 시내를 건너 주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워서 “아이고, 감사합니다.”하며 얼굴을 들어보니,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닥불도 없었습니다. 천사였던 것입니다.
그때 산다싱은 ‘천사가 나를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준 것처럼 나는 지옥 갈 사람을 천국으로 옮기는 일을 해야지.’하며 더 열심히 전도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을 모시고 가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면 천사가 직접 도와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앞길에 여러분이 건너지 못할 구렁이 있으면 하나님의 천사가 옮겨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찬을 먹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임마누엘의 복을 누립니다. 그래서 사실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해가 진 오후에 엄마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뒷마당에 가서 빗자루를 가지고 오너라.”
“무서워.”
“괜찮아. 주님께서 계신다.”
“아니야, 무서워.”
“어허, 주님께서 계신대도. 주님께서는 뒷마당에도 계시고 어느 곳에나 다 계신다.”
그러자 아이가 문을 열고 말했습니다.
“주님, 빗자루 좀 갖다 주세요.”
참 기가 막힌 아이입니다.
우리도 이 아이처럼 말할 때가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셔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어디에 가게 됩니까?
미국 미시시피 강은 굽이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갔다가, 왔다갔다합니다. 그러나 미시시피 강은 결국 멕시코만에 이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찬식을 행하는 우리도 거룩하다가 때로는 진창에 뒹굴고, 열심히 충성하다가 범죄하고, 희망차게 살다가 낙심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길이 동으로 서로 왔다갔다하는 것 같아도 점점 천국에 가까워지고, 마지막에는 천국에 도착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도 먹고 귀한 것을 다 먹으며 살아도 성찬을 먹지 못한 사람은 망하지만, 이 세상에 살 때 가난하여 좋은 것을 먹지 못한 사람이라도 성찬을 먹은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됩니다.
최고의 축복은 성찬의 축복입니다.
성찬식에 늘 참석하시고 이 은혜를 영원토록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