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종목사 (과천교회)

오늘은 『처음 사랑을 회복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본문 말씀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 금융의 중심지이며 여신 디아나를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전도할 때 디아나를 섬기는 은장색들이 일어나서 크게 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에베소는 마술이 성행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전도할 때 수많은 마술쟁이들이 그들의 요술책을 불사르고 예수님을 믿게 된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 후에는 아볼로, 디모데, 브리스길라&아굴라 부부도 이곳에서 전도하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곳에서 목회활동을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는 성경훈련을 잘 받았고, 교리적으로 바르며 지식이 풍부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 중심의 좋은 교회가 크게 부흥을 하고 나니까 교회가 제도화되고 조직화되면서 처음사랑을 잊어가게 되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뜨겁게 봉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뜨겁게 전도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뜨겁게 찬송하던 것이 그쳐졌습니다. 그러니 예배가 형식이 되고 의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이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1절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에베소 교회의 사자’는 에베소 교회 자체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은 예배드리는 장소, 즉 예배당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모인 모임이 교회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았다’고 했습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사자는 천사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과 함께 계십니다. 가정을, 사업을, 생각을, 하는 일을 붙잡아 주십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일곱별을 붙잡고 그 중에 다니십니다. 섭리하십니다. 다스려주십니다. 직접 일하십니다. 직접 확인하십니다.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주님의 칭찬이 있습니다. 2절과 3절, 6절입니다.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를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3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6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본문에 에베소 교회의 일곱 가지 칭찬이 있습니다. 먼저 네 행위를 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를 아십니다. ①앉고 섬을 아십니다. ②우리의 언행심사를 아십니다. ③여러분들의 수고를 아십니다. ④여러분의 인내를 아십니다. ⑤악한 자를 용납지 아니함을 아십니다. ⑥거짓 사도를 분별한 일을 아십니다. ⑦참고 또 참는 것을 아십니다. ⑧부지런함을 아십니다. ⑨특히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함을 주님께서 먼저 알고 계셨다고 합니다.

‘니골라’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올바른 신앙에서 타락하여 법을 무시하며 도덕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는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①율법의 때는 지났으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 ②육신은 악이요, 영만이 선하므로 육신으로 무슨 일을 하던 관계가 없다. ③그리스도인은 은혜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행하던지 해 받음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 주장을 좇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으나 그 생활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지만 호색했습니다. 방탕했습니다. 타락했습니다.

죄악의 길을 걸었으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서 죄를 씻어주십니다. 거기에 우리는 깨끗함을 얻습니다.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생활이 거듭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방탕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니골라당의 교훈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한 것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이 니골라당의 잘못된 교훈과 그들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사실입니다. 6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는도다”
나는 누구입니까? 지금 말씀을 주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혹에 빠집니까? 나도 모르게 죄악에 빠집니까? 나도 모르게 탐욕에 빠집니까? 하나님께 멀어집니까? 교회와 멀어집니까? 예배와 멀어집니까? 기도가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전도가 하고싶지 않으십니까? 신앙의 고백과 생활이 멀어지십니까? 예수님은 ‘나도 이것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가 날마다 생활 중에 나타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실 것입니다.

셋째, 주님의 책망이 있습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처음 열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집사로 세움을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권사로 세움을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장로로 세움을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목사로 세움을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전도사로 세움을 받을 때의 그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감격을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는 찬송가의 구절과 같은 감격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격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처음 구역장이 될 때의 열심을, 처음 성가대원이 될 때의 그 열심을, 처음 교사가 될 때의 그 열심을 잊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봉사와 전도와 예배가 형식과 의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교회 선택은 교인이 합니다. 여러분은 과천교회를 선택할 때 무엇을 보고 선택하셨습니까?
①목사의 설교입니까? 심방입니까? 사랑입니까?
②장로님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 때문입니까?
③구역장님들의 권면 때문입니까?
④권사님들의 사랑 때문입니까?
⑤교회의 분위기 때문입니까?
⑥성가대의 찬양 때문입니까?
⑦교회학교의 가르침이 좋아서 입니까?
⑧교회의 시설이 좋아 보여서입니까?

