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수목사 (양곡교회)

우리가 주일 낮과 밤에 고린도전서의 소중한 말씀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고 하는 중에 어제는 사도 바울의 가슴에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막 흘러 넘치는 것을 깨닫고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교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다칠까 봐, 우상 숭배를 하다가 망할까 봐, 간음하다가 죽을까 봐, 원망하다가 마귀, 불뱀에게 물려 죽을까 봐, 또 하나님을 시험하고 저항하다가 하나님의 불에 죽은 고라 다단과 같이 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으로 계속 편지를 쓰면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my beloved)’라고 부릅니다. beloved 라는 말은 love하고는 다릅니다. love가 그냥 사랑이라면 beloved는 몇 가지로 해석하지만 하나뿐인 사랑을 나타날 때 쓰는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my beloved''라고 부릅니다. 셰익스피어는 ‘사랑은 하나(only one)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 사람도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했습니다. 좌우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단지 하나뿐인 사람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귀한 것입니다.
특히 바울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최선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은 최고의 사랑이다.’라는 독일 격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병들 수도 있습니다. 요즘 어머니들은 아기에게 젖도 먹이지 않습니다. 또 아이를 키우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한테 맡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직장 일이나 자기 생활을 하려고 시어머니나 친정 어머니께 아이를 맡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을 가진 어머니가 오늘날에는 적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나중에 자식에게 서러운 일을 반드시 당하게 될 것입니다. 불을 보듯 뻔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제가 저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를 드리고 그리워하는 것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고 어머니 젖을 4년 간이나 먹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어머니의 젖을 4년 더 먹은 셈이 됩니다. 동생의 것까지 빼앗아 먹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엄마 엄마'' 하는 것입니다. 젖도 주지 않는 엄마에게서 엄마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바울은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교우들을 사랑했습니다. 제 가슴에도 그런 사랑이 철철 넘쳐서 여러분에게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역장님의 가슴에도, 교사들의 가슴에도 그런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 구역장님들이 제가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충성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충성하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교사들도 뜨겁게 충성하며 너무 잘 하니 그 소문이 나서 교사 강습회에 와 달라고 전국에서 저를 부릅니다. 우리 교사들 덕분에 제가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구역장님과 교사님들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최고의 교육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교육할 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잘못되면 안 된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을 피하라는 말씀은 우상 숭배하는 일에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즉 출애굽 하라는 것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쇠사슬을 박차고 떠났듯이, 우상 숭배하는 일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상 숭배하는 일을 하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제물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도 시장에서 팔면 묻지 않고 사먹으면 됩니다. 모든 것은 우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는 아닙니다. 우상은 금으로 은으로 동으로 나무로 돌로 만든 것이라 아무것도 아니지만, 거기에 숭배하면 귀신이 찾아옵니다. 귀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는 사령관들이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는 천사 사령관들이 많습니다. 그 사령관들 중 한 천사가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싶어 반기를 들고 하나님께 도전장을 냈습니다. 그것이 사탄이고, 그를 따라온 졸개들이 마귀이고 귀신입니다. 그 귀신들이 점쟁이 속에 들어가서 일하고, 우상 뒤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에게 절하면 귀신을 숭배하는 것이 되고, 우상의 전에서 음식을 먹으면 귀신의 잔을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영적인 음란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음란하면 망하니 그런 곳에 가지 말고 그 곳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과 달리 영력이 있어서 아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잘 아는 사람을 보면, 우리가 “귀신같이 잘 맞추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에게서는 떠나야 합니다. 아무리 영력이 있는 귀신이라도 떠나야 사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홍계관이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섬기는 귀신이 “네가 곧 죽게 될 텐데, 그때 사는 길은 임금님의 용상 밑에 숨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왕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를 알고 있는 왕이 용상 밑에 숨어 있도록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그가 왕의 용상 밑에 숨어 있는데 큰 쥐 한 마리가 지나갔습니다. 왕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왕이 홍계관에게 물었습니다.
“홍계관, 방금 쥐가 지나갔는데 몇 마리가 지나갔는고?”
“세 마리입니다.”
“저 가짜 점쟁이의 목을 쳐 죽여라.”
왕의 명령을 받은 집행관이 홍계관을 한강 모래사장으로 데리고 가서 목을 치려고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그러자 홍계관이 말했습니다.
“조금만 참아 보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게 될 것입니다.”
