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구약성경을 설교하는 일

저는 구약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만일 제가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면 제 목표는 확실합니다. 신학생들이 나중에 목사가 되어 목회할 때 구약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설교하는 목사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설교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본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설교하거나 본문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마치 본문이 그렇게 말한다는 듯이 설교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을 설교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구약성경 본문 안에서 신앙적 교훈을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신앙적인 교훈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설교는 듣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신앙적 교훈을 찾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데 그걸 찾아내기 어렵다면 설교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비하면 신앙적 교훈을 찾아내기가 쉽습니다. 또 그 교훈은 대개 보편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신약성경을 갖고 설교하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구약성경에는 너무 적나라하고 원색적인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설교에서 말하기가 적절치 않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창세기 38장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38장은 구약성서 학자들은 매우 좋아해서 이에 대해 책과 논문이 수없이 많이 나와 있지만 설교자가 설교하기에는 매우 곤란한 내용입니다. 사무엘하도 이에 버금갑니다. 여러분은 이번에 사무엘하 강해설교를 들으며 살인, 간음, 강간에 관한 이야기를 불편을 느낄 정도로 많이 들었습니다. 사무엘하는 듣기도 불편하고 말하기도 불편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왕의 여자들’이란 오늘의 설교 제목은 영화 ‘왕의 남자’에서 힌트를 얻어 지었습니다. 저는 오늘 미갈, 밧세바, 다말이라는 이름의 세 여자들에 대해서 얘기하려 합니다. 사무엘하 설교를 마감하는 마당에 굳이 여자들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사무엘하라는 연극에서 누구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 역할에 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는 전적으로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다윗과 그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연극입니다. 이들 잘난 남자들 중에는 다윗처럼 권력을 장악한 사람도 있고 요압처럼 권력자 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처럼 장렬하게 죽어간 사람도 있고 권력자의 죽음을 전했다가 속절없이 죽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차지하는 역할의 크기는 다르지만 모두 나름대로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무대에서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역할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잊혔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됐으니 명실 공히 ‘왕의 여자’가 됐지만 미갈과 다말은 잊히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들 얘기를 하려는 것은 우리만이라도 이들을 잊지 말자는 뜻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남자들이 이끌어나간 연극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보고 거기 무엇이 있는가를 찾아보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미갈, 마지막에는 할 말을 한 여인

미갈은 사울의 딸로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다윗과 정략결혼을 ‘당했습니다.’ 보통은 결혼을 ‘하지만’ 미갈과 같이 정략결혼을 한 사람은 결혼을 ‘당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남편이 서로 원수가 됐고 남편이 아버지를 피해 도망하자 미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발티엘이란 사람과 재혼했습니다. 두 번의 결혼 모두 미갈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미갈이 몇 년이나 발티엘과 살았는지, 둘 사이가 어땠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는, 미갈이 발티엘과 헤어질 때 있었던 에피소드가 전부입니다.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된 후에 그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합하기로 이스라엘의 실권자였던 아브넬과 밀약을 맺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과거 자기 아내였던 미갈을 데려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넬은 미갈을 데리러 발티엘의 집으로 갔는데 이때 발티엘은 미갈과 헤어지는 것이 서러워 울면서 바후림까지 미갈을 따라왔다고 했습니다. 아브넬이 겨우 발티엘을 돌려보낸 것을 보면 두 사람 사이가 무척 애틋했던 모양입니다.

다윗이 미갈을 다시 찾은 이유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사울의 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곧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정략적이었습니다. 미갈에 관한 마지막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갈 때 너무 좋아서 거의 벌거벗고 춤을 췄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미갈은 왕의 체통을 버렸다고 핀잔을 줬습니다. 다윗은 그날 이후로 미갈을 찾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미갈은 잊혔습니다.

미갈은 왜 다윗을 비난했을까요? 아무리 왕의 아내이라지만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에 불과했던 시절에 절대 권력자 왕인 남편에게 핀잔을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미련한 짓이었지요. 미갈은 어떤 여자였을까요? 불쌍한 여자요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남편 간에 벌어진 정쟁(政爭)의 피해자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녀를 탁구공처럼 주고받았습니다. 아마 발티엘과 살던 시절이 그녀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와 헤어지기 싫어 먼 길을 따라왔던 남편, 비록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했을지언정 그와 살았던 시간이 진정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행복을 다윗이 깨뜨렸습니다. 다윗은 그녀를 궁전으로 불러들였지만 어차피 정략적인 행위였으므로 그녀에게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있었을 리 없습니다. 그런 다윗에 대해 그녀가 가졌을 미움과 반감은 우리도 능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대놓고 다윗에게 핀잔을 준 것은 이 미움과 반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보면 그녀는 지혜로운 여자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자기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결국 마지막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무대에서 사라간 셈입니다. 미갈은 그런 여자였습니다.




