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근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승리교회)

이제는 완연한 가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 가운도 바뀌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시인이 아니라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시를 읊고 철학자가 아니라도 인생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사색의 계절입니다. 그리고 농부는 봄부터 씨 뿌려 열심히 가꾼 곡식을 땀을 흘리며 거두어 드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추수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곧 닥칠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겨울을 준비하는 그러한 계절이기도 합니다. 아마 지금도 수재민들은 곧 추워질 날씨에 대비하여 열심히 복구 사업에 힘을 쏟고 있을 것입니다. 태풍 매미의 피해를 입은 그 사실들을 생각할 때 아직도 가슴이 아픕니다. 4조 169억원의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도 그렇지만 127명이 죽거나 실종하는 엄청난 인명피해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대 왜 그렇게 많은 인명 피해를 내야 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똑 같은 태풍을 일본도 맞았거든요. 일본 오끼나와 지역과 큐슈지역에 동일한 태풍 매미가 들이 닥쳤는데 최대 풍속 74.1m였습니다. 우리보다 더 센 태풍을 맞았는데 일본은 사망자가 단 1명 그것도 86세 된 할머니 한분 돌아가신 것 외에는 더 이상의 사망자도 실종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자연적 재해를 대비하는 우리의 태도에 부족함이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특히 마산 지역에서 노래방이 있는 그 상가에서 12명이 죽었습니다. TV를 통해서 각종 매체를 통해서 태풍이 온다는 것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을 거쳐 제주도를 거쳐 곧 그 지역에 들이 닥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태풍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다 그들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기는 오겠지만 지금은 아닐 것이다. 임하긴 임하겠지만 나에게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갑작스런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실수가 우리의 삶에 있지는 않은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 위한 것입니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한다면 겨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우리 육체의 죽음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우리 주님의 재림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미치는 겨울이 재림이라면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미치는 겨울은 그 개인의 육체의 죽음일 것입니다. 가을 다음에는 틀림없이 겨울이 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틀림없이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 마지막에 대해서 준비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겨울은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계절의 겨울은 봄, 여름, 가을을 거쳐서 오지만 인생의 겨울은 태풍 매미처럼 언제들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봄을 사는 사람, 여름을 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의 계절에는 우리모두 항상 가을에 사는 것입니다. 가을은 짧습니다. 언제 가을이 끝날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이 언제입니까? 모릅니다. 그렇지만 틀림없는 것은 반드시 오신 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오실 것이고 그것이 언제일지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이 그날이라 생각하고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어느 지역 사람이건 어느 시대 사람이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충청도 사람에게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청도 사람은 말씨도 느릿느릿하고 행동도 느릿느릿하니 죽을 때도 천천히 죽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니라고 죽음에 관한 표현은 어느 지방 보다도 빠르답니다. 표준말로는 ‘돌아가셨습니다’ 경상도 말로는 ‘운명하셨다아입니꺼’ 전라도는 ‘아 세상 버렸당깨’ 충청도는 ‘갔슈’ 노랫말에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런 말이 있는데 우리 모두도 언제가 반드시 떠나가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계절의 가을을 맞이 하여서 내 인생에 가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그 가을이라는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 비문에 이와 같이 적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순간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누가 모릅니까? 그러나 죽음이 온다는 것은 틀림없이 알고 있었지만 미처 그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마지막을 맞이한 자에 당황스러운 그런 독백이었습니다. 후손들이 그 말을 감명 깊게 듣고 비문에 새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지막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이 본문 속에서 인생의 겨울을 잘 준비한 사도 바울이란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그의 태도를 통해서 나의 인생의 경우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너의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기를.. 