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초청  요한계시록 22:17


박순오목사 (대구서현교회)

<서론>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다. 돌이켜 보면 금년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기쁘고 흥분되는 일들도 있었지만 아깝고 안타까운 사건도 적지 않았다.
--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고 있고, 사회 질서의 혼란과 경제의 침체 속에 젊은이들의 의욕과 비전을 앗아가는 사회 분위기가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 한국 교회도 금년 한해는 그렇게 밝은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 같다. 각 교단 총회에서 노정된 여러 안건들과 처리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 7,80년대의 한국 교회의 역동적인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각 사역팀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힘껏 노력해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예배분야, 전도와 선교분야, 사회봉사분야, 양육분야, 그리고 친교분야 등 교회의 기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는 나름대로 힘차게 달려 왔다.

-- 특히 242구역들이 지치지 않고 매주 정해진 날에 모여 사랑을 나누며 아름다운 공동체로서 예배 전도 봉사 양육 친교의 사역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됨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를 위해 수고하신 하나님 나라 청지기 여러분들께 여호와 샬롬!!

-- 한해에도 마지막 주일이 있고 인생에도 마지막 날이 있듯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도 마지막 책, 마지막 장이 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전 성경의 마지막 초청의 말씀이다. 일년 일독을 목표로 달려오신 분은 요즈음 본문에 가깝게 접근했을 것이다.

-- 성경에는 주님께로 오라고 부르는 초청의 말씀이 거의 2000번 반복되고 있다.
창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오늘 본문은 최후의 초청의 말씀이다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 성경 마지막에 이처럼 성령과 신부의 초청의 말씀이 기록된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본 절을 몇가지로 분해하여 생각해 보자.

A. 성령님의 초청, “오라!” -- 하나님의 가장 큰 짐

1. 본문을 함께 읽자.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시겠다고 하신 재림 선언에 대한 성령과 교회의 화답이다.
16절,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기록한 후, 이어서 성령과 교회가 이에 대해 어떻게 화답하고 있는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2. 성령님은 오늘도 죄인들을 구원에로 초청하신다.
-- 그는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그는 죄인이 부를 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신다.
-- 오신 성령님은 떠나지 않으시고 위로하시며 깨닫게 하시고 능력을 공급하신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3. 죄인들을 초청하시는 사역은 하나님께 있어서 가장 큰 짐이다.
-- 이것은 창조의 사역보다 더 크고, 피조물을 유지하시는 일보다 더욱 중한 짐이다.
-- 이것은 나라들을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대로 움직여 가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다.
-- 이것은 별들을 제 자리에 지켜내는 것보다 더욱 힘든 작업이다.

4. 죄인을 부르시는 것이 이처럼 큰 짐이 되는 것은 그가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큰 짐이 아닐 수 없다.

(특사령 거부한 죄인은?)
미국의 잭슨 대통령 시절 특이한 법률 논쟁이 벌어졌다. 한 죄수가 대통령 특사를 받았는데, 자기의 죄를 깊이 반성하는 뜻에서 특사를 거절하고 계속 복역하기를 자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변호사들 간에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다. 즉, "본인이 거절한 특사령이 특사령으로서의 권한이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결국 이 논쟁은 "본인이 수락을 해야만 특사령도 특사령의 권한이 있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이다. 십자가는 사랑의 특사령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은혜를, 그 십자가를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하는데 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 2:39-40)

-- 하나님은 지금도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생명에로 불러 내시고자 하신다.

B. 신부의 초청, “오라!” -- 주님의 교회의 가장 큰 과업

1. 여기 신부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말한다. 교회의 주된 사역은 초청하는 일이다.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성령께서는 부르시는 사역을 함에 있어 교회와 연합하신다. 마지막 시대, 마지막 초청의 사명은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교회에 주어졌다.

-- 신학자 Farrer는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성령과 신부는 한 목소리를 낸다. 즉 영이 촉구하는 것을 몸이 말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2. 이 초청 사역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이다.
-- 이것은 요한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 곧 성경의 최후의 은혜의 말씀이다. ‘오라, 오라, 오라,...’

-- 성령의 영감을 받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구령의 열정을 토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3. 그러나 오늘 교회는 다른 일들에 너무 바쁜 게 아닌가?
-- 종교적인 행사를 연출하는 것과 이것과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일이나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도 이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 교회의 여러 사역과 이를 위한 예산 집행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4.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 여기에는 직접적인 전도 뿐 아니라 예배와 봉사와 가르침 등의 모든 사역이 포함된다.

5.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 이 사역에는 새로이 회심한 새가족들도 뛰어들어야 한다. 처음 예수님을 알고,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초신자들도 복음 전파 사역에는 예외없이 동원되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 교회는 이 면에서 성경의 말씀을 더욱 순종해야 한다.

C.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 인류의 가장 큰 복

1.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육체적인 고통 중에 굶주림도 괴롭지만 갈증은 이보다 더 심한 고통을 준다.

-- 일제 시대에 징병을 당해 화물선에 짐짝처럼 실려 남양군도로 끌려갔던 우리 젊은이들의 비참한 이야기가 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서 일본 군인들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물 한방울 주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젊은이들이 “물! 물!”을 외치며 목을 빼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서야 일본 군인들은 쓰러진 사람들에게 물을 주었는데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꾀병을 부린다며 무자비하게 짓밟고 마구 때렸다고 한다. 당시 얼마나 그들이 갈증에 시달렸던지 차라리 바다에라도 뛰어들고픈 심정이었다고 한다. 육지에 닿자 모두 한 양동이의 물을 쉬지도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육신의 갈증은 이처럼 큰 고통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육신의 목마름보다도 더 극심한 목마름이 있다. 그것은 영적 목마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기갈 속에 처하여 삶의 가치와 보람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며 고통하고 있는 것이다.

