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솔라리스

조금만 의외의 일이 일어나면 잘 놀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격 차이 때문이겠지요. 예외는 있겠지만 대체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잘 놀라지 않고 감성적인 사람은 잘 놀란다고 합니다.

신학(神學)은 영어로 theology인데 이 말은 희랍어로 ‘신’을 뜻하는 theos에 ‘이야기’를 뜻하는 logia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 신학은 신에 관한 이야기란 뜻입니다. 기술(技術)은 영어로 technology인데 이 말은 역시 희랍어로 ‘이야기’를 뜻하는 logia에 ‘techne’라는 말을 붙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 기술은 테크네에 관한 이야기란 뜻인데 희랍어로 techne는 ‘놀라움’ 또는 ‘경이’(驚異)를 뜻합니다. 곧 기술 또는 과학은 놀라움에 관한 이야기란 뜻이고 놀라움에서 비롯됐다는 얘기가 됩니다. 합리적인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을 만나면 우선 놀라게 되지요. 일단 놀랐다가 놀라움이 가라앉으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연구를 하게 되고 연구 결과 이치를 깨닫게 됨으로써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과거에 비하면 별로 놀랄 일이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웬만한 발명에는 놀라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몰라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확실히 옛날보다 사람들은 놀라지 않습니다. 이는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테크놀로지란 말의 원래 의미를 무시하기라도 하듯이 과학자들조차 놀라지 않습니다. 정말 놀랄 일이 없어서 그럴까요? 그렇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대인은 일반인과 과학자를 막론하고 놀라움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과학자들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만나면,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합리적인 세계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면 그 현상을 ‘착시’나 ‘환각’이라고 설명해버립니다. 이걸 ‘설명’(explanation)이라고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그들은 그렇게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종교인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만났을 때 ‘기적’(miracle)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명’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어떤 현상을 설명한다고 했을 때는 그 현상의 목적과 의미를 얘기할 때 비로소 ‘설명’이란 말을 갖다 붙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은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18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보고 이를 ‘착시현상’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노을이 지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께서 사실은 해변을 걷고 계셨는데 공기 밀도의 차이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께서 물 위를 걷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으로 ‘기적’을 ‘설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솔라리스’(Solari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소련 사람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 Tarkovsky) 감독의 3시간짜리 영화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1시간 30분짜리 리메이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원작은 소설이라고 하네요. 원작 영화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라고 하는데 저는 아직 원작은 보지 못했고 리메이크 작품을 봤습니다. 어떤 코미디 프로를 보니 소위 영화평론가가 별 다섯 개를 주는 예술영화는 평론가가 보다가 잠이 든 영화라고 하던데, 사실 이 영화는 자칫하면 잠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우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영화이므로 잠을 쫓으면서 볼만한 영화입니다.

지구의 과학자들은 솔라리스라고 하는 기이한 영역을 조사하기 위해 우주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우주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탐사 팀은 심리학자인 주인공 크리스를 우주선에 파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주인공 크리스의 친구인 개버리안도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크리스는 우주정거장에 당도해서 몇 가지 일 때문에 놀랍니다. 우선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아서 놀랍니다. 그는 사람을 찾아 우주정거장을 돌아다니다가 거기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랍니다. 꼬마가 돌아다니고 피 자국을 보고 고양이를 봅니다. 그런 것들은 우주정거장으로 보내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한 사람을 만나지만 그는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엉뚱한 말만 늘어놓습니다.

그러다가 크리스가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한 여인을 봅니다. 그 여인은 10년 전에 자살한 크리스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도 거기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분명 크리스의 아내였습니다. 그와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크리스의 아내에 분명했습니다. 크리스는 혼란에 빠집니다. 결국 그는 그녀를 캡슐에 태워 우주 공간으로 날려 보냅니다.

