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왜 내 자식이 나를 공경해야 할까?

사람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일은 무엇일까요? 태어났을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돌잔치 때 자기가 무엇을 집었는지를 기억한다는 사람을 봤습니다. 정말일까 의심이 갔습니다. 저는 돌 때는커녕 훨씬 후의 일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든요.

만일 부모가 나를 낳아주셨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그것은 마음에서 절로 우러나온 생각이라기보다는 학습의 효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태어났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일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게 되겠습니까. 부모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때는 자기 자식을 낳아본 후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부모 공경에 대한 생각은 자식을 낳기 전과 후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한 부모 공경은 스스로 자식을 낳아볼 때까지 미뤄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는 효도를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진정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 부모의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되지는 못할 것이란 뜻입니다.

세상에 부모 마음에 꼭 드는 자식이 있을까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남의 자식과 비교해보면 내 자식은 부족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남의 자식은 부모 마음을 잘도 알아주고 부모 말도 잘 듣는 것 같은데 내 자식은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자기 마음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합니다.

그러나 속상해 하기 전에 부모는 ‘왜 내 자식이 나를 존경해야 하는가?’라고 진지하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모 마음을 몰라준다고 속상해 하기 전에, 부모도 모르는 불효자식이라고 욕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식이 나를 인정해주고 존경하고 공경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내 행동이나 태도에서 아이가 존경할만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데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날 존경해야 하는 걸까요? 이것은 억지요 폭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을 탓하기 전에, ‘옛날에 우린 안 그랬는데...’ 하며 혀를 차기 전에 먼저 문제의 근본이 내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20년 전인 1985-6년에 저는 서울 향린교회의 중고등부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시절이었습니다. 저와 중고등부 교사들은 그런 어려운 시절에 아이들에게 열린 교육, 참교육, 인간화 교육. 주입식 교육이 아닌 토론식 교육을 해보겠다며 열심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성과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대본을 바탕으로 마당극을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건전한 가치관 위에서 잘 교육받아 대학에 가서 학생운동을 하며 열심히 사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한 대학의 학생회장도 나왔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군사정부는 이런 교육을 ‘의식화 교육’이라고 해서 마치 좌경교육이나 하는 것처럼 비난하고 심하면 처벌까지 했습니다. 아이들 부모들이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중고등부를 싫어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았고 심지어 자녀를 중고등부에 보내지 않고 어른 예배에 데려가는 부모도 있었습니다. 저와 교사들은 부모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우리도 부모들을 비난했습니다. 저렇게 자식을 키워서 어떻게 하려느냐고, 공부벌레로 키워서 출세나 시키려고 한다며 부모들을 비판해마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 나이 겨우 26-7세였고 자식을 키워보기는커녕 결혼도 안 한 총각이었습니다.

20년이 흘려 청소년 자식의 부모가 된 지금 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만일 내가 그때 부모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입니다. 나는 내 자식을 중고등부에 보냈을까? 아마 보냈을 겁니다. 하지만 소위 ‘균형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며 중고등부 전도사에 대해 약간은 마땅치 않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20년 전에 제가 일방적으로 잘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을 잘 교육하려면 부모들과의 관계 또한 신뢰 위에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오늘날 부모와 자식 관계를 성격 짓는 근본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부모, 자식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어떤 의미에서 내 자식의 부모이고 내 자식은 어떤 의미에서 나를 부모라고 생각할까요? 부모, 자식 관계를 규정하는 여러 가지 중에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입니다. 부모는 모름지기 자기 자식의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라면 모름지기 자기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부모들이 만나면 주로 교육에 대해 얘기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대체로 교우들의 자녀들이 중고등학생이니 자연스레 교육에 대한 얘기가 대화의 주제가 됐습니다. 몇 년 후에는 주제가 달라지겠지요. 그때는 건강 얘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부모들이 하는 교육 얘기란 것이 ‘무엇을 어떻게 교육할까?’에 관한 얘기라기보다는 ‘누구에게 교육을 맡겨야 가장 효율적인가?’에 대한 얘기입니다. 학군과 학교는 어디가 좋고 학원은 어디를 보내니 성적이 오르더라는 등등의 얘기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말하면 부모들은 교육 얘기는 많이 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교육하기를 포기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좀 극단적인 평가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된 것이 부모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교육제도가 그렇고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육은 학교와 학원이 하는 것이지 부모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부모인 우리는 아이를 교육하는 게 아니라 돈을 주고 소위 교육 전문가에게 내 자식 교육을 위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육은 인생을 위한 준비정도로 여겨지는 형편입니다. 초등교육은 중등교육을 위한 준비이고 중등교육은 고등학교 교육을 위한 준비이며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교육을 위한 준비입니다. 그리고 대학, 또는 대학원 교육은 직업을 얻기 위한 준비입니다. 그러니 결국 초등교육부터 대학, 대학원 교육까지 모든 학교교육은 직업을 얻기 위한 준비요 과정이요 수단이라고 하겠습니다. 직업을 얻으면 그것으로 모든 교육은 끝나고 맙니다. 그 이후에 뭔가 배우려는 의욕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평생교육’이란 말을 하지만 진지함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특히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때 고대 이스라엘에 ‘학교’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뜨거운 논쟁거리였습니다. 아직까지 잠정적인 결론은 ‘학교는 없었다’입니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 ‘교육’ 그 자체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문적인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을 교육하기는 했지만 이를 ‘학교’라고 부를 수는 없었고 또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이 아이들 교육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했을까요? 부모, 그 중에서도 주로 아버지가 자식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왜 그랬을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집트에도 메소포타미아에도 모두 학교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문명권에 오래 전부터 학교가 존재했었다는 뚜렷한 증거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이스라엘에만 독자적인 교육기관이 없었을까요? 문명이 뒤떨어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희랍인들은 ‘이해’하기 위해 배웠습니다. 희랍인들에게 교육의 목적은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희랍인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라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가 희랍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의로운 사람이 죄인들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를 희랍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공경’하기 위해 배웠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교육의 목적은 공경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배움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유대인처럼 공경하는 것일까요? 희랍인처럼 이해하는 것일까요? 둘 다 아닙니다. 현대인이 배우는 목적은 써먹기 위해서입니다. 현대인에게는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 최고입니다. 반대로 써먹지 못하는 지식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효용이 없거나, 곧 돈을 잘 벌게 해주지 못하거나 편리함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지식은 현대인에게 가치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학교가 따로 없었던 이유는 교육의 목적이 공경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학교보다는 부모가 더 잘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에는 학교가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은 누가 가르쳐야 하나?

