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규목사 (광주중앙교회)

오늘은 전국 교회가 지키는 ''교사주일''입니다. 교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지난주간에도 스승의 날이 있었습니다. 사회의 교사들은 훈장을 받기도 하고 상패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교사에 대한 대접은 푸대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푸대접이라도 해야 되겠기에 몇 해 전부터서 교회에서도 교사주일을 정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물론 교역자들입니다. 또 기관마다 가르치는 교사가 많이 있는데 유치원 교사, 유년주교, 학생주교, 장년주교 등 여러 기관의 교사들이 있습니다. 오늘 교사주일에 우리 모두가 수고하는 그 노고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 열매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모든 교사들에게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십시다. 봉독해 드린 말씀은 선지자의 생도 곧 신학생들이 거처를 좁아서 신학교를 신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무를 베다가 도끼를 잃어 버렸는데 교사 엘리사가 그 잃은 도끼를 이적 적으로 찾게 한 내용을 소개한 말씀입니다. 여기 잃은 도끼는 건물을 짓는 일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소중한 도구입니다. 따라서 잃은 도끼는 우리의 영적인 무기일 수도 있고 물적인 자산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시간에 우리 모두가 잃은 도끼를 찾는 축복의 시간을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속에 잃은 말씀을 찾게 한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도끼 잃은 것을 슬퍼했기 때문.

한 학생이 나무를 베다가 도끼가 나무에서 빠져버렸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도끼가 깊은 강물에 빠졌습니다. 나무를 베야하는데 도끼가 물에 빠진지라 이런 낭패가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도끼를 잃어버린 학생이 어찌했습니까. 본문 5절 "아 내 주여" 탄식하면서 가슴을 치면서 슬퍼했습니다. 그가 슬퍼한 이유는 셋입니다. 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 빌린 도끼였기 때문 도끼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슬프게 했습니다. 도끼 잃은 것을 슬퍼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 슬퍼했다는 말은 기도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산상보훈이 말하는 팔 복중에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자기의 일을 슬퍼하다가 새 길을 걸었고 다윗도 눈물로 침상을 적시다가 존경받는 성군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자주 불러야될 찬송입니다. 그런데 성도 중에는 도끼를 잃어버리고도 슬퍼하기는커녕 깨닫지를 못하는 성도들이 종종 있습니다. 본문에서 도끼를 잃어버린 학생이 어찌했습니까? 5절에 "외쳐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선생님께 사실을 말씀드렸다는 것입니다. 또 5절에 "이는 빌어 온 것이니이다"고 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이 도끼는 제 것도 아니고요 빌어 온 것인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진실을 토로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우리 주님께 진실 되게 토로해야합니다. 슬프면 슬프다고, 도끼를 잃었으면 도끼를 잃었다고 진실을 토로해야합니다. 여기에서 잃은 도끼는 무엇입니까? 기도의 도끼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교회 안에 기도의 도끼를 잃은 성도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슬퍼할 줄을 모릅니다. 이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한 성도가 목사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너무 무관심하셔요. 제 사정을 아신다고 하면 내 인생의 문이 막혀진 채 두시지 아니할 것 아닙니까?" 항변조로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문을 닫으시되 창문을 열어두십니다. 닫힌 문만 보면서 절망하지 말고 열려진 창문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십시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슬퍼합니까? 걱정합니까? 지금 열린 창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창문만은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창문은 있습니다. 동서남북 문이 다 닫혔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창문은 항상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낙망치 말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기도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기 때문이요, 또 성경에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도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잃어버린 도끼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엘리사가 함께 했기 때문.

존경받는 교사 드물고 신임 받는 교사가 많지 못합니다. 존경받는 교사는 사랑 있는 교사요, 신임 받는 교사는 대화가 있는 교사입니다. 엘리사는 이러한 교사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학생들과 함께 했고 학생들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알면서 그 요구를 들어준 교사였습니다. 학생들이 한 번 소원했습니다. "선생님, 학생 수는 많고 학교는 좁으니 신학교를 신축해야 되겠습니다. 재목을 얻기 위해서 우리 모두를 요단으로 가게하소서" 이때에 엘리사는 어찌했습니까? 2절에 보면 "가라"고 했습니다. 또 학생들이 "선생님, 기왕이면 선생님도 우리와 함께 가시지요" 했을 때에도 엘리사는 3절에 보면 "그렇다 나도 함께 가리라"고 했습니다. 교사 엘리사의 마음을 항상 학생들 편에 있었습니다. 작업을 하다가 도끼를 잃어버린 학생이 있습니다. "선생님 제 부주의로 도끼를 물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도와주십시오." 그럴 때에도 엘리사는 그의 소원대로 도끼가 물에서 떠오르게 했고 "손을 내밀어 그것을 취하라" 말씀하셔서 잃었던 도끼를 찾아 손에 취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사 엘리사는 항상 사랑으로 학생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아 8:6에 보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교사 엘리사는 이적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사랑 있는 교사가 이적 있는 교사이기도 합니다. 만일 엘리사가 학생들과 함께 하지 아니했더면 낭패로 끝날뻔 했습니다. 학생들이 잃어버린 도끼를 누가 찾게 할 것이며 물에 빠뜨린 도끼를 누가 떠오르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교사들이여, 주일학교의 부흥을 염원합니까? 교사들의 열심, 사랑에 달려있습니다. 주일학교의 부흥은 교사의 수준 만큼입니다. 교사가 부흥한 것만큼 주일학교도 부흥할 것입니다. 여기 2절을 보십시오. 각각 한 재목씩 어깨에 메고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건축을 할 때에 "나도 한 사람 너도 한 사람 우리 모두 전도하자" 방식을 취했습니다. 주일학교의 부흥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부흥은 주일학교의 부흥에 있습니다. 어떤 굴지교회의 통계가 말합니다. 전체교인의 89%가 주일학교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주일학교는 작은 교회를 만들고 큰 주일학교는 큰 교회를 만듭니다. 유대인을 망하게 하려면 그들의 학교를 폐교시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만큼 학교교육이 중차대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 교회는 주일학교에 달려있습니다. 도끼를 잃은 자는 교회 밖에도 있고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 서로가 사랑이 있고 능력 있는 교사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엘리사처럼 선배 엘리야를 향하여 "당신의 영감을 갑절이나 주옵소서"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영감 있는 교사가 영감 있는 학생을 길러냅니다. 사랑 있는 교사가 사랑 있는 학생을 배출합니다. 미래가 있는 교사가 미래 있는 학생을 배출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나무 가지를 던졌기 때문.