여기서 얘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크리스의 아내는 다시 나타납니다. 그녀는 울면서 애원합니다.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자기는 크리스의 아내임에 분명하다고. 그래서 크리스는 그녀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나중에는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에 빠져 액체산소를 마시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우주선에 있던 과학자는 그녀는 크리스의 아내가 아니라 ‘방문자’라고 말합니다. 솔라리스를 조사하려고 X선을 과다하게 쏜 후로 방문자들이 오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과학자는 그녀가 크리스의 아내인지 여부를 밝히기 위해 검사를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크리스는 이를 거절합니다. 오감(五感)을 통한 경험으로 그녀가 아내임을 느끼므로 실험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재미있게 얘기했습니까? 역시 영화는 듣는 것보다 봐야 제 맛이지요. 크리스의 아내는 누구일까요? 왜 그녀는 자꾸 나타나는 걸까요? 그녀를 만들어낸 것은 크리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10년 전에 죽었지만 크리스의 마음속에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솔라리스 안에서 그에게 계속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솔라리스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생각 속에 있는 것을 실재로 존재하게 하는 영역, 그것이 솔라리스였습니다. 크리스가 그녀는 캡슐에 실어 우주 공간으로 날려 보냈어도 그의 생각으로부터 날려 보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재차 나타난 것입니다. 솔라리스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신적인 존재인 동시에 만들어진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실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생각과 현실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야훼께서 그를 보내셨을 수도 있는데...

사무엘하 9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다윗의 집안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윗 집안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윗이 자기 수하의 장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정을 통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인 이야기도 결국은 다윗의 집안 얘기입니다.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이복누이인 다말의 미모를 탐내 계략을 써서 그녀를 범한 이야기 역시 가정 안에서 벌어진 비극적 이야기입니다. 이 일 때문에 암논을 미워하게 된 압살롬은 수 년 동안 복수를 별러 오다가 마침내 암논을 죽여 버립니다. 이것도 다윗 집안에서 일어난 비극입니다. 이 일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된 압살롬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궁전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결국 자기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윗은 압살롬을 죽이지 않으려 했지만 과잉충성 한 장수에 의해 결국 압살롬은 죽고 맙니다. 이로써 다윗 집안에서 일어난 비극은 정점에 도달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날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선왕 사울의 먼 친척인 시므이란 사람이 도망하는 다윗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도망가는 다윗 일행에게 돌팔매질을 하며 이렇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꺼져라!이 살인자야, 꺼져라! 이 불한당 같은 놈아, 사울 일족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놈, 그 원수를 갚으시려고 이제 야훼께서 이 나라를 네 손에서 빼앗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신 것이다. 이 살인자야, 네가 이제 죄 없는 사람 죽인 죄를 받는 줄이나 알아라.”

신하들은 당연히 화가 나서 그를 죽이자고 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왕자를 피해 달아나는 것도 서러운데 거기에 대고 욕설을 퍼부으니 화가 치밀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다윗은 의외의 반응을 보여 일행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야훼께서 나를 욕하라고 저 사람을 보내신 것이라면 내가 어찌 감히 왜 이러느냐고 하겠소?”라고 말하며 시므이를 그냥 놓아두라고 했습니다. 하기야 친자식마저 자기를 죽이려 하는 판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 욕설을 퍼붓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마는 평소 다윗의 성정(性情)으로 미루어보아 이런 반응은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이어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성을 들었다고 칩시다.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의 음성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사무엘하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직접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적어도 아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무관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있게 마련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다윗은 아들을 피해 도망치는 극한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나름대로 영적인 감수성은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시므이의 욕설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에게 시므이의 욕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입을 통해서도 당신의 말씀을 전하실 수 있는데 지금은 시므이가 그 사람일 수도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사실 예언자 자신에게 가장 심각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언자에게도 ‘과연 내가 제대로 들었을까?’라는 의문이 없을 수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나단의 예에서도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나단은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뜻에 처음에는 무조건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단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윗에게 정반대의 뜻을 전했습니다. 나단은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가 전하는 말들 중에서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디까지가 예언자 자신의 말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말에 처음에는 왕의 뜻대로 하라고 했던 나단의 대답도 하나님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나단의 생각에는 그랬습니다. 나단은 하나님도 성전 건축을 원하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모든 민족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을 위해 신전을 지어 바쳤으니 성전건축은 고대 중동지역의 보편적인 종교현상이었습니다. 크고 멋진 성전을 지어 바치는 것이 신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단이 다윗의 뜻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 나단이 성전 건축과 같이 중차대한 일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는 당연히 야훼 하나님도 성전을 원하실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나단의 말을 나단 개인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날 밤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이 제안했고 나단이 허락한 성전 건축 계획을 뒤집어버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나단이 밤중에 받은 계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내용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을 짓지 말라는 계시였습니다. “내가 언제 집 지어 달라고 하더냐!”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설명을 들어보면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광야를 유랑할 때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녔고 집안에 사셨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야훼 하나님에게는 집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언제든지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당신 백성이 당신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그들을 떠날 수 있는 하나님이 바로 야훼 하나님입니다. 영구히 머물 집을 지어 바치려는 뜻은 이런 하나님께는 맞지 않습니다.

