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규현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광주중앙교회)

할렐루야! 지난 한 주간동안 여러분 평안하셨습니까? 저도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무사히 미주총회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옆 사람과 잠깐 인사하십시다. “조금만 일찍 옵시다.” 서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배 시작 한 지 14분이데, 아직까지 계속 들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조금만 일찍 오면 됩니다. 10시 50분까지는 들어와서 함께 찬양도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됩니다. 다음주부터는 더 일찍 오는 성도님들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함께 교회로 모여서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다시 한번 하나님이 누구신지, 내가 누군지, 내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이러한 모든 면에서 새롭게 깨닫기를 원하고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부족한 종을 세우셨사온즉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인도하사 이러한 주의 말씀이 증거될 수 있도록 역사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의 삶 속에 여러 가지 책들이 있습니다. 유익한 책들이 많이 있는데, 다양하게 여러 가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흥미 있는 책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보면 그레고리 스톡(Gregory Stock)의 질문의 책(Book of Questions)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안에 보면 275가지의 여러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질문을 하나하나 듣게 되면 마치 감춰두었던 나 자신의 껍질을 벗는 듯한 기분을 갖게 하는데, 예를 몇 개 들어보면, “만일 당신이 오늘 저녁에 아무와도 이야기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죽게 될 때, 누구와 이야기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할 것입니까?” 갑자기 죽게 될 때, 내가 그분하고 이야기를 했어야만 하는데,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그분에게 해야 되는데, 또는 그분에게 꼭 용서를 구했어야만 하는 것인데, 그분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회복을 했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질문을 보면, “만일 당신에게 주술사가 준 인형이 있다고 합시다. 그 인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할 때, 당신은 누구를 해치기를 원합니까?” 누가 떠오릅니까? 또 다른 질문을 보면, “당신의 모든 것이 있는 당신의 집에 불이 났습니다. 당신의 가족들과, 심지어는 애완동물까지 다 구출한 뒤에, 아직도 한 번 더 들어가서 한 가지를 가지고 나올 시간이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나오겠습니까?” 저 같으면 컴퓨터를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밤늦게 주차를 시키는데 옆에 있던 BMW를 긁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고, 긁힌 자국도 그렇게 크진 않습니다. 보험처리도 다 될 것입니다. 거기에 당신이 했다는 메모를 남겨놓겠습니까?” 실지로 어떤 사람이 그런 경우를 당했는데, 그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적어서 와이퍼에 끼워 놓고 갔는데, 나중에 보니 “지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내 주소와 연락처를 적고 있는 것처럼 느끼겠지만,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습니다.” 이렇게 적어 놓고 갔습니다. “만약에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에이즈에 걸렸다면 그 친구를 만나겠습니까?” 이런 질문들이 275가지가 있어서 바로 내 자신의 삶의 뒤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이상하게도 그 질문들에는 거의 대부분이 “왜”라는 질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왜”라는 질문을 하면 너무나 직격탄을 터트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왜”라는 질문이 오히려 성경에는 대단히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왜 네가 화를 내느냐” 묻습니다. 모세는 또 “왜 저 떨기나무가 타지 않을까” 하고 질문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서 “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깁니까?” 욥은 하나님께 “왜 내가 날 때 죽게 하지 않았습니까?” “왜”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또한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께서 계속 모든 사람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 네가 근심하느냐?”, “너는 왜 네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보느냐”, “왜 너희는 나를 보고 주여 주여 하면서 나의 말을 청종치 않느냐?”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나마 사박다니에서 나마는 람마, “왜”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인생을 가면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왜”라고 한번 질문해 보십시오. 개인적인 인생에 관한 질문을 하기 전에, 저는 오늘부터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교회에 대해서 함께 여러분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왜 교회는 존재하는가?, 왜 우리 중앙교회는 금남로에 있던 예배당을 뒤로 하고 화정동으로 이사를 왔는가? 왜 교회는 땅도 사고 집도 사면서 계속 넓혀야만 하는가? 오늘 왜 여러분은 이 교회에 나왔습니까? 왜 설교를 들어야만 합니까? 왜 우리는 세계로 선교사를 보내야만 합니까? 이러한 “왜”라는 질문 속에 우리는 여러 가지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답이 어떠냐에 따라서 우리가 그 문제를 보고 있는 본질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봅시다. 