하도 유명한 점쟁이가 그렇게 말하니 집행관은 뽑았던 칼을 내리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왕은, ‘그렇게 영특하다는 점쟁이가 한 마리의 쥐를 보고 왜 세 마리라고 했을까?’하며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쥐를 잡아 해부해 보라고 했습니다. 쥐의 배를 해부하니 그 안에 새끼 쥐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왕은 빨리 한강에 가서 홍계관을 죽이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말을 타고 달려가는 신하의 눈에 칼을 뽑아들고 서 있는 집행관이 보였습니다. 신하는 급히 손을 흔들며 사형 집행을 정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집행관은 그 사인을 ‘왜 아직도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았느냐? 빨리 사형을 집행하라.’라는 것인 줄 알고 홍계관의 목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을 아차현이라고 한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귀신도 아는 것이 있어서 귀신같이 안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찾아오는 사람을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귀신도 지옥 가고, 귀신을 찾는 사람도 지옥 갑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점하는 사람이 2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 20만 명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성령으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점하는 것, 사주팔자를 보는 것, 관상을 보는 것, 궁합을 보고 결혼 날짜를 잡는 것, 묘 터를 보는 것, 이것이 다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하면 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미신을, 우상 숭배를 피하라. 도망가라.” 할렐루야!
길을 가다가 독사를 만나면 피해야 됩니다. 우상 숭배는 독사보다 더 무서운 멸망의 뱀입니다. 우상 숭배를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먹는 성찬, 하나님의 거룩한 성찬을 먹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유월절 식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는데, 그 기사가 누가복음, 마가복음, 마태복음에 다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유월절을 준비하러 예루살렘에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누가복음 22장 8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을 지명하셨습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에 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한 남자가 있을 것이다. 그를 따라가라. 그러면 그 집에서 유월절을 준비할 것이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5리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니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유대에서는 여자들이 물동이를 가지고 다니지, 남자들은 물동이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우물가에 잘 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물동이를 가지고 가니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그렇게 선명하게 인도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을 따라가서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어디에서 드실고?’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집 주인이 “어서 오세요. 유월절 만찬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하며 다락방을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주석 학자는 그때 이미 그 방에는 유월절 만찬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120명이 들어가도 되는 큰방에 새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테이블에는 양고기, 쓴 나물, 떡과 포도주가 다 준비되어 있었답니다.
그 집은 마가복음을 쓴 저자 마가의 집이었는데 마가는 큰 재벌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감동을 받고, 영적으로 주님의 사인을 받고 그 집에서 그렇게 준비한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께 달려가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마가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남쪽으로 5리가 떨어져 있지만 마가의 집은 예루살렘 서편에 있으니 베다니에서 마가의 집까지는 10리가 됩니다. 천천히 걸으면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예수님께서 그 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그 방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준비된 떡과 잔을 놓고 기도하신 후 떡을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다.(십자가에서 찢길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주시며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찬이 되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도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게 됩니다. 제가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 봉사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성찬의 떡과 잔을 우리 주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축복의 떡, 축복의 잔인지 모릅니다.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시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음식은 그것이 아무리 귀해도, 무슨 음식이 좋다, 무슨 음식이 좋다 해도 영원히 사는 음식은 없습니다. 무엇을 먹든 다 죽습니다.
그런데 성찬의 양식은 먹으면 영원히 삽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55절에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는 내가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성찬을 먹지 않는 사람은 영생이 없고 성찬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먹고 마시면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이 새롭게 되지만, 살다보면 죄로 또 더러워지는데 성찬을 대할 때 성찬의 피가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몇 주간 몸의 때를 씻지 않으면 불쾌하지만 목욕탕에 가서 깨끗하게 때를 씻으면 상쾌해지는 것처럼, 성찬의 잔을 마시면 영혼이 시원함을 얻고 몸에 능력도 흐르게 됩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 잡을 때 능력이 흘러 치료를 받은 것처럼, 오늘날에도 성찬을 대할 때 능력이 흐르는 것입니다.
