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보상대신 죽음이

오늘부터 4주 동안 사무엘하를 갖고 설교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이 블레셋 군을 상대로 싸운 길보아 전투에서 아들 요나단과 함께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사무엘상 마지막 장(31장)에 기록되어 있고 사무엘하는 이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지는 얘기로 시작됩니다. 이 에피소드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머물고 있던 시글락이란 곳에 옷이 다 찢어지고 머리는 흙투성이인 군인 한 사람이 찾아와 다윗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전사(戰死) 소식을 갖고 찾아온 아말렉 출신의 이스라엘 군인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전쟁터에서 죽어가던 사울이 그에게 숨을 끊어달라고 명령했고 그 군인은 사울의 명령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숨진 사울에게서 왕관과 팔찌를 취해서 다윗에게 가져왔습니다.

이 군인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자 다윗에게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바침으로써 이에 상당하는 보상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왕관과 왕이 차던 팔찌는 왕권의 상징물로서 다윗에게 소중한 물건임에 분명합니다. 이 군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반응은 군인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해질 때까지 단식하며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식을 전한 자에게 “네 놈이 어쩌자고 겁도 없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을 죽였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친 다음 부하를 시켜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군인은 보상은커녕 이렇게 속절없이 죽어갔습니다.

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무엘하 4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번에는 죽은 사람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은 아버지 사울왕의 군대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의 후원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됐지만 실권은 아브넬이 갖고 있었습니다. 이때는 아브넬마저 죽어 그는 기댈 언덕이 없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습니다. 하루는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그의 수하 군인 둘이 몰래 왕궁에 들어가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죽인 다음 그 목을 들고 다윗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을 해치려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목이 여기 있습니다. 야훼께서 오늘 임금님의 원수를 갚으시어 사울 부자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직접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스보셋을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들 역시 다윗에게서 보상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사망 소식을 전했던 군인에게 했던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이란 말 대신 “잠자리에 누워 자고 있던 무고한 사람”이란 표현을 썼다는 점만 다를 뿐, 전에 했던 것과 똑같이 이들도 죽여 버렸습니다. “잠자리에 누워 자고 있던 무고한 사람”이라! 참 묘한 표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왕권을 향한 다윗의 강한 욕망도 봅니다.




추모와 정과 정치적 고려의 공존

다시 앞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사망 소식을 가져온 자를 죽인 다음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지었습니다. 그 노래가 사무엘하 1장 19절 이하에 실려 있습니다.




너 이스라엘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아, 용사들이 쓰어졌구나....

이스라엘의 딸들아, 주홍색 옷을 입혀주고 그 옷에 금장식을 달아주던

사울을 생각하고 통곡을 하여라.

아, 용사들이 싸움터에 쓰러졌구나. 요나단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형은 나를 즐겁게 해주더니.

형의 그 남다른 사랑,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었는데,

아, 용사들은 쓰러지고 무기는 사라졌구나.




다윗은 이 노래를 자기만 부르지 않고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망자에 대한 추모의 의미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1994년에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죽었을 때 온 북한 주민들이 대성통곡했던 장면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 장면은 누가 시켜서 연출할 수 있는 장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슬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정치적인 고려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에게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은 커다란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가를 지어 백성들에게 부르게 한 행위는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장례를 치른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에게 한 행동도 같은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다윗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에게 전갈을 보내 그들이 한 일을 이런 말로 치하(致賀)했습니다. “그대들이 사울의 장례를 치러 충성을 보였으니 야훼께서 복을 내리시기를 바라오. 이제 야훼께서는 그대들에게 틀림없이 은덕을 베풀 것이오. 그대들이 이런 일을 했으니 나도 그대들에게 잘 해 주겠소. 그대들의 상전 사울은 세상을 떠났고 유다 가문은 나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소. 그러니 낙심 말고 힘들을 내시오.” 여기에는 치하의 말과 더불어 사울이 죽었으니 이제 곧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점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때 다윗은 전체 이스라엘이 아니라 유다 지파만의 왕이 된 것입니다. 나머지 열 지파들은 아브넬의 후원을 받아 이스보셋이 왕이 되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아브넬이 스스로 왕이 되지 않고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데서 볼 수 있듯이 비록 실권만 갖고는 이스라엘에서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가 더 필요했는데 ‘백성들의 동의’와 ‘야훼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의 왕권은 불안정했습니다. 아브넬과의 관계 또한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불안하던 둘 사이에 결정적인 균열이 생겼습니다. 아브넬이 선왕 사울의 후궁 한 사람을 범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를 이스보셋이 꾸짖자 아브넬이 “내가 너를 왕으로 세웠는데 하찮은 여자 하나 때문에 나를 꾸중하느냐?”고 발끈했습니다. 아브넬은 ‘하찮은 여자 하나’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왕의 후궁을 차지한다는 것은 곧 왕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야훼께서 다윗에게 다짐해 주신 일이나 이루어야겠소. 이 나라 사울 왕실을 다윗에게 넘겨주는 도리밖에 없소. 단에서 브엘세바에까지 이르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다윗을 왕으로 받드는 수밖에 없소.” 이는 노골적인 협박에 다름 아닙니다.

