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목사 (기쁜소식교회) 2003.05.22 조회 : 164  

몇 년 전에 개봉되어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촉망을 받던 장군이 정치적인 모함의 희생자가 되어서 노예신세로 전락했다가 검투사가 되어서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콜로세움에 수많은 관중이 모여서 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모습을 보려고 할 때, 경기장으로 나가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동료 검투사들에게 주인공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 바깥에서 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나가서 뭉치면 생존할 가능성이 많아진다."고 말했습니다. 주인공이 "우리가 나가서 뭉치면 승리할 가능성이 많다."라고 말하지 않고 "생존할 가능성이 많다."라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검투사들에게 지금 이기느냐 지느냐 보다 더 급한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살아야 승리를 말할 수도 있고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일이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싸우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시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어떤 유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넘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를 말하기 이전에 영적으로 살아남는 법부터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흔한 성씨를 무작위로 호명한다고 합시다. 김씨, 이씨, 박씨와 같은 성씨를 무작위로 호명을 한다면 회중석에 앉아 계신 분들 중에는 이 성씨에 해당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만일 제가 세상에 흔한 질병들, 예를 들면 신경통이나 고혈압이라든가 콜레스테롤 같은 질환을 무작위로 호명한다면 회중석에 앉아 계신 분들 중에도 이 질환을 갖고 계신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예언의 은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데 만약에 제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도덕적인 증상들을 무작위로 호명을 한다고 하면, 예컨대 알콜중독이나 도박 중독이라든가, 인터넷 포르노 중독이라던가 이런 문제들을 무작위로 호명한다면 회중석에 앉아 계신 분들 중에 여기에 해당된 분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수준을 너무 높게 잡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상한 것, 교양 있는 것,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드는 것들을 말하려고 하는데 정작 우리의 현실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마치 아이의 옷을 사 입히는 부모가 아이 옷의 치수를 모르면 아무리 좋은 옷을 사도 입을 수가 없는 것처럼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우리가 현실적으로 파악을 해야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씀을 전달할 수도 있고 그들의 신앙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검투사들의 당장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 생존하느냐의 문제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당장 시급한 문제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믿음대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승리를 말할 수도 있고 주님을 섬기는 것을 말할 수도 있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을 잘 믿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와 계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한 의도만 가지고 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이기려는 의도가 있다고해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훈련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고, 시험을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것은 배워야 하는 것이고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넘어진 다음에 일어나는 법을 모릅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넘어지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의 일입니다. 넘어질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번 넘어졌을 때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많은 그리스도인은 한 번 넘어지고 나면 마귀가 그를 정죄하고 참소합니다. 그런데 마귀의 정죄를 하나님이 나무라시는 것과 혼동을 해서 넘어졌기 때문에 더 주님을 필요로 하고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될텐데 그 마음에 정죄감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넘어진 다음에 일어서는 훈련이 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요, 마귀의 정죄를 이기는 훈련이 되있지 못함이요, 믿음으로 이러한 시험을 물리치는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요,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다루는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하나님께 고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알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죄를 당신에게 알리기 이전에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미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면 뭣하러 우리가 하나님께 고합니까? 하나님께 우리 죄를 고한다는 말은 우리가 죄의 문제에 대해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죄가 우리를 지배했지만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죄를 다스리는 상황으로 변하게 됩니다. 창세기 4장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죄를 다스리는 법만 알 수 있다면 결코 죄가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이 벽에 부딪혀서 고민하고 있을 때 마귀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지은 죄를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네가 이렇게 나쁜 사람인데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척 하면서 이 일을 할 것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 마틴 루터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리라."하면서 잉크병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틴 루터가 집필하던 집에 가 보면 그 벽에 잉크병이 깨어진 자국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부분에 있어서는 특별한 장사가 없습니다. 루터든, 누구든 간에 믿음의 훈련을 통해서 이러한 마귀의 시험을 극복하고 돌이켜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매일 빠짐없이 하는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도요, 또 하나는 조깅입니다. 운동하는 것인데 걷는 것보다는 빠르고 달리기보다는 느리게 합니다. 기도는 새벽에 하고 조깅은 저녁에 퇴근한 다음에 합니다. 