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 (경향교회)

고전 헬라어에서 ''매력''이라는 말은 가장 고상한 말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원래 이 말은 형태, 즉 생김새의 아름다움에 언급되었습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나 어떤 아름다운 사물에 적용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갔던 여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치고 ''예수의 매력''에 이끌림을 당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에게 있었던 매력은 실로 그 어떤 경우에도 그 광채를 상실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에게 있었던 매력은 전인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참 하나님이 되시고, 참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다는 이 사실에 있습니다.

Ⅰ. 중보자의 어원적 용례들

디모데전서 2장 5절 중에 ''중보자''(仲保者)란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8장 6절, 9장 15절, 12장 24절에도 계속해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중보자''란 말 ''메시테스''는 ''중간의''(middle), ''가운데''의 뜻을 가진 ''메소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의 고전적 용법이나 사례는 헬라와 로마의 경우들에서 기인되었습니다.

1. 그것은 중재자, 조정자를 의미하였습니다.
예컨대 헬라의 아테네는 10지파에서 각각 선출된 4인으로 구성된 40인회(the Forty)라고 불리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이 40인회는 60세가 된 아테네의 시민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 선택이 되면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40인회는 아테네 시민사회에서 어떤 분쟁사건이 생기면 저들 가운데서 중재자나 조정자를 세워 불화된 사이를 화해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로마의 경우 중재인(arbitrator)이라 불리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사건이 순전히 법률문제이거나 그와 동등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두 당사자 사이에 끼어 들어 중재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단체였습니다.

2. 그것은 보증인이나 후원자를 의미하였습니다.
법정에서 부채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출두를 보증하는 사람이나, 은행에서 돈을 대부할 때 세우는 보증인을 ''메시테스''라고 하였습니다.

3. 양국 간에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경우, 쌍방 간의 우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가운데서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을 ''메시테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경우 ''메시테스''는 양쪽 모두의 만족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어원적 용례를 가진 ''메시테스'', 곧 중보자를 성령은 예수에게 적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Ⅱ. 예수는 우리의 중보자(메시테스)였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에 대하여 메시테스가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사역의 중보자가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중보자인가?

1. 유일의 중보자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첫째로, 예수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요 또한 완전하신 사람이라고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는 또한 유일하신 중보자라는 사실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중보자라는 사실입니다. 중보자라고 하는 말을 예수 외에는 전혀 적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구약에는 ''중보자''란 말이 없습니다. 예수만이 유일무이의 중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예수만이 유일의 구원자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만이 유일한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헐어버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시키기 위하여 중보자가 되셨습니다(엡 2:16).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그가(요 1:1) 사람으로 성육하였습니다(요 1:14).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가 되셨습니다. 오직 한분뿐이신 중보자가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2. 더 좋은 중보자, 새 언약의 중보자였습니다.

히브리서 8장 6절에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의 중보''라고 하였습니다. ''더 좋은''이라고 하는 형용사적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다 구약(율법)보다 신약(복음)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에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도 아론과 그 뒤를 잇는 대제사장들의 불완전한 옛 언약의 그림자적 중보사역에 비하여, 예수는 완전하고 영원한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한 말씀입니다(히 8:8-12).

히브리서 12장 24절에도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새 언약의 중보자''란 말도 옛 언약인 율법에 의하여 드려진 불완전한 동물의 피제사가 아닌, 단번 속죄사역을 통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피제사의 우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20절 중에는 천사들의 수종 가운데서 율법이 중보의 손을 통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중보의 역할을 했던 모세는,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일시적 중보의 역할을 한 그림자적 사역자입니다. 참 실체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와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더 좋은 중보자,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하는 말씀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진 불완전하고, 형식적이고, 모형적인 구약의 제사장이나 여러 제사들보다 완전하고 영원한 실체의 중보자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완전하고 영원한 중보자였습니다.

① 그것은 그의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사역의 성취입니다(요 19:30).
범죄이전의 에덴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죄상태의 아담은 하나님과 완전히 교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보자의 필연성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데서 기인되었습니다(창 2:16-17, 3:1-21). 그 결과 하나님의 공의는 범죄한 인간을 심판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사망의 값을 받게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 편에서 인간의 죄 값을 치루는(대속) 구속의 법을 세우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를 통한 화해의 길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중보의 필연성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는 양자를 모두 만족시킬 유력한 자이어야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죄가 없어야만 했습니다. 무죄자라야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받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가진 자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이 인간에게 사죄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자격에 해당되는 완전한 중보자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그의 중보사역의 성취를 선언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롬 5:1). 이것은 실로 완전하고 영원한 중보자의 속죄제사였습니다(히 7:27, 9:12, 10:12).

②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한 그의 대제사장적 기도입니다.
그는 영원히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의 속죄효과가 영원합니다(히 7:24). 그리고 그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히 7:25). 그는 죽으실 뿐 아니라 살아나신 자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자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있는 자입니다(롬 8:34). 그래서 그에게 나아가는 자마다 온전히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히 7:25).
말하자면 그는 중보자로서 완전하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이시요, 죄 없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중보자로서 드린 속죄제사는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그는 중보자로서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사이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 간에 중보기도집회, 중보기도 훈련 등의 말이나 글을 듣고 보게 됩니다. "목사님, 나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해주십시오." 하는 소리를 자주 듣고, 심지어 중보기도 책자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라고 하는 말은 결코 우리 인간의 기도생활에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중보자''란 말은 예수님 자신에게만 적용된 전용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대속)사역을 두고 쓴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중세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이 영혼을 유린할 때 잘못 사용된 일들입니다. 타락한 중세의 사제들은 자신들이 예수님 자리를 대신하고 예수님의 이름과 권위와 권세를 대신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예수만이 유일의 중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만이 더 좋은 중보자,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입니다.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에게 이끌리는 매력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잇는 연결고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신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관계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의 위대한 상징이 십자가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죄인)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 속죄의 십자가는 유일무이한 중보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중보의 표식이 된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대표하는 유일무이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래서 이레네우스(Irenaeus)는 예수의 매력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사람을 하나님에게 나타내 보이셨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말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위대한 신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하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예수 자신의 매력입니다. 화목의 매력입니다. 구원의 매력입니다. 생명의 매력입니다. 사람을 이끄는 매력입니다. 그 예수의 중보적 십자가로 말미암아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 14:6). 이것은 영(靈)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살리는 영의 일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중보자로서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었다는 이 사실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육은 영의 일에 암매(暗昧)하고 무익합니다(요 6:63). 이 세상을 살아갔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중보사역 때문에 새롭고 산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의 중보사역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생명의 환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롬 8:14∼16)!
유일의 중보자 예수!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예수!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완전하고 영원한 중보자 예수! 이것은 예수 자신만이 지닌 생명의 매력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