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인목사 (광성교회)

이 시간에 에스라서 7장 1절에서 10절의 말씀을 가지고 ''에스라라 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라는 말씀 그대로 제목을 ''에스라라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에 대해서 우리 성경에는 없는 얘기가 외경에는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라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이스라엘에는 포로 이후에 동네마다 회당이 세워졌습니다.
즉 성전은 예루살렘에 한 곳이 있었을 뿐이요, 동네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이면 동네 회당에 가서 안식을 지키곤 하였습니다. 이 동네마다 있는 회당을 전체로 총괄하는 ''대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스라라 하는 사람이 이 ''대회당''을 창설하고 대회당장이었다는 것이 전설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에스라는 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손입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됩니다. 그러고는 율법을 얼마나 많이 연구하고, 또 연구했는지 ''율법에 관해서는 완전한 학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따라갈 자가 없었던 학사였습니다. 바벨론 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 중에서 귀환할 때 모두 함께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돌아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세웠고, 2차로 돌아온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쌓았습니다. 에스라는 2차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하나 님의 율법을 잘 가르치고, 회개운동을 일으키고, 이방인과 혼인한 것을 다 정리하도록 합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가서 100살이 넘도록 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에스라라 하는 자''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한 사람인가를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해 보도 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믿음의 뿌리가 깊은 에스라(1-5).

뿌리가 깊은 나무는 옆으로도 퍼지고 위로도 크게 자랍니다. 뿌리가 얕은 나무는 이렇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절대로 쓰러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뿌리가 얕거나, 혹은 뿌리가 옆으로 뻗었다면 잘 넘어집니다. 우리 믿음 생활에도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믿고,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믿고, 할아버지가 믿고, 아버지가 믿고, 내가 믿고, 내 자식이 믿듯이 뿌리가 깊은 가정의 믿음은 특별히 뜨거움이나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많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뜨거움이나 성령체험을 하는 경우는 당대에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뿌리깊은 믿음은 있는 듯 없는 듯 미지근한 것이 단점입니다. 이러한 단점이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좀처럼 교회를 떠나지 않는 다는 장점, 즉 끈질김이 있습니다. 디모데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위장병이 들어 나 중에는 물밖에 마시지를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이때 바울 사도 가 디모데에게
"위장병에는 포도주가 좋다고 하니 포도주 한잔씩을 마셔 보라."
고 권면하는 것이 디모데 전서에서 나옵니다(딤전 5:23). 바울 사도가 한참 은혜를 받고 기도할 때에는 손수건만 가져다 놓아도 병들이 일어났는데 심복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의 병은 끝내 고쳐주지 못 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겁니다. 위장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디모데는 죽을 각오를 하고 바울 사도를 따라다녔습니다. 전도하는 일에는 최선의 동역자였습니다. 나중에는 에베소 교회의 담임도 잠시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없었으면 바울이 바울이 못 되었다.''할 정도로 정말 훌륭한 동 역자가 됩니다. 그것도 병들어 약한 중에도 말입니다. 진정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외할머니로 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하여 디모데에게 이어진 믿음입니다. 디모데의 믿음을 가리켜 바울은 ''거짓이 없는 네 믿음''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와 헤어져 있을 때에는 거짓 없는 네 믿음을 옆에 놓고 보고싶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대를 이은 뿌리깊은 디모데의 믿음은
"죽어. 죽어."
하는 병마도 꺾어버리거나 빼앗지 못합니다. 끈질기게 끝까지 주님의 일에 온갖 충성을 다 바칩니다. 이것이 바로 ''뿌리깊은 믿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스라가 바로 ''뿌리깊은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본문 1절에서 5절을 보면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저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손이요 아히둡의 육대손이요 아마랴의 칠대손이요 아사랴의 팔대손이요 므라욧의 구대 손이요 스라히야의 십대손이요 웃시 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 손이요 아비수아의 십삼 대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손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라고 하게 되면 모세와 견줄만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 모세는 정치적으로 지도자가 되었고, 종 교적으로는 아론이 지도자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의 십육대손이요, 사독이라고 하는 유명한 제사장의 오대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망할 때 이 제사장의 가족들 모두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이런 중에서 살아남은 에스라는 성전이 없어서 제사는 드릴 수 없지만 제사장의 직분은 그대로 가지고 내려옵니다. 율법을 열심히 연구해서 가르칩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에스라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율법의 완전한 학사였습니다. 이 런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법에 저촉되는 것을 모두 정리하자.''고 하여 이방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을 불러 가르치고, 설득하여 이방혼인을 전부 정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스라는 굉장한 개혁자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가 "개혁, 개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진정으로 ''신앙개혁'', ''종교개혁'', ''생활갱신''을 이룩하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뿌리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뿌리깊은 믿음이 역사 하는 힘이 많습니다.