하나는 제 영혼의 건강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제 몸의 건강을 위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기도와 조깅은 제 삶에 있어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부분이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지금도 저녁에 날씨가 춥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 때는 그냥 집에 앉아서 TV를 보고 싶지 나가서 운동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면 몸의 건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에 나가서 뛰기 시작합니다. 한 중간부터는 ‘아, 잘했다.’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하고 몸에서 엔돌핀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유쾌해지기 시작합니다. 몸과 마음이 아주 맑아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훈련이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십 수년동안 해 온 것입니다. 십 수년을 하니까 이제 이 운동이 저의 삶에 있어서 뗄레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부분이 된 것처럼 신앙의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것, 말씀을 올바로 다루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성령의 도움을 의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 몸에 배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까지는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선한 의도만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처음 믿은 많은 사람들이 ‘나 이제 예수 잘 믿겠으니까 두고 보십시오.’ 그 선한 의도는 참 좋지만 그러나 교회 문턱을 나가자마자 시험에 부딪혔을 때 훈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목사도 교인들에게 너무 세상얘기하고 정의와 세계선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총을 쏘는 사람이 아무리 사격술이 좋아도 가늠쇠가 잘못되어 있으면 과녁을 명중시킬 수 없습니다. 군대에서 M1 소총을 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M1 소총에는 가늠쇠를 조종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가늠쇠가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잘 쏴도 과녁을 못 맞춥니다. 마찬가지로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신앙적인 기대를 재조정해서 가장 기본적인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사함의 확신이 있느냐, 당신 매일 기도생활 하느냐, 말씀을 공부하느냐, 매일매일 당신이 직장에서, 학교에서 당하는 시험이 무엇이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하느냐? 함께 기도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영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리고 나서 선교도 하고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설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듣는 구호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정말 이상적인 교회였습니까? 성경이 기록하는 초대교회에 대한 기록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람이 있었고,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이 서로 다투었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초대교회인데 이 일곱 교회 중에 주님의 칭찬을 받은 교회는 한 두 개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다 책망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도 책망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보기도 하고, 교회사의 일곱 가지 단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한 가지 성경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의 교회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게 아닙니다. 믿지만 미지근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이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했습니다. 15절에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어느 시대가 특별히 예수 믿기가 힘든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시대가 예수 믿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시험과 유혹이 많다고 말합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직장생활 하면서 예수 믿기가 힘들다고 하고 여자는 여자대로 여자들 세상에서 믿음대로 살기가 힘들다고 말하는데 여러분, 지금까지 모든 시대를 살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를 뭐라고 불렀는지 아십니까? ‘말세’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를 말세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 천년 전에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베드로가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베드로가 보기에도 그 당시에는 말세였습니다. 갈 데까지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원망할 것이 아니고, 나의 외적인 상황을 원망할 것이 아니고, 내가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는 내 직장환경에 있는 것도 아니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결국은 내 마음 상태에 있습니다. 내 마음상태만 바로 되면 직장이 아무리 어려워도, 주부들의 모임에 아무리 경쟁이 많고 누가 더 화려하고 잘 사는 가를 따져도 내 마음만 바로 되어 있으면 얼마든지 믿음을 지킬 수 있고 믿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입고 직장에 가고 학교에 가고 친구들의 모임에 가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의지하여 회의에 참석하고 바이어들과의 모임이 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성령이 나를 지켜주시기를 구하면 내 자신이 강건하고 내 상황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이, 그런 준비와 기도 없이 상황 속에 들어가 버리면 그 상황이 우리를 변화시켜 버립니다. 직장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내 친구들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수 년 전, 제가 신학교를 가기 전에 어느 친구네 집 파티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초청을 받아서 가지만 가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모임에 가는데 하나님이 저와 함께 가 주셔서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파티에 참석을 했는데 그 파티에서 어느 은행에 다니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 청년이 저에게 "당신은 무엇을 합니까?"라고 물어보길래 "저는 법대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가기 위해서 준비중입니다."했더니 이 친구가 대뜸 말하기를 나를 한 번만 만나 달라고, 나도 예수님을 잘 믿고 싶으니까 나를 한 번만 만나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인연이 되어서 지금까지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준비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준비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도 녹아버립니다. 어떤 상황에도 주저앉아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뜨겁든지 차갑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갈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