오늘날 우리 자식들은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을 배워 직장도 얻고 성공할 기회도 누리며 안정된 생활을 살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아이들이 약간의 편차는 있을지라도 모두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 것은 제가 믿음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교우들의 생활환경이 모두 자식들에게 그 정도의 뒷바라지는 해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교육의 전부일까요?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부모의 자식에 대한 교육이 끝났다고 봐도 됩니까? 학교든 학원이든 그런 지식을 전해주는 교육기관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이 지식과 기술은 얻겠지만 ‘통찰력’까지 갖게 될까요? 그런 교육기관들을 통해서 다양한 활동을 하면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긴 하겠지만 과연 내 자식이 ‘고요함’의 의미도 알게 될까요? 남을 딛고 올라서는 기술은 배우겠지만 낮은 곳으로 내려갈 줄 아는 억제와 절제, ‘자기부정’을 터득하게 될까요? 질문에 대해서 기발하게 대답하는 법은 배우겠지만 옳은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얻게 될까요? 남에게 빌려온 언어로 그럴듯하게 말하는 법은 배우겠지만 어떤 언어로도 표현되지 않는 가슴 뻐근함이나 영혼의 떨림을 말하는 법도 터득하게 될까요?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일은 부모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모가 이런 것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부모들도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데가 있다면 가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부모에게 가르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부모가 아니면 아무도 가르칠 수 없기에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부모가 가르치지 않는다면 아무도 가르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아이들은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은 많아도 하늘을 우러르고 이웃을 사랑하는 지혜는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나 도덕경을 배워서 공적, 사적인 말을 하거나 사람을 설득할 때 거기 있는 말들을 인용하여 유식을 과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경과 도덕경이 가르치는바 하늘을 우러르고 사람을 공경하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은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몫입니다. 교회는 부모를 도울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책임지지는 못합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사들이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그들이 아이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그리 클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전적으로 부모에게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자기에게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한 장면을 읽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이외에 다윗이 이렇게 통곡을 했다는 얘기를 우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윗은 왜 이토록 통곡을 했을까요? 이미 압살롬의 손에 암논이란 아들이 죽었으니 압살롬이 다윗보다 앞서서 죽은 첫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암논이 죽었을 때 다윗이 울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다윗이 누군가에게 크게 화를 냈다고는 했지만 울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듣고 왜 그토록 통곡을 했을까요? 단순히 아버지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그가 다른 아들의 죽음에는 그토록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슬퍼했다는 얘기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퍼하지 않았음을 입증하지는 않지만 두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다윗이 보인 태도에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저는 다윗이 압살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자식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봤다는 말씀입니다. 압살롬은 나쁜 자식입니다.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에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려 하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범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자식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이런 모습이 어디서 왔을까요? 다윗이 유독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슬퍼했다는 이야기와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압살롬의 이런 모습은 결국 아버지 다윗에게서 왔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곡 압살롬이란 아들은 다윗이란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그대로 배웠다는 얘기입니다.

‘Life as a House’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아버지가 암에 걸려 넉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재혼한 아내와 함께 살면서 얼굴 여러 곳에 구멍을 뚫고 마약을 하며 되는대로 막 사는 열여섯 살짜리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생의 마지막 여름을 아들과 함께 집을 지으며 보내기로 했습니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때로는 설득도 하고 때로는 야단도 치고 협박도 해가면서 함께 살면서 집을 지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아버지는 자기가 어렸을 때 부모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줍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가 낸 교통사고 때문에 부모를 잃고 불구가 된 여자아이가 있었다는 얘기를 아들에게 해줍니다.

아들은 점점 마약을 끊게 되는데 아버지는 점점 더 많은 진통제를 먹어야 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전 아내에게 자기 병에 대해 말하게 됐고 아들도 이를 알게 됐습니다. 아들은 울면서 아버지에게 욕을 퍼부으며 이렇게 외칩니다. “So, are you trying to make me like you?”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No, I am trying to make you love me!” 결국 아버지는 집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아들은 집을 완성한 후 자기 할아버지가 낸 사고의 피해로 불구가 된 여자에게 집을 넘겨줍니다. 그냥 네가 살면 어떻겠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아들은 이것이 아버지가 원하는 바일 것이라고 대답하지요.

두 번째로 읽은 디모데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이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로이스와 유니게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믿음이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어떤 믿음을 갖고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사람을 속이는 일도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감언이설로 잠시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람의 말은 결국 그의 삶으로 표현되는 법이니 사람을 오랫동안 속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속이고 싶다면 차라리 정직해지는 것보다 더 노력을 기울여야 될 것입니다. 자식을 부모의 판박이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은 ‘삶’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성경을 몰라도, 도덕경은 몰라도 성경과 도덕경의 가르침을 자식에게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영화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집을 지으며 사랑을 가르쳤던 것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식에게 하늘을 우러르고 이웃을 사랑하며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가르칠 수 있습니다. 부모 된 우리는 자식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