렐프 존슨 번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뉴멕시코에서 태어났는데 아주 가난한 흑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투병 중에 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12살이었습니다. 1년도 채 못된 때에 아버지 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3살에 완전한 고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자식들의 13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의 이야기이기 까닭에 특별하게 와 닿지 않지만 우리 자식들의 이야기라 고 상상해 보면 가슴에 닿을 겁니다. 그래서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할머니에게 가서 얹혀 살게 됩니다. 그냥 얻어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밖에 나가 노동을 하고, 열심히 일을 해서 먹는 문제, 입는 문제를 해 결합니다. 그런데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모으고, 대학교 총장님을 찾아가서 자신이 고학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얘기하고, 입학과 동시에 일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합니다. 하버드 대학이라고 하게 되면 세계가 알아주는 대학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가 가정을 이룩하는데 아들이 소아마비가 되는 불행을 또 겪습니다. 지금까지도 불행하게 살아왔는데 아들까지도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을 딛고 일어나 ''UN''에 취직하여 UN 본부의 부사무총장까지 승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랍족속들과 유대족속들간의 팔레스타인 제1차 전쟁이 발발하는 때였습니다. 번치가 이 전쟁을 휴전시키는데 절대적인 공로를 세웁니다. 이것이 인정이 되어 ''노벨 평화상''까지 타게 됩니다. 이렇게되기까지 가난한 집 안에서 태어나 온갖 고생 다하고 자기 집안도 불행한 상황에 있는 이 사람 이 이런 세계적인 큰 업적을 남긴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가 12살 때 어머니가 죽으면서 불러놓고 얘기합니다.
"번치야. 나는 너에게 주고 갈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너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런 일, 저런 일 많은 어려운 일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다른 것은 모두 잊을 지라도 믿음만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번치는 아무리 괴로워도 믿음을 굳게 붙잡고, 철저하게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어머니에게서부터 오는 믿음이 그에게 심어졌고, 뿌리가 내리고 깊어졌습니다. 어떤 고난 중에서도 그는 믿음으로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남들이 괄시하는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인물 이 되었습니다. 뿌리깊은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혼자서 예수를 다 믿는 것 같아도, 고난이 있고, 환난이 있고, 풍파가 있을 때 뿌리깊은 믿음은 고난과 환난과 풍파를 모두 이겨내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승리하는 사람, 성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는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에스라(6-9).

하나님의 도우심은 받을 수록 좋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사람의 도움만을 받으면 이 도움은 며칠을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도움은 부분적이요,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체적이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고 하게되면 사람을 통해서 도와주실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직접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실 때 사람은 나를 도울 수 있으나 이 도움은 몇 푼의 가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괴롭습니다. 사람들은 도와주었다고 얼마나 유세를 부리는지 모릅니다. 차라리 그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복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는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당했을 때 요단 강 건너편까지 쫓겨갔습니다. 그 땅 이 바로 마하나임입니다. 이곳에 갔더니 소비, 마길, 바실래라는 큰 갑부 셋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다윗을 아무 조건 없이 돕지 않습니까? ''다윗이 나중에 압살롬의 난을 진정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어떤 대가를 줄 건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받지 않겠나?''하 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도와 준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도움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이 난을 일으켜서 예루살렘을 다 점령하고 요단강까지 점령했는데 요단강 건너편으로 쫓겨온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도 대체 얼마이었습니까? 다윗을 도와 주었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답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자기들 지역으로 쫓겨와서 죽게 된 사람들을 우리는 편히 있으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겠나?'' 라는 생각으로 세 사람이 힘을 합하여 열심히 도왔습니다.