밧세바, 결국 상황에 맞춰 권력을 추구한 여인

다음은 밧세바입니다.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로서 다윗의 수하 장수인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목욕하다가 다윗 왕의 눈에 띠어 왕에게 불려가 그와 동침했습니다. 다윗은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죄를 은폐하려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사지(死地)로 보내 죽게 했습니다. 그 후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됐습니다. 둘 사이의 부정한 관계의 결과로 태어난 아기는 죽고 나중에 그녀는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밧세바 이야기의 독특한 점은 그녀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서 성경이 일언반구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왕에게 불려가 왕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그 결과 임신했고 자기 남편이 죽었고 왕비가 됐습니다. 이런 일들이 어디 보통 일들입니까. 누구나 이런 일을 겪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할 말도 많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합니다. 사무엘하는 밧세바에게서 말을 빼앗았습니다. 미갈이나 다말도 말을 했는데 유독 밧세바만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미갈과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녀는 최고 권력자의 욕심 때문에 충직하고 진실한 남편을 잃고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재혼하여 왕비가 됐습니다. 그녀는 우리야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았을까요? 아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윗의 총애를 받는 데 만족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솔로몬보다 계승서열이 앞섰던 왕자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죽기는 했지만 다윗이 그녀가 낳은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총애하긴 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솔로몬에게 왕위가 저절로 오지 않았습니다. 밧세바가 예언자 나단과 공모하여 자기 아들을 왕좌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녀는 미갈과 다른 운명을 택했습니다. 미갈은 다윗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핀잔을 줌으로써 버림받는 길을 택했던 데 반해 밧세바는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권력의 그늘 아래서 취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취하고 살았던 여자가 바로 밧세바였습니다.




다말, 끝까지 저항한 여인

마지막으로 다윗의 딸이자 압살롬의 동생이며 왕위 계승순위 1위였던 암논의 이복동생인 다말입니다. 그녀는 우연히 이복오빠 암논의 욕정의 대상이 됐습니다. 다말을 노리던 암논은 드디어 그녀를 자기 침실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상대는 이복오빠이자 왕위계승 서열 1위의 왕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말은 암논에게 저항했습니다. 이는 다윗에게 전혀 저항하지 않았던 밧세바와 대조적입니다. 완력으로나 모든 점에서 약자였던 다말은 암논을 당할 수 없게 되자 자기를 아내로 달라고 아버지에게 청하라고 암논에게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암논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암논에게 그녀는 욕정의 대상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암논은 다말을 강제로 욕보인 후 곧 그녀가 싫어져 그녀를 내치려 했습니다. 이에 다말은 다시 한 번 저항했습니다. 만일 자기를 그냥 내쫓는다면 그것은 자기를 욕보인 것보다 더 나쁜 짓이라며 암논을 비난했습니다. 그래도 암논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암논의 집에서 내쫓겼습니다.

다말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밧세바와 달랐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부름을 저항하지 않았지만 다말은 적극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둘 다 무고한 권력의 피해자였지만 밧세바가 자기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거기 적응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스스로 권력을 추구했던 데 반해서 다말은 끝내 저항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암논에게서 쫓겨난 다말이 보여준 행동은 그녀가 보여준 저항 행위의 클라이맥스였습니다. 그녀는 암논의 집에서 쫓겨난 후 시집가지 않은 공주들이 입는 소매 긴 장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려는 의도였습니다. 이는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엄청난 일을 드러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몹시 화를 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누구에게 화를 냈는지 대상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암논에게 화를 냈는지 다말에게 화를 냈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암논에게 화를 냈다면 그가 한 부정한 짓에 대한 분노였고 다말에게 화를 냈다면 그 부끄러운 일을 드러낸 데 대한 분노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다윗은 암논이 사랑하는 자기 맏아들이라 기분상할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사무엘하 13:21). 다말은 암논의 불의를 드러내려 하는데 다윗을 숨기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잊혔습니다.




이 여자들이 아니었더라면

만일 이 여자들이 아니었더라면 다윗 시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는 힘 있는 남자들만 만들어가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공하고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만의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힘 있는 남자들이 만들어간 역사에는 아무런 고통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었다고 생각됐거나 아니면 그런 고통과 어둠은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서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들은 외쳤습니다. 그들이 만든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고! 우리들 얘기도 들어달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이 외침을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듣지 못한 외침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힘 있는 남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만들어나간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역사에는 하나의 목소리만,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줬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만 주역이 아님을 이 여자들은 보여줬습니다. 승자만 하나님 역사의 주역이 아님을 이 여자들은 보여줬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려면 승리의 역사 이면(裏面)에 미갈과 밧세바와 다말이 있음을 봐야 합니다.

다윗이 왕권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세 명의 여자의 이야기를 기억함으로써 그들뿐 아니라 모든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2006년 오늘의 역사의 현장에서 미갈과 밧세바와 다말은 누구인지, 그들은 외치는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