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2006.05.05 조회 : 167  

‘트라우마’(trauma)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정신적 외상’(外傷)이라고 번역되는데 풀이하면 이런 뜻입니다. “한 개인의 심리 발달에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상처를 초래하는 정서적 충격이나 상처로서, 때로는 정신질환을 일으키기도 하는 충격.” 오늘은 이 ‘트라우마’에 대해서 말씀하려 합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선책과 부름을 받아 75세의 나이에 하느님 말씀 하나 붙잡고 무작정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무작정 상경’이란 말을 많이 했습니다. 급격하게 산업화가 진행되고 농촌이 무너져 감에 따라서 남여 농촌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에 비유하면 아브라함의 경우는 ‘무작정 가나안 행’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는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자식 보기를 포기해야 했을 나이였습니다. 하느님께 자식을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낳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의 몸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당신이 약속한 아이는 이스마엘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어쩌라는 말씀인지! 젊어서도 불임이었던 아내 사라는 그때는 아주 늙어 아기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느님은 가끔 잊을 만하면 나타나셔서 아들을 주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보기를 포기했다며 이스마엘이나 잘 돌봐달라고 청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한사코 사라의 몸을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가 90세가 된 사라에게 덜컥 아이가 들어섰습니다. 기적이었지요. 이들은 그 아들에게 ‘이삭’이란 이름을 붙이고 불면 날아갈세라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이삭의 나이가 열댓 살 쯤 됐을 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아이를 자기에게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눈으로 보나 하느님의 눈으로 보나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눈으로 보겠는가마는) 말이 되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렇게 속절없이 빼앗아갈 것이면 처음부터 왜 아들을 주셨단 말입니까? 자식이 병들거나 사고로 부모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부모 가슴이 찢어지는데 아들을 주신 하느님이 그 아들을 당신에게 바치라니! 하느님의 입장에서 봐도 말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이삭이 제물로 바쳐져 죽으면 그를 통해 후손을 번성케 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받은 다음날 아침 일찍 장작과 짐을 꾸려 등에 지고 아들을 앞세워 그를 제물로 바칠 산으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흘 길을 걸었습니다.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성경은 전하지 않습니다. 아마 무거운 침묵이 흐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기슭에 도착하자 동행했던 하인들을 남겨두고 아버지와 아들 둘만 산에 올라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장작은 여기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제물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주실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아무 할 말이 없어서 의미 없이 한 말이었을 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묶어 장작 위에 올려놨습니다. 아버지는 100세가 넘은 노인이고 아들은 10대 청년이었습니다. 아버지를 힘으로 제압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은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칼을 높이 들어 아들을 치려는 순간 야훼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이를 중단시켰습니다. 그는 이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했다는 말과 더불어 양을 발견케 하여 그 양으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헤피 엔딩입니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와 아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을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산으로 가는 길에서 그랬던 것처럼 침묵으로 일관했으리라 추측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이 있은 후에도 상당히 오래 살았는데 나머지 생을 사는 동안 그는 아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아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해도 아들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은 이런 아버지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하느님의 명령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았겠느냐고 이해하고 아버지를 위로했을까요? 아들을 죽여 하느님께 바치려 했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손에 의해 죽을 뻔 했던 아들 두 사람 모두에게 이 사건은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입니다.




다윗의 트라우마

‘개인적으로 만나면 나쁜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깊이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이 없다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로 크게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깊이 알고 나서도 여전히 미운 사람은 정말 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깊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다윗을 성군(聖君)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철들고 비판의식이 생긴 후에 성경을 잘 읽어보니 다윗은 성군은커녕 천하에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일단 나쁜 사람으로 보고 나니 성경에 나오는 다윗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권모술수요 정략적인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후에는 철이 좀 더 많이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지금은 다윗이 여전히 밉긴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죽했으면 이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은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여덟 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그가 가족의 눈길이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을 리 없습니다. 여덟 째 아들은 하루 종일 집안에 없어도 눈에 띠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우연히 전쟁터에 나가 뜻밖의 무공을 세워 사울 왕의 총애를 받아 왕실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처음부터 왕이 되려는 야심이 그에게 있었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대중의 인기를 점점 더 얻어가는 것과 반비례해서 사울 왕의 인기와 신뢰는 점점 더 낮아지는 상황에서 왕은 다윗을 시기, 질투하여 급기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다윗은 도망자의 처지에 빠졌고 적국의 용병 노릇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윗은 왕이 됐지만 한시도 평안할 때가 없었습니다. 전쟁과 내부 불안 속에서도 그는 불륜과 그로 인한 살인의 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자기 수하 장수의 아내를 범하고 그 장수를 가장 극심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에 내보내서 죽게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예언자 나단에게 혹독한 비판도 받았고 그렇게 낳은 아들이 죽는 것도 봤습니다. 아들을 앞세운 부모는 매우 불행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는 이름조차 붙여보지 못한 아들을 앞서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부인이 여럿이다 보니 자식들 간의 갈등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들 녀석 하나가 배다른 여동생을 강간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녀의 오빠가 자기 동생을 범한 배다른 형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다윗은 다시 한 번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식 하나를 앞세워 보낸 부모 심정도 말로 할 수 없이 아픈데 다윗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그 뿐 아니라 딸이 아들에게 강간을 당했고 아들이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아버지로서의 다윗의 심정을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다스리던 기간 중에 반란이 계속됐습니다. 그 와중에 다윗은 임종을 맞았습니다. 오늘 읽은 열왕기상 2장의 말씀은 다윗이 임종하면서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입니다. 유언은 하느님 잘 믿고 계명을 잘 따르라는 훈계로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곧 유언치고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 말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아들 솔로몬에게 몇 사람을 죽이라고 지시했습니다. 자기 수하에 있던 요압이라는 장군이 몇 번에 걸쳐 자기 지시를 무시하고 거역한 적이 있었으므로 다윗은 그를 “백발이 되어 평안히 지하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곧 살해하라는 말입니다. 또 시므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칠 때 온갖 욕을 퍼부으며 비난했던 사람입니다. 반란이 평정되어 다윗이 다시 성으로 돌아올 때 시므이가 나와서 다윗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용서하겠다고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 시므이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한 일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솔로몬에게 시므이가 “백발이 되어서도 피를 흘리며 지하로 내려가게 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훗날 솔로몬은 다윗이 지시한대로 시행했습니다.