결국은 다윗이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요, 도움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도움 까닭에 압살롬의 난을 진정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마하나임에서 몇 푼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의 도움일 뿐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시켜서 도와주어 도운 도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이 난을 평정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환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도우실 때만 가능했지 마하나임의 세 사람은 그런 일에는 전혀 도움이 못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도움이라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상대적인 도움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도움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하나님이 직접 도울 수 도 있고 사람을 통해 도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꼭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영광이요, 복되다 할진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에서 9절을 보면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 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 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아닥사스다 왕 칠 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 년 오월이라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까닭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면 알아서 다 충당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에스라가 구하는 것은 다 주더라.''는 뜻입니다. 왕의 도움 이전에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또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정월 초하루에 떠나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즉 4개월이 걸린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돌아오는 길은 넉 달이 걸리는 거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2000명에 가까운 큰 무리를 거느리고 오는 것입니다. 무장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오는 길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대적들의 괴롭힘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넉 달 동안의 긴 여행을 끝내고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별로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한국에서 장로의 직분을 가졌고, 수술하는 외과계통에서는 늘 제 일인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장기려 박사님이 계십니다. 장 박사님은 김일성의 맹장수술을 해 주고 6.25 사변이 나자 남쪽으로 넘어 온 사람입니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우고 복음병원 원장을 지낸 훌륭한 분입니다. 이 분은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할 때에도 기도하고 수술을 시작한 분입니다. 기도하고 수술하자는 데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한 번은 아주 위독한 환자가 수술을 받으러 왔습니다. ''성공할까? 실패할까?''하는 것은 반반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의 의료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문하생들이 둘러서서 견학을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수술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봐도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좀처럼 보 기 어려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을 땀을 흘려가며 수술하는데 여러 사람들은 지켜보고 배웁니다. 어렵다고 하던 수술이 깨끗이 끝나 고 성공해서 살아났습니다. 이때 문하생 중에서 지켜보았던 한 사람이
"박사님, 수술에 성공하고 이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기도 때문입니까? 박사님의 의술 때문입니까?"라고 물을 때
"기도를 통해 받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50%이고, 우리가 하는 노력이 50%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다. 그 사람의 병 나은 결과가 전적으로 기도에 있다면 의술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또 의술로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면 하나님은 무엇 하는 분입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수술도 기도한 후에 자신의 의술로 최선을 다했더니 죽어 가는 사람이 살아난 것입니다. 노력이 50%입니다. 자기 자신이 할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 100% 다 해달라고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다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일할 차례입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겨야 합니다. 아무 노력 없이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면 되지 않을 일도 되고 죽어 가는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는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철저히 개혁하는 에스라 (10-) 우리나라가 지금

"개혁 개혁"하면 서 야단인데 개혁을 해야만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이 듭니다. 이 나라 곳곳에 개혁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법부, 언론계, 정치계, 문화계, 종교계, 교육계, 경제계 모두 다 개혁을 해야 하는데 개혁을 잘못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납니다. 개혁을 하려면 법적으로 개혁하고 제도로 개혁하기 이전에 사람이 먼저 개혁, 갱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인천 ''호프집 사건'' 때문에 55명이 죽었습니다. 꽃다운 청춘들이 죽었습니다. 법이 없어서 죽었습니까? ''문을 닫아라''는 폐쇄 명령을 내렸는데도 관련 기관에 돈을 갖다 바침으로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법을 아무리 만들어 놓아도 운영하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그런 법과 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이 먼저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은 개혁의 모 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구약 성경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구약의 율법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주 익숙한 학사가 되고, 완전한 학사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관한 한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말입니다. 남을 뜯어고치겠다고 하기 전에 에스라는 자기 개혁을 먼저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자신을 먼저 개혁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철저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준수했다.''는 것입니다. 지키지 않는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에스라는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개혁자는 자신이 먼저 법을 지켜야 합니다. 세 번째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럴 때에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백성을 깨우치고 법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율법을 가르치고 나 자신이 지키면서 이방 혼인한 사람들을 전부 정리하고 사회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개혁을 하였습니다. 개혁이 그들을 살아남게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이 먼저 바뀌고 새로워지는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면 사회와 나라가 개혁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입니다. 포로 생활의 쓰라린 고난 도 뿌리깊은 신앙을 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무수한 역경 중에서도 믿음은 더욱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부분적이요,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체적이요,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가 승리합니다. 그런가하면 에스라는 철저히 개혁하는 개혁자였습니다.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사회를 개혁하고 종교계를 개혁했습니다. 그래서 선민은 혼탁한 와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에 개혁만이 살길입니다. 에스라의 삶을 본받아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