제 질문은, 나단이 밤중에 받은 계시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어떻게 확신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만 자신을 계시하는 신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야훼 하나님이듯이 이집트의 신은 아몬-레(Amon-Re)였고 가나안 사람들의 신은 바알(Baal)이었습니다. 출애굽할 때 야훼 하나님이 이집트에 재앙을 내렸듯이 이집트의 신이나 가나안의 신도 이스라엘을 간섭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야훼 하나님만 계시를 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나단은 밤중에 자기가 받은 계시가 야훼 하나님의 계시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했을까요?

계시에는 주시는 분의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계시가 누구로부터 온 계시인지 자동적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이름표가 달려오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따라서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누구에게서 온 계시인지에 대한 ‘분별’의 능력이고 계시를 받는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밝혀내는 ‘해석’의 능력입니다. 나단도 자기가 받은 계시를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로 확신하기까지는 이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름표 없이 온 계시가 야훼 하나님의 계시임을 확신하기까지 나단은 그 계시를 분별해야 했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해석해야 했습니다. 계시는 완전히 요리되어 오는 것이 아니라 재료 상태로 온다고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재료(계시)를 요리(해석)해서 음식(행위)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단도 자기가 받은 계시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이고 결국 성전을 건축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지는 분별과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결론 내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인간의 말에 얹어서 전달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인간의 의지에 얹어서 전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분별과 해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내 뜻인가?

이렇듯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해서 분별과 해석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면 이제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계시에 대한 해석은 자의적(恣意的)이 되기 쉽다는 인식입니다. 제가 서두에 영화 솔라리스 얘기를 했습니다. 솔라리스의 세계는 사람의 생각이 현실이 되는 세계입니다. 크리스의 아내는 아무리 그녀를 떠나보내거나 죽여도 크리스의 생각 속에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 역시 해석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해도 그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언어로 전달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계시에 있어서 인간의 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만들려면 재료도 중요하지만 재료 못지않게 요리 솜씨도 중요합니다. 좋은 요리사는 자기 입맛에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의 입맛에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대중들의 기호에 맞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대중들의 기호에 맞추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고생했습니다. 대표적인 예언자가 예레미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시를 그것을 받은 사람(예언자)의 입맛에 맞게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경향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할 때는 계시를 받은 사람의 독특한 경험도 중요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역사, 그리고 성서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보편적인 의지를 무시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람은 자기의 독특한 경험만을 중요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독특한 경험이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늘 따져봐야 합니다. 계시에 대한 나의 해석이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연히 일어난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연은 아닐지라도 그 일에 어떤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일들도 많습니다. 사실 그런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돌부리 귀신이 내 다리를 걸었다’고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뭔가 하나님의 특별한 의지가 들어있다고 생각되는 사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사건들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권을 사라고 계시하셨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복권을 사면 분명히 당첨된다고 확신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호까지 계시해주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계시를 받았으니 분명 당첨될 것이라고 믿겠지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비록 그런 계시를 받았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몇 가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선 이 사람은 자기가 받은 계시가 하나님의 계시인지 여부를 분별해야 합니다.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음성이어야 할 이유도 없고 번호를 들었다고 해서 번호를 가르쳐준 존재가 하나님이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자기가 받은 계시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확인했다면 그 다음에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내게 당첨금을 안겨주심으로써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여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었음을 여러분은 이해해주리라 믿습니다.

사무엘하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도 나오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여럿이 나옵니다. 이도저도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때로는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기도 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죄악 때문에 아들에게 쫓겨 도망치게 됐다고 봤습니다. 다윗도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을 수 있다고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므이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는 각 사람의 주장이 상충될 때 분별과 해석의 문제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계시를 어떻게 분별하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리는 계시를 받았다고 너무 흥분하지도 말고 아전인수 격의 태도도 버리고 자연과 역사, 그리고 성서에 드러난 하나님의 보편적인 의지에 비추어 내게 드러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