얼마나 섬뜩한 얘기입니까! 꼭 죽으면서까지 이래야 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가 되면 착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어가면서까지 이런 모습을 보여준 다윗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제가 다윗을 싫어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시 그가 갖고 있었던 크고 깊은 정신적 외상(外傷), 곧 트라우마가 그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닐까? 다윗은 이 트라우마를 치유 받지 못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흘려보내야 합니다

지금은 한국에 성폭력 당한 사람을 상담해주는 기관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20년 전만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한 여성 목사가 20년 전에 성폭력 상담소에서 일을 했습니다. 저는 그 목사에게 놀라운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에게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여자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대개가 모르는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사람에게 당한다는 말은 저를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그때 들은 얘기들 중에 제가 잊지 못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 여자가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밤중에 길을 가다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고민 끝에 그냥 결혼을 했습니다. 가족과 남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결혼한 것입니다. 그 후 2-30년이 흘러 그 남편과 같이 살고 있지만 그녀는 결혼한 후로 단 한 번도 남편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고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살기를 거의 30년이 지난 후에 용기를 내서 상담소 문을 두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성폭행으로 생긴 트라우마를 치료받지 못해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깊은 트라우마가 치료된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 세 번이나 그분을 부인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가 누군지 모른다고 잡아뗐던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끝이었다면 베드로는 깊은 상처를 안고 평생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특별히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따져 묻는 물음이 아니라 일종의 치유과정이었습니다. 하마터면 베드로에게 깊은 상처로 남을 수도 있었던 자책감과 죄의식을 예수께서 치료해주셨던 것입니다.

세코야 공원에 가면 세코야 나무가 있습니다. 안내원이 나무의 나이테를 보며 이렇게 설명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테의 이 부분은 그 해에 크게 가뭄이 들었음을 보여주고 저 부분은 비가 많이 왔음을 보여주며 이 부분은 그 해에 화재가 났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저 부분은 그 해에 병충해가 심했음을 보여주지요.” 나이테는 그 나무의 자서전인 셈입니다.

우리 기억에는 나이테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어떤 것은 뚜렷이 남아 있고 또 다른 것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또 다른 것은 무의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기억하기 싫기 때문일 수 있고, 또 너무 충격적이라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무의식이라는 특별한 기억의 창고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남에게서 얻은 상처도 있고 자기 자신에게서 받은 상처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노여움, 분노와 죄책감 같은 것들이 치료되지 않으면 지워지지 않는 정신적 외상으로 남습니다.

기독교는 이웃과 화해, 그리고 하느님과의 화해에 대해서는 많이 말해왔지만 자기 자신과의 화해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화해의 완성은 자신과의 화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남에 의해서든 자신에 의해서든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상처와 고통, 그리고 죄책감들을 이제는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내가 노력해도 할 수 없었음을 받아들이고 이제는 떠나보내야 합니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이 문제라고들 말하는데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엄격하고 자기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사실 자기에게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자기 문제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든 남에게든 너무 엄격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남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과 화해할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픔을 자기 가슴 속에만 담아두지 말고 말하십시오. 혼자 고민하지 말고 혼자 고치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교우들이 여러분 주위에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돕기 위해 거기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 얘기하는 것도 자신과의 화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로마서 8장 26-7절에는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주십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도와주신다’는 말은 구걸하는 거지를 도와주듯이 일회성으로 돕는다는 뜻이 아니라 상담자처럼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꾸준히 돌봐준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아픔을 성령께 얘기하십시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트라우마가 금방 치유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 충만’만 받으면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된다고 말하지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깊어진 상처를 어떻게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긴 과정이므로 꾸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에도 인용한 적이 있는 시 한 편을 외우겠습니다.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애태우지 마십시오.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아파하면서 용서를 생각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비우면서 괴로워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세상의 모든 꽃과 잎은 더 아름답게 피지 못 한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피어난 거기까지가

꽃과 잎의 한계이고 그것이 최상의 아름다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