잘 아시는 대로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사랑이 듬뿍 담긴 그런 마음으로 쓴 개인적인 편지죠. 사도 바울이 로마에 두번 투옥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첫번째 투옥은 비교적 자유로운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행전 28장에 보면 비록 집에 갇혀 있었지만 그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로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만 2차 투옥 때는 바로 그 유명한 폭군 네로가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아주 심각한 핍박이 있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두번째는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제가 성지 순례 때 로마에 가보니 성바울 성당이 있는데 보통 성베드로 성당은 많이 가지만 성바울 성당은 별로 잘 안가거든요. 그런대 혹 로마를 들르게 되면 성바울 성당을 찾아가 보십시오. 전 성바울 성당에서 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바울 성당 옆에 사도 바울이 갇혀 있던 지하 감옥이 있습니다. 지하로 수십 계단 내려가야 하는 어둡고 침침한 지하 감옥에서 지날 때 이 노사도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미 그때 사도 바울의 나이가 칠십이 넘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이제 핍박이 점점 심해지니 주위에 사람들이 있을 수 없죠? 하나 둘 다 떠나 갔습니다. 주치의 격인 누가만 남아 있고 다 떠났습니다.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6절에 이같이 말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관제라는 것은 제사 지낼 때 가장 마지막 순서입니다. 이제 보통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낼 때 죽여서 각을 떠서 불 위에 펴 놓고 제일 마지막에 포도주를 넣습니다. 이것이 제사의 마지막 순서인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순교의 피로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절감할 때 사도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냥 수동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사도 바울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서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려는 노력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를 한번 보시죠. 손기정 선수,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장면 여러분 마지막 달리는 장면 보셨죠. 특별히 손기정 선수가 뛰는 장면은 참 감격스럽습니다. 긴 시간 두 시간을 넘게 달려 왔습니다. 완전히 지치고 녹초가 되었겠죠. 그런데도 결승점이 눈앞에 보이자 어떻습니까? 마지막 힘을 다해 더 열심히 뜁니다. 바로 그 같은 모습을 사도 바울의 최후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눈 앞에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있는 힘을 다해 달려 가는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가을에 결코 방심하거나 게을러서는 안되겠다 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마가를 데려 오라’ 이렇게 말하는 장면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잘 아시는대로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제1차 전도 여행 때 바나바와 바울 마가 이렇게 같이 떠났죠? 그런대 참 선교 여행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대 마가는 부자집 아들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그 마가거든요.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었습니다. 그 옛날에 120명이 모여서 예배드릴 공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부자이겠습니까? 부자집 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전도 여행이 너무나 힘들자 ‘삼촌 내가 너무 힘들어 도저히 못가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마 바울이 굉장히 속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2차 전도 여행 때에 교회에 와서 선교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격려를 듣고 다시 선교 여행을 떠나려 할 때 마가가 나도 조금만 참을걸 그랬다면 이렇게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큰 영광을 받을 터인데 참 내가 너무 잘못했다 생각하고 ‘삼촌 이번에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내가 잘할게요.’ 바나바가 마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젊은 사람이 실수 할 때도 있지. 한번 용서해주고 한번 더 기회를 주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대 안된다. 그래서 둘이 갈라져 따로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마가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아마 사도 바울에 대해 굉장히 서운한 마음이 있었겠죠. 그 후 마가는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따라 다니며 통역을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의 행적에 관해 잘 들었다가 그것을 정리해 마가복음을 쓴 성경의 저자가 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 하고도 나중에 화해했겠죠? 그러나 죽음을 앞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마가를 보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내가 그때 좀 심했던거 같다. 용서하라. 이렇게 풀고 완전하게 화해하고 적어도 사도 바울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마가가 갖지 않도록 그러고 떠나고 싶었습니다. 인생의 가을을 사시는 여러분 제일 먼저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시급히 화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다투고 왜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원한을 품고 삼니까?