어떤 사람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는 존재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예배와 성경공부를 위해서 교회는 존재한다고 하기도 하고, 지역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고 등대가 되기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또한 성도들을 훈련시켜서 내어 보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는데, 이런 각각의 모든 답들은 사실은 왜 교회가 존재하는가 하는 면에서 어느 일부분을 이야기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대답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면으로 여러분들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인식하고 있다면 어디선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회의 사명, 가장 궁극적인 교회의 사명을 한 가지로, 다시 한번 가장 바른 답으로 집약을 해보면,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데로 교회의 주된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말씀 한마디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은 무한정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 그것들을 다양하게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것들마다 다시 한번 질문해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 교회에서, 교회의 주된 목적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혼동이 있습니다. 어떤 때 보면 마치 교회는 성장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모이나,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나, 예배당은 몇 평인가, 몇 사람이 앉을 수 있는가, 여기에 주된 목표를 가지고 추구해 나갑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교회를 정할 때도 대개 그렇죠. 설교가 좋은가, 또 교회 음악은 얼마나 좋은가, 이런 것에 따라서 교회가 평가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것들도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라는 겁니다. 특히 교회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면을 더 생각해 보는 이유는, 많은 성도님들이 지금 변화를 기대하고 있고 저도 여러분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이야기하는 순간순간에 다시 한번 우리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여러분은 왜 변화를 원합니까? 교회 성장을 위해서요? 물론 그 면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진정 우리 중앙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변화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하고자 하는 일도 다시 한번 점검해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새롭게 하려는 것, 우리가 변화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이런 면에서 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변화를 위한 변화, 옳지 않습니다. 분명한 목표와 목적이 있는 변화,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 갈 방향이란 말입니다. 그럴 때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서로 여러 가지 다른 말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된다, 또 구역은 이렇게 해야 한다, 조직은 이렇게 해야 한다, 많은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모아지고 조화가 이루어지려면 다시 한번 질문해 봐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이를 위해서 과연 덕이 되는 변화인가? 언제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말씀하는데, ‘너희 가운데서’란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 중앙교회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셔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집합체로서의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만 되고, 여기 속한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높여지고 모든 초점이오직 하나님께만 비춰질 수 있도록, 오직 그분만이 크게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 앞에 제 자신이 담임목사지만, 성자가 되길 원치 않습니다. 저는 원래 성자가 아니니까요. 저는 있는 그대로 보여지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영광 받을 자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은 죄인으로서 그저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점에서 여러분과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저의 목사직의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각각의 위치와 자리에서, 장로면 장로의 위치에서, 집사면 집사 위치에서, 권사면 권사 위치에서, 찬양대면 찬양대의 위치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대표적인 예로 세례요한을 들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의 선지자로서는 아주 성공적인 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왔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디 있어야 하느냐, 첫째도 location, 둘째도 location, 셋째도 location 이야기합니다. 장소란 말입니다. 장소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저도 그것을 신학교에서 계속해서 가르쳐왔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영향력이 대단하고요. 그런데 세례요한을 성경에서 볼 때마다 주눅이 듭니다. 그는 어쩌면 그렇게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location을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설교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광야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를 듣기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의 사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언제까지요?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이고 심지어는 세례요한의 따르는 추종자들과 제자들까지도 예수님께 갔습니다. 점점 그 사역이 쇠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내 사역이 쇠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옳다면 그렇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다시 한번 바라보고, 내가 가고 있는 인생길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이러한 세례요한의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도 노력해야 되고, 개인도 노력해야만 합니다.