관절염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우리 교인 한 분은 성찬식 때, ‘하나님, 오늘 성찬을 먹을 때 주님의 능력이 흘러 제 관절염이 치료되게 해 주세요.“하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날 성찬식 후 관절염이 깨끗하게 나았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분이 막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성찬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찬은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하고 우상의 전에서 먹는 것은 귀신과 사귀는 것이지만, 성찬을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과 사귀고 주님과 사귀고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떡을 하나 준비해 가지고 나왔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찬식을 하실 때는 축사하신 다음에 큰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형편상 이미 잘라 놓은 떡을 나누어 먹는데, 원래는 큰 떡을 떼어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한 떡을 떼어 먹는 것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식구는 한 솥의 밥을 먹는 사람입니다. 한 솥의 밥을 먹으면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한 떡을 먹는다는 것은 한 식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찬의 떡은 바로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니 성찬의 떡을 받아먹으면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6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찬을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성찬을 먹은 사람은 어느 살이 자기 살이고 어느 살이 주님의 살인지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찬을 먹으면 우리는 몽땅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포도주를 네 잔 마셨는데, 네 잔의 이름이 다 있습니다.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이고 마지막 잔이 기쁨의 잔입니다. 그러나 네 잔을 한 사람이 다 마신 것이 아니라 모두 나누어 마셨기 때문에 한 사람이 조금씩 마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가끔 포도주 한 잔 마시는 것 가지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포도주를 드셨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씀했습니다. 집안에 회갑이나 결혼식 같은 축제가 있을 때 포도주를 담가 놓았다가 어른들에게 조금씩 대접하는 것은 욕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 포도주가 피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을 마실 때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 같은 축복과 능력, 신령한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찬식 때 먹는 떡을 예수님의 살인 것처럼 먹지만 예수님의 살이 아니고 떡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을 때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 같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잔을 마실 때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 같은 능력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피아단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본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마피아 조직들끼리 싸우다 서로 망하게 되니 하나가 되기로 서약하고, 각 조직의 두목들이 각자 자기 손가락을 베어서 빈 컵에 피를 받았습니다. 그 피를 섞어 서로 나누어 마시면서 “우리는 한 형제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주님께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성찬식을 보고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기들의 피를 나누어 마셨지만 수가 틀리면 또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피에는 능력이 있어서 마시면 죄가 없어집니다. 주님의 피는 보배 피입니다. 할렐루야!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죄 있는 사람도 주님의 피를 마시면 죄가 없어집니다.
성찬을 대할 때는 자기를 살핀 후 떡을 먹고 잔을 마시라고 하셨는데, 이는 죄가 있으면 먹지말고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와서 그냥 떡 하나 더 먹고 포도주 한 잔 더 마시는 것같이 그렇게 먹고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더 마셔야 합니다. 죄인에게 주의 피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분별한다는 말은 집에서 마시는 포도주와 같은 포도주를 마시지만, ‘이 포도주는 집에서 마시는 포도주와는 다른 주님의 피다.’하고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살과 피가 주님의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게 되고 축복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할 때 교회가 화목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일로 A장로님과 B장로님이 서로 섭섭해하고 골이 깊어졌어도 떡을 떼어 나누어 먹고 잔을 나누어 마실 때 ‘우리는 한 가족인데….’하며 회개하고 하나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은혜와 능력을 주시지만, 또한 성찬의 빵과 성찬의 포도주로도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잔, 축복의 잔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귀신의 잔을 마시거나 우상 숭배하러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귀신의 잔을 마시는 것은 한 아내가 두 남자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 아내가 어떻게 두 남자를 섬길 수 있습니까? 또 한 남편이 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병든 사랑이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잔만 마시고 주님께만 우리의 사랑을 맞추어야 합니다. 주님께도 맞추고 우상에게도 맞추고,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와 버금가는 위대한 조각가인 도롤드세가 예수님의 상을 조각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루브르미술관 책임자가 엄청난 예우를 해줄 테니 비너스 여신상을 빚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빚은 내 손으로 우상의 상을 빚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돈을 주어도 나는 비너스 상을 빚을 수 없습니다.”하고 절개를 지켰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잔에 참여한 거룩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선악과 있는 곳에 가서 선악과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곳에 가서 세상 사람들의 쾌락을 핥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절개를 지켜야 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됩니다.
먼지 같은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하여 보배가 되었으니 감사해야 됩니다.