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TV 연속극에도 보니까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나오지는 않지만 부부가 불화하여 이혼하였습니다. 그런대 한쪽이 암에 걸려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두 사람이 화해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재혼합니다. 불신자라 할지라도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면 싸우지 않죠? 싸울 틈이 어디있습니까? 이번 여름에 가족 수련회를 가졌죠? 그때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만약 당신에게 3일간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면 가족에게 어떤 편지를 쓰겠는가? 배우자에게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그런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 내용이 한결같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내가 당신을 더 사랑했어야 하는데 더 잘해 주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용서하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몇분 앞에 나와 발표를 하는데 눈물을 줄줄 흘리며 편지를 읽습니다. 실제로 3일 후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하고 그렇게 읽는데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혹 지금도 화해하지 못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빨리 화해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분을 품고 잠자리에 들게 되면 명백하게 나의 실수도 되는 것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리고 시급히 화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없이 원한도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사랑이 충만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가슴에 원한과 복수의 칼을 품고 어떻게 주님 앞에 서겠습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오늘밤이 저 사람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유리병 같은 존재입니다. 이제 모든 원한을 풀어 버리고 시급하게 화해함으로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외투를 가져와라 겉옷을 가져와라 그렇게 부탁을 합니다. 그 당시에 사도 바울은 주로 도보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요즘처럼 차를 타고 다니면 짐이 좀 있더라도 다 트렁크 뒤에 실으면 되지만 도보로 이제 전도 여행을 하면 짐이 많으면 참 힘이 듭니다. 겨울에는 외투가 필요하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면 외투가 짐이 되죠. 그래서 이 가보의 집에 외투를 맡겼던 모양입니다. 이제 추운 겨울이 되니 그 외투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올 때 그 가보의 집에 맡겨둔 겉옷을 가져오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어떤 사람은 아니 금방 죽을 사람이 외투가 무슨 필요가 있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 추우니 입어야죠. 어떤 사람은 예수님 곧 재림하시니 그냥 대충대충 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살아야죠. 우리는 언제 우리의 마지막이 올지 모르나 그 마지막 때까지는 건강하게 성실하게 인생을 살고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연세가 많으신데 운동을 아주 열심히 하시니 아니 목사님 금방 천당 가실텐데 열심히 운동해서 무엇합니까? 그러니 목사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아니 죽을 때 죽더라도 그 때 까지는 건강해야지 사도 바울은 순교 당하기 전에 감기에 걸려 죽기 싫었습니다. 외투 없어 감옥에서 감기에 걸려 그냥 병들어 죽길 원치 않았습니다. 목 베임 당하여 순교 했습니다만 그럴 것을 내다 보았습니다만 그때 까지는 건강하게 지내서 편지를 통해 기도를 통해 교회를 돕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일의 질도 중요하지만 일의 양도 중요합니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유익하고 교회에 더 유익하죠. 바울 자신만 생각하면 빨리 주님께 가서 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니라 바울은 그렇게 고백합니다. 교회에 더 유익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대로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가을이 금방 끝날텐데 대충대충 가을을 보내려고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운동도 해야 하고 저축도 해야 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서 완주해야 합니다. 끝이라고 여기에서 속도를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이제부터는 더 열심히 뛰어가야 합니다. 어느 때 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또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 말합니다.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꼭 필요했습니다. 이제 완주 지점이 다가오면 지치죠? 지칠 때면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대 영적인 경주에서 우리가 무엇을 통해 새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와의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의 교제 없이는 기독교인이 힘을 얻을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이 가죽 종이에 쓴 책은 구약 성경일 것이다 그렇게 성경 학자들이 모두 공통적인 의견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다시 성경을 통해서 믿음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 자신이 버림될까 두렵다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7절 말씀에 ‘믿음을 지켰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나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주님을 위해 일했는데 막상 주님 앞에 서니 나는 너를 모른다 하면 큰일이죠. 