2. 오늘 세상이 얼마나 영혼의 기갈로 몸서리 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사마리아 수가 성의 우물가 여인이 목말라 했듯이,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목마름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 세상이 주는 명예나 권세나 쾌락이 세상 사람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 세상의 첨단 과학이나 발달된 문명의 이기들이 현대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 세상 사람들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목말라 하고 있다.
-- 저들은 죄짐을 지고 세상살이에 지쳐 몸과 영혼을 편히 쉬게 해 주는 그 어떤 존재에 목말라 하고 있다.
-- 저들 가운데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마음이 공허한 자들, 대인관계에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자들, 육신과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이 많다.
-- 저들은 영원한 미래에 대해 막연하나마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갈급해 하고 있다.

-- 그러나, 주님께로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갈증을 해소받을 수 있다.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3. 주님께로 나아오는 자에게 요구되는 한가지 조건은 ‘목말라야 한다는 것’이다.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어떤 연령층도 , 어떤 인종이나 혈통도 개의치 않고 받아 주신다.
--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던지 모두 받아 주신다
--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형편이 어떻든지 관계치 않고 모두 받아 주신다.

-- 다만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죄로부터의 해방에 목마르고, 주님의 진리에 목마르고, 영원에 목마르고,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야 한다. 보다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에 목말라야 한다.

4. 여러분은 지금 목마른가? 그렇다면 주님께로 나오라!
-- 죄를 뉘우치고, 용서와 깨끗함을 갈망하는가?
-- 생명수를 맛보고, 그것을 더 마시기를 갈망하는가?
--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자로서, 그 사랑을 더욱 마시기를 갈망하는가?

--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로 나오라!

D.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 당신 일생 일대의 결단

1. 생명수의 값은 이미 지불되었다.
--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가 이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고,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요구사항을 모두 이루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몸으로 우리를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다. 그의 보혈은 전 인류의 죄값을 상쇄하고도 넉넉한 값비싼 희생이다.

2.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 이 생명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요, 목마른 영혼들에게는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 주님께서도 직접 생명수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회의 선포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에 의지하여 가감없이 전해야만 한다. 교회의 생명이 바로 여기에 있다.

-- ‘받으라’로 번역된 ‘라베토’는 ‘취하다’는 뜻의 ‘람바노’ 동사의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세상사람들을 향한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는 교회의 구령 열정을 나타낸다.

3. 와서 마시자! 그러면 만족하게 될 것이다.
--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파블로카잘스는 20세기 최고의 첼로 연주자이며, 작곡가요, 지휘자요, 피아노 연주자이다. 1966년, 그의 90회 생일이 되기 직전에 노만이라는 사람이 위대한 음악가의 노후의 생활을 관찰한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관절염과 호흡 곤란으로 카잘스의 손은 부어 있었고, 손가락들은 서로 엉켜 있는 듯했다. 저런 손으로 어떻게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카잘스는 고통스러운 발걸음으로 간신히 피아노까지 걸어갔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노만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 손가락들이 마치 태양 빛에 펴지는 꽃봉오리처럼 펴지더니 건반을 만지는 것이 아닌가? 꾸부정했던 그의 허리도 반듯하게 펴졌다. 확실히 숨쉬는 것도 편해 보였다. 그는 바하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섬세하고 예민했다. 그는 이어서 브람스의 곡을 연주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카잘스는 생기와 영감과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주를 다 마친 그가 일어나 걸을 때 그의 몸은 곧바르게 되었고, 키도 더 커진 듯했다. 간신히 침대에서 나와 고통스럽게 옷을 입던 노인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음악인은 음악 안에서 새로워졌다.

우리 크리스천은 어떻게 새로워질까?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
샘을 웅덩이와, 그것도 터진 웅덩이와 바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거래이다. 샘은 시원하고 맑고 신선한 물이 땅에서 뿜어나오는 수원이다. 반면에 웅덩이는 물을 저장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저장소이다. 그 안에 담긴 물은 부패하고 오염될 수 있다.
주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백성은 그분 안에서 지속적인 만족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은 웅덩이, 그것도 터진 웅덩이 이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녀는 부모의 생활 방식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집을 나갔다. 기독교적인 배경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녀는 춤추는 일에 도취되었다. 어느 날 밤 춤을 추다가 갑자기 그녀는 어릴 적에 배운 성경 구절에 사로잡혔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그녀는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 그녀는 즉시 양해를 구하고 파티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공허함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았다.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
“주님, 저는 터진 웅덩이를 열심히 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작이었습니다. 주 예수님, 주님밖에는 아무도 저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는 사랑과 생명과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결론>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초청의 음성을 들어보라.
a. 이 초청의 음성은, 와서 생명수를 마셔야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지고 있다.

-- 이처럼 풍성하고 크며 성대한 초대에 누가 당장에 나오지 않으려 하는가?

b. 또한 이 음성은 초청하는 일에 함께 참여해야 할 사람들을 부르는 성령의 음성이다.
-- 우리에게 남은 이 초청의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주님은 “내가 속히 오리라”고 거듭 말씀하신다. 일단 주님이 오시면 더 이상 복음을 전하고 영접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 (고후 6:2).

-- 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막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c. 금년을 마무리 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이 부르심이 용솟음치는 에너지가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