잃은 도끼를 어떻게 찾았습니까?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물위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도끼가 떠올랐습니다. 도끼가 고무풍선, 나무토막입니까? 아닙니다. 돌보다도 무거운 쇠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쇠덩어리 도끼가 고무풍선처럼 떠올랐습니다. 도끼를 떠오르게 한 나뭇가지가 요술 방망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나뭇가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잃은 도끼를 찾아 주시는 분, 쇳덩어리 도끼를 물위로 떠오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 없겠네 찬송이 절로 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슬퍼할 것 없고 걱정할 것 없겠네 찬송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하시매 슬퍼하지 아니했습니다. 철문이 절로 열렸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하시매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바람아 잠잠하라" 바람을 잔잔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매 걱정할 것 없었습니다. 사자가 그를 삼키지를 못했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없네.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새성전 건축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인지라 왜 3차 공사가 이리 더디느냐고 염려도 합니다. 본문 말씀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자급자족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선지학생들은 신학교를 신축하면서 외부 원조를 의지하지 아니했습니다. 남의 도움을 요청한 일도 없습니다. 각자가 손에 도끼를 잡고 나무를 베었습니다. 서로 서로의 재목이 모아서 기둥이 되게 했고 들보가 되게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새 성전 건축을 위해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고 합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힘도 없이 순수하게 우리의 의지, 힘으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남은 공사 그렇게 많지도 아니합니다. 시작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히 때가 이르매 마감해주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자기 몫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한 학생은 큰 나무를 베었고 다른 학생은 작은 나무를 베었습니다. 각각 재능대로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몫을 메고 왔습니다. 자기 집에 도끼가 없는 학생은 도끼를 빌려다가 자기의 몫을 감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온 성도가 새성전 건축을 위해서 자기 몫을 감당해야 합니다.
잃은 도끼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도끼가 없으면 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잃은 도끼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도끼입니다. 성전건축을 위해서는 물질의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베기 전에 먼저 믿음의 도끼로 나무를 베어야합니다. 물론 성전건축에도 물질은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물질을 의존하는 것은 인본주의이지 신본주의는 아닙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물질이 먼저냐, 하나님이 먼저냐를 물어야합니다. 또 만사를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물질을 바칠 때에도 믿음으로, 사용할 때에도 믿음으로 해야합니다. 먼저 건축위원들이 믿음으로 해야하고 온 성도들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경우에 따라 물질을 만들기도 하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기도 하는 능력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성전을 짓는 일 힘들어도 주님의 명하신 분부 따라 아무리 괴롭고 힘들다하여도 믿음만 있으면 꼭 이루리 ♬

실화 한 토막을 말씀하면서 마감하려합니다.
미국 보스턴 시에 바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큰 부자였습니다. 어느 날 스토로사라는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사장님, 제가 작은 도매상 하나를 경영하고 싶은데 2천 달러만 빌려주세요"했습니다. 바턴은 웃으면서 "젊은이 담보가 있는가?" 물었습니다.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제게 담보는 없습니다. 혹시 담보가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을 담보로 하겠습니다." 부자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담보로 하겠다?" 그러면서 그는 이 젊은이의 믿음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증서 없이 2천불을 빌려주었습니다. 십 년이 지난 어느 날입니다. 세계에 엄청난 경제공황이 있은지라 부자 바턴은 파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소식을 들은 스토로사가 그를 찾아갔습니다. "사장님 부채가 얼마나 되는지요?" "7만 5천 달러나 된다오." "사장님 그것 제가 갚아 드릴께요." 깜짝 놀랬습니다. "전에 빌려간 2천불은 다 갚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게 또 돈을 주겠다는 말이 왠말입니까?" 그때 젊은이가 "그때 빌려간 돈은 다 갚았지만 사장님이 내게 믿고 빌려주신 그 은혜는 아직도 갚지를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어려움을 도와주었다는 미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의 믿음이야말로 밑천이 되고 무기가 됩니다. 자본이 되고 행복의 조건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믿음의 도끼를 잃어버리지는 아니했습니까? 기도, 사랑, 진실, 공의, 직장, 물질, 건강의 도끼를 잃어버리지는 아니했습니까? 잃어버린 도끼를 찾아 믿음생활을 높이고 더 많은 축복을 누리고 남은 새 성전 공사도 완공해내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