그러므로 노년이 될수록 성경 말씀을 더욱 읽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권면합니다. 30대는 하루에 석장, 40대는 넉장, 50대는 다섯장, 60대는 하루에 10장씩 읽어야 합니다. 이제 신문 보고 소설 볼 시간 다 제치고 성경 보는 일에 전념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 성경을 읽는 것으로 믿음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지체입니다. 지체끼리 서로서로 교제함으로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교제 없이는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끔 중국을 통하여 북한 소식을 듣는데 북한 성도들끼리 함께 모여 예배 드리다가 숙청 당했다 그런 소식 들으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함께 모여도 특별히 예배 드릴 수 없을 텐데 그냥 혼자 예수 믿으면 되지 꼭 그렇게 같이 모여서 예배 드리다가 숙청 당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함께 모여도 찬송 부를 수 없습니다.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입 모양으로만 찬송을 부릅니다. 큰 소리로 설교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따로 목사님이 계신 것도 아니고 왜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려서 큰 어려움을 겪느냐? 비록 함께 찬송 할 수 없고 설교자가 없더라도 성도끼리 함께 하는 성도의 교제가 없이는 도저히 신앙생활 할 수 없기에 숙청 당할 위험을 감수하고도 함께 모였던 것입니다. 혼자 설교 테이프만 듣다가 TV 있으니까, 극동 방송 있으니까 교회 안 나와도 신앙 생활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날씨 좋으니 놀러 가고 그냥 방송으로 예배 드리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으로는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건강한 신앙 생활을 원한다면 말씀과 함께 성도의 교제에 힘써야 합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이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간혹 가다가 참 조심스러워요. 교회 오다가 교통 사고가 나더라도요 교회 오다가 교통 사고가 나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런데 주일날 스키 타러 가다가 놀러 가다가 교통사고 나면 참 부끄럽죠? 우리의 마지막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아름다워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영적인 유산을 나누어 주길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 하지 않았습니다. 육적인 자녀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믿음의 아들 딸이 있습니까? 아마 육적인 자녀는 있겠죠? 그러나 그 육적인 자녀가 영적인 자녀가 됩니까? 만약 육적인 자녀는 남기고 재산은 남겼지만 집은 남겼지만 영적인 자녀를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많은 재산 육적인 자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얼마나 전도 하셨습니까? 한평생 예수 믿어서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내가 전도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주님 앞에 어떻게 부끄럽게 서겠습니까? 이번 88회 총회에서 통계 보고가 있었는데 교회는 작년 동안 2%성장했습니다. 교회는 2%성장했는데 교인 수는 0.03%늘어났습니다. 줄지 않으니 그나마 감사합니다만 그러나 교회는 생물학적 성장이 있거든요 새로 예수 믿는 사람이 안 생겨도 예수 믿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그들이 유아세례 받고 입교하게 되면 교회가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만 예수 믿게 잘 가리켰다면 적어도 0.03% 보다는 낳겠죠?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식도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다는 결과의 통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가을을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마지막을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라인홀니브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시여, 제게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가 내가 십년만 젊었더라면 그런 고칠 수 없는거에요. 그런 말씀 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가을 짧지만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직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일하여서 아름답게 우리의 인생을 마감해야겠습니다.

새빨갛게 단풍이 든 산속에서 노 신사와 어린 손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너 단풍이 왜 그렇게 빨간지 아니?’ 하고 묻자 ‘잘 모르겠는데요’ 신사가 다시 말합니다. ‘마지막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마감하려는 자연의 뜻이란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노을처럼 말이야’ 우리의 마지막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아름다운 빨간 단풍처럼, 빨간 저 노을처럼 아름답게 우리의 인생을 마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하기 위해서는 준비하셔야 합니다. 화해할 것 시급하게 화해 하십시오. 준비할 것 준비하시고 열심히 일하십시다. 우리 앞에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속도를 늦추지 마시고 속도를 더욱 더 내어 열심히 천국의 상급을 향하여 달음박질 하십시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서는 날 ‘잘 하였다, 충성 된 종아’ 칭찬과 영광 받으시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