아브넬은 다윗에게 가서 밀약을 맺자고 제안했습니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점은, 다윗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밀약을 맺으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밀약이라는 꼼수를 통해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두 가지 조건, 곧 ‘백성들의 동의’와 ‘야훼 하나님의 인정’과는 무관한 행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다윗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정말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는가? 그 약속을 충실히 지키려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밀약을 맺는 것이 야훼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라고 보았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는 아브넬의 제안을 들으면서 권력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권력이 거의 자기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철저히 정치공학 (political engineering)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는 아브넬과 밀약을 맺으면서 한 가지 조건만 내걸었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딸이자 과거 자기의 아내였던 미갈을 데리고 오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미갈은 다윗이 무공을 세워 사울 왕에게서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로써 사울의 사위가 되어 왕위 계승권자 반열에 올라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과 등을 지고 쫓기게 되자 사울은 미갈을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버렸습니다. 그 미갈을 다윗은 다시 데려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직 사랑이 남아 있어서였을까요? 그게 아니라 자기가 사울의 뒤를 이을 적법한 왕위 계승자임을 만백성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밀약은 맺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군대사령관인 요압이 아브넬을 죽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보셋도 죽고 아브넬도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왕위 계승권자는 다윗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파의 장로들이 다윗에게 와서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청했고 다윗은 그 요구를 받아들여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한 단락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상이 사무엘하 5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욕망만이 춤추는 무대

이 이야기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봅니까? 저는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인간의 욕망을 봅니다. 적나라한 인간의 욕망 말입니다. ‘역사’라든가 ‘하나님의 약속’이라든가 하는 크고 명분을 갖춘 얘기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로지 벌거벗은 욕망만 춤추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인간의 벌거벗은 욕망이 춤추는 무대입니다.

중국인지 홍콩인지 출신인 한 영화감독은 미리 쓰인 대본을 갖고 영화를 만들지 않고 그날그날 배우들과 상의해서 영화를 찍는다고 합니다. 대강의 줄거리만 입을 맞추고 나머지는 배우가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연기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역사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라는 연극의 연출자는 물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연출자는 웬만해서는 무대에 올라오지 않습니다. 연극이 완전히 난장판이 되지 않는 한 연출자는 무대 뒤에 머물러 있지요. 만일 연출자가 무대 위에 나타난다면 그 연극은 이미 종쳐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은 주, 조연을 불문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까지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재량권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인생과 역사는 이런 연극입니다.

연기자들은 비록 연출자가 무대 위에 없더라도, 연기를 하면서 연출자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늘 그를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연기는 자기 재량껏 하지만 목소리 없는 연출자를 늘 의식하면서 연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극의 결말은 연출자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질 수 있지만 너무 크게 달라진다면 연기를 잘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연출자의 의도와는 어느 정도 달라졌다 해도 연출자가 더 만족하는 연극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사무엘하의 무대에는 다윗, 이스보셋, 아브넬, 요압 등 주연들과 사울의 죽음을 전한 아말렉 군인,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다윗에게 가져온 두 명의 군인 등 조연들이 연기하고 있습니다. 주연과 조연 모두 이 연극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결론지어져야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자기들이 연기하는 이 연극의 연출자가 누구라는 것과 연출자가 의도하는 결말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면 배우들이 연출자의 의도를 아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연출자를 의식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무대 뒤에 있는 연출자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 머리 위에서 춤추고 있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율적인 연기자가 아니라 욕망이라는 줄에 매달려 인형극을 벌이는 인형처럼 보입니다. 지금 연극을 이끌고 가는 힘은 연출자의 의도가 아니라 배우들의 욕망입니다.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이 연극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출자는 무대 위로 올라오지 못합니다. 다만 지켜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욕망은 연기자들 머리 위에서 마음껏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 연극은 과연 어디로 갈까요?

욕망은 창조적인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욕망을 억압하면 창조적인 에너지가 나올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는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창조적인 에너지까지 압살하고 말았고 그래서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욕망은 브레이크가 망가진 기관차처럼 멈출 줄 모릅니다. 가난했을 때 가졌던 소박한 꿈을 부자가 된 다음에도 그대로 간직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사회는 끊임없이 욕망을 부채질해서 소비하라고 부추기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이 욕망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무엘하는 이 욕망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포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욕망이 인간을 어떻게 만드는지,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하를 읽으면서 이런 점들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설교는 다음주일에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