그 선택은 몇 년 전의 일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다른 단체와 다른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한번 나왔다고 금시 그 생활이, 생각이, 사는 모습이 갑자기 깨끗하게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혜로서 날마다 한 가지씩 서서히 변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사람냄새가 납니다. 인간의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100% 흡족히 맞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왔다갔다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처음 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 좋았다면 그 좋은 것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잘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귀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처음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귀한 것 하나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직업을 자식이 그대로 물려받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뛰어난 직업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독일 사람도 같습니다. 독일에서 생산되는 칼이나 가위 가운데 ‘쌍둥이표’가 있는데 이 상품은 수대를 내려오는 가업이라고 합니다. 변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 합니다. 심지가 굳은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변함 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또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처음 결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으면, 내가 집사가 되면, 내가 장로가 되면, 내가 권사가 되면, 내가 구역장이 되면, 내가 목사가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먹은 자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심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자세로 봉사하고 어떤 자세로 헌신하고 어떤 자세로 사랑하겠노라고 했는데 물거품 같이 그 열심이 사라졌다는 꾸지람입니다.

직분을 가진 자의 교회 봉사는 감사의 열매입니다. 감격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못해서, 할 수 없어서, 남의 눈치 보여서,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정도라면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 처음 사랑을 버렸다면 그 가정에는 불화만 있을 것입니다. 남편은 돈 벌어다 주는 기계이고 아내는 자식 키우고 살림살이하는 의무에만 매여 살면 짜증뿐일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감격, 구속의 감격,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피흘림이 나를 위한 것이고, 채찍에 맞은 것이 나의 죄를 위한 것이라는 감격이 사라지면 주일날에나 겨우 나와서 건성으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헌금 내고는 돌아갑니다. 그리고 한 주간 예수님을 잊고 삽니다. 가정에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고 직장에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이 생활화되지 않아 불신자의 손가락을 받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바울 사도가 처음 갔을 때의 기록이 사도행전 19장에 나옵니다. 바울 사도가 갔을 때 너무 냉랭하고 차갑고 복음의 진리를 모르는 12명의 사람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바울이 물었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물세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3년간 목회하고 떠날 때 사랑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봉사와 희생이 있었던 교회입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첫 은혜입니다. 이 은혜와 은사를 잊어버렸다는 책망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움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아멘, 아멘으로 넘칠 것입니다.

넷째, 권면이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데는 세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①생각하라 ②회개하라 ③처음 행위를 가지라 입니다.
먼저 과거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절을 생각하고 그때와 지금과의 차이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현재의 형편과 나의 영적인 생활의 현주소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단이 있을 때 정확한 처방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회개하라’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사용한 회개라는 말의 뜻은 ‘마음을 고침’이 근본적인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회개를 늦추면 안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고쳐야 합니다. 미루면 안됩니다.

다음은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회개는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 잘못된 자리에 그냥 머무르면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행위의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말하기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즉 회개치 아니하면 예수님께서 네 촛대를 옮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한다는 엄숙한 경고입니다. 불행하게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회개치 아니했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했습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줍니다. 현재 에베소는 폐허가 되어 일부 철로가 통하고 있으나 몇 개의 움막만 있을 뿐 옛날의 교회는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습니다. 촛대를 옮긴 증거입니다. 회개는 은혜를 받는 증거입니다. 회개는 복을 받는 증거입니다. 회개는 회복의 은혜입니다.

다섯째, 회복하는데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먼저 낙원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몸이 강건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육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죽을 몸이 영생한 몸, 변화된 몸으로 변화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낙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다음 생명과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생명과는 보고 즐기기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먹으라고 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령한 말씀을 듣는 영의 귀가 열려 이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는 놀라운 복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