우리 교회 한 장로님이 신장 두 개가 다 망가져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우가 신장하나를 떼 주어서 우리 장로님이 사셨습니다. 저는 그 장로님에게 모세 같은 건강을 달라고 날마다 기도합니다. 1부 예배 때도 이 말씀을 드렸는데, 예배를 마치고 나가니 그 장로님 부인이 제게 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꼭 10년이 됐습니다. 신장 이식 수술 한 지 꼭 10년이 되었는데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신대로 건강하여 아직 감기도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장로님에게 신장을 나누어 준 아우는 지금 영국에서 아주 건강한 몸으로 귀하게 선교사 일을 하고 계시고, 사모님도 아주 복되게 사시는데 현대 그룹의 이사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 장로님 부인이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형제간에 신장 하나 떼어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두 아들을 둔 한 재벌 사장님이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의사이고, 둘째 아들은 미국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의사인 큰아들의 신장이 다 상했습니다. 그 의사가 사는 길은 미국에 있는 동생의 신장을 이식 받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얘야, 네 형에게 네 신장 하나를 주어라.”
“아버님, 그래야지요. 그러나 제 아내가 있으니 의논해 보고요.”
작은아들이 자기 아내와 의논하니 아내가 돈은 1억 원이든 2억 원이든 줄 수 있지만, 신장은 절대로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신장을 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는데 신장은 안 되겠습니다.”
결국 큰아들이 죽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서 작은아들이 왔습니다. 대문에 들어서는 작은아들을 본 순간 아버지가 몽둥이를 들고 나가며 소리쳤습니다.
“내 집에 발을 들이지 마라!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내 앞에 영원히 나타나지 마라.”
너무너무 속이 상한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내쫓아버렸습니다. 그 아들은 형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중에 걱정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형이나 동생에게 그런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 형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형제가 건강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편안합니다.
내 형제에게 신장 하나 나누어주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우리 주님께서는 온 몸과 피를 우리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자고 일어나서 밤까지 찬송만 하고 감사만 드려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생을 주님을 위해 다 쏟아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살과 피를 누린 사람답게 품위를 지키며 그런 삶의 자세를 지니고 처신해야 됩니다.
조선 시대 영조 때 이양필이라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반 출신도 아니고 부잣집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 품을 팔았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서당에 다닐 수 없는 그는 혼자 책을 보며 공부했습니다.
하루는 그 동네의 한 어른이 지나가다, 마당 한복판에 자리를 펴놓고 거기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여섯 살 난 양필이를 보았습니다. 그가 무더운 여름날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상의를 입지 않은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필아, 이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공부하지 않고 왜 거기에서 하고 있느냐?”
“할아버지, 저희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 남의 집에서 고생하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서늘한 그늘에서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고생하며 공부해야지요.”
그런 자세를 가지니 서민의 아들이었던 그가, 머슴의 아들 같았던 그가 신분이 그렇게 엄격한 시대에 정승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나는 주님의 축복된 성찬을 먹은 사람이다.’하는 긍지와 그런 정신 자세로 살면 어디에서 살든 하나님께서 손들어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겨울비가 서글프게 내리는 날에 미끄러움을 무릅쓰고 여러분이 여기에 나와 계신 것은 여러분이 열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서경조 목사님은 우리 장로교 최초의 일곱 목사님 중 한 분으로 그 역사적인 소래교회를 세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해 동지 섣달, 교회에서 일하던 목사님이 무서운 열병에 걸려 열이 40도가 넘고 헛소리를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돌아가시게 되자 온 교우들이 모여서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열은 조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의학박사이신 엘비스 선교사님을 모시고 달려왔지만, 그분도 목사님의 병명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약도 쓰지 못하고 두 분 선교사님도 그저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창호지 문턱을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군가가 찾아온 줄 알고 문을 여니 큰 두꺼비 한 마리가 뛰어 들어와 서경조 목사님의 이마 위에 올라 앉았습니다. 모두 놀라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두꺼비가 목사님의 이마 위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두꺼비를 쫓아낼 생각을 못했습니다. 조금 후에 혼수 상태에 있던 목사님이 “아, 시원하다.”하시며 일어나셔서 식사를 하시고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뒤늦게 어떤 한의사가 말하기를, 그 병은 서사병인데 그 병의 치료제는 두꺼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병은 두꺼비가 열을 빼앗아 가야 낫는 병이랍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동지섣달에 두꺼비를 보내신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더 신비로운 일이 있습니다. 두꺼비의 기적 같은 그런 기적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덮고 계십니다. 그리고 두꺼비는 왔다가 떠나갔지만, 여러분과 제게 오신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거리에서나 상점에서나 어디에서나 이런 자세, 이런 긍지로 살면 하나님께서 착하고 귀한 아들딸이라고 빛을 비추어 주셔서 승리의 깃발을 흔들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