이제 다음주부터는 제가 취임식 때 한, 우리교회에서 있어야 할 다섯 가지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한 가지씩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며, 훈련과 교육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제며, 전도와 선교며, 봉사인가 하는 것을 매 주에 한 주제로 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그것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선 개인적으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어떠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면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의미는 단적으로 세례요한의 경우를 통해서 보았는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인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환경과 때는 여러 가지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중대한 의사결정을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예견치 않은 괴로움이 임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과연 이 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것을 찾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새롭게 직업을 선택하는 순간에, 이사를 해야 되는 순간에, 차를 한 대 사는 순간에, 내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그 때마다 나를 향하신 이 때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여러 가지 다른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집에서의 삶이 있고, 직장에서의 삶이 있고, 교회 안에서의 삶이 있고, 혼자 있을 때도 있고,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있고, 심지어는 실직했을 때, 명예와 부를 얻었을 때, 그것을 잃었을 때, 이럴 때마다 과연 나는 누구를 위해 사는 가?, 나를 향하신 이 때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이걸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되는 몇 가지 일을 함께 생각해 봅시다.

첫째, 여러분의 삶에 구석구석에 어디든지 하나님을 참여시키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행동할 때, 여러분이 대화할 때,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인식하고, 행동하고, 대화하란 말입니다. 제가 4월에 와서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설교를 하면서 매순간 내적인 대화를 할 때에, 죄인인 나와 대화하지 말고, 내 속에 계신 주님과 대화하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의 몸을 어떻게 다룹니까? 어제 저녁에 몇 시에 주무셨습니까? 밤늦게까지 딴 짓 하다가, 우리교회는 11시에 예배가 있느니, 늦잠 자고 늦게 헐레벌떡 오게 되면 그 인생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아닙니다. 몸에 무리가 되는 줄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고 계속 하다가 넘어지게 되는 경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에 어떤 것을 집어넣습니까? 독한 술을 집어넣지 않습니까? 담배로 여러분의 폐를 공해로 가득 차게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얼마만큼 중간 중간 쉬고 있습니까? 운동을 하고 있습니까? 열심히 일하고, 운동하고, 쉬고, 이런 모든 면들이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내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을 다시 한번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위한 여러 가지 일을 교회 안팎에서 하면서, 자칫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이걸 단호히 거부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영광을 받으려다가 시험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이 자리에 서지만, 목사에게 가장 달콤한 말은 ‘목사님, 오늘 설교가 기가 막혔습니다.’ 입니다. 듣고 싶습니다. 그게 제 자신에게 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설교를 준비하느냐, 내 자신을 들어내기 위해서 설교를 준비하느냐, 오늘 또 한번 멋진 설교를 하기 위해서 준비하느냐,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과연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의 심령 속에 얼마만큼 하나님이 느껴지고, 얼마만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할 것인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저만이 화성인이 아닙니다. 똑같은 지구사람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야기해요. 아무리 본을 보여도, 성도님들은 화성인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자기들과 같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의 본은 잘 안 따르고 성도들끼리 서로 본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분에게는 감동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저도 넘어지고 쓰러지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워주셔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리더로 세워주셔서,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제가 리더로서 제 책임이 막중합니다. 저로 넘어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영광 받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게 제 기도입니다. 그리고 감히 여러분께도 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장로님들, 장로님들이 영광 받으시면 안 됩니다. 안수집사님들, 여러분들이 영광 받아서는 안 됩니다. 권사님들, 모든 교회의 제직을 맡은 분들, 여러분이 영광 받아서는 안 됩니다. 제 교회도 아니고, 여러분의 교회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 주님의 교회라는 인식 속에, 과연 어떻게 하면 내 영광은 빠지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날 것인가, 이 면에 고민을 해야 합니다. 내가 과연 가정에서 일을 할 때, 직장에서 일을 할 때, 교회에서 일을 할 때, 내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닌가, 이 면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2주전 수요일 ‘묵은 땅을 갈라’는 설교를 하면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바꾸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는 한번도 바꾼 적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갑자기 바꾼다는 것은 정말 불안한데요.” 이런 말도 간간히 듣습니다. 물론 불안한 일입니다. 언제나 미래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상당히 불안한 일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는 스릴이 넘치는 일입니다. 제가 이번에 미주총회에 가서 옛날부터 아는 목사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보면 참 공통점이 있어요. 어떤 분은 지금 현재 목회에서 온갖 문제 때문에 열심히 그걸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분들도 있고, 어떤 분은 그런 문제들이 다 없어지고 지금은 평안하게 목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현재의 삶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편안하게 목회하는 분들에요. 공통적으로 그렇습니다. 그 분들이 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몸부림을 칩니다. 제 친한 친구 목사는 10년 전에 한 교회에 부임을 해서 10년 만에 그 교회가 3배로 성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목사님은 그 교회를 사임하려고 합니다. 왜 사임하려고 하느냐 하면 “여기서는 내가 더 할일이 없다, 할 만큼 했다, 충분히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렸습니다. 말린 이유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아, 우리교회 정말 행복하다 이렇게 느끼는 때가 사실은 대개의 경우 그렇지 않을 때보다 짧습니다. 모처럼 당신교회 성도들이 아 이제 정말 행복하다고 느낄 때 왜 또 뒤집으려고 하느냐, 제발 좀 가만히 있어라, 성도들도 행복한 신앙생활 좀 하게,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이, 평안하다는 것이 자기가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서 변화가 있고, 문제가 있고, 이걸 극복해 나가는 것이 오히려 인생을 더 스릴 있게, exciting하게 사는 길입니다. 묵은 땅은 어떻습니까? 평안합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더 이상 변하기 싫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솟아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도전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생명을 내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묵은땅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변화되어지고, 새로워지고, 그 변화의 방향도, 과연 이 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인가? 과연 생명이 넘치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길인가? 이걸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내 자신을 내려놓고, 세례요한처럼, 내가 하던 일도 내려놓는 그러한 과감한 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일을 안 해 보신 분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전통적인 교회와 다 똑같습니다. 소수의 사람만 일을 세 개, 네 개, 다섯 개 합니다. 매일 교회에서 봅니다. 대부분의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날만 인사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변화가 있다면, 주일날만 보던 성도들이 평일에도 나오게 됩니다. 일을 맡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존의 일하던 사람들이 자꾸 일하지 않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그분들을 훈련하고, 그분들에게 일을 맡겨주고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분들이 왜 세 개, 네 개 일할 수밖에 없는 줄 아십니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의 맛을 아는 것입니다.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그 맛을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바로 그 맛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일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서 함께 갑시다. 함께 가기 위해서 온 성도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씩 일도 맡고, 같은 방향으로 함께 움직일 때, 정말 우리 교회는 이 광주지역에, 전남지역에, 온 전국에 주님의 영광을 한껏 전하는 귀한 하나님의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삶 속에 이렇게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삶의 능력이 있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성경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더욱 주님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능력도 여러분에게 생기게 됩니다. 이 능력은 여러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에게서부터 능력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의 교제가 그만큼 필요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매일 매일의 경건생활 - 새벽예배, 성경읽기, QT, 모든 이 경건생활이 보다 더 여러분의 삶에 더해져서 드디어 하나님의 일이 여러분에게 주어질 때, 능히 아멘하고 그 일에 함께 동참할 수 있는 능력, 여러분에게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동참합시다. 함께 갑시다. 너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게 해야 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감사합니다.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을 예배하며, 주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이제 중앙교회를 통하여서 하나님, 더 큰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각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능히 들어나게 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힘을 합하여서 주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갈 때에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만이 들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기준으로 하여서 우리의 모든 삶의 행동 하나하나, 우리의 길의 방향 하나하나 정하게 하시고 내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살 때에 머리 숙인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삶 속에 세례 요한의 삶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례요한의 고백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