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 (대흥교회)

오늘도 계속해서 룻기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4장으로 된 짧은 책인 룻기에서는 엘리멜렉이라는 한 가정을 소개합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게 되자, 잘 먹겠다고 모압 땅으로 이민 갔던 엘리멜렉의 가정은 엘리멜렉과 그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게 되자 3 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나오미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고, 돌아가기에 앞서 과부가 된 두 자부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을 그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습니다. 결국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갔고, 룻은 어머니와 어머니 백성과 어머니의 하나님과 함께 하겠다고 결심하고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훗날 룻은 이방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그 이름이 오르는 유일한 이방여인이 됩니다. 룻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별 볼일 없던 룻이라는 이방 여인, 먹고 살기 급급한 여인을 어떠한 방법으로 축복 하시는가?를 말씀합니다.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선택을 통해서 축복하십니다. 새신랑을 찾아 떠난 오르바에 비해서 모압 여인 룻의 선택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을 택하고 어머니를 택한 룻을 축복하셨습니다. 선택하는 순간은 손해 보는 것 같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을 택하고 신앙을 택한 그 모습을 통해서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이상 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눈앞에 소돔과 고모라처럼 기름진 땅이 있을지라도 육신의 안목에 넘어가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택하고 신앙의 신실함을 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선택을 통해서 축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통해서 축복하심을 보여줍니다. 룻이 이삭줍기를 위해서 밭에 나갔는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일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룻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놀라운 축복의 계획 속에 아름다운 만남을 이루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축복을 이루어가십니다. (1) 아무리 작은 자,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룻과 같이 겸손한 만남이 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2) 보아스와 종들의 만남같이 서로 축복하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 아도나이 임마헴(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 여바레흐아 아도나이(여호와께서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룻기 3장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는 열정과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을 알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에게 명하기를 보아스가 잠자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자는 것을 알고, 룻은 보아스 에게 가서 “기업 무를 자”의 축복을 청원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내용을 세속적으로만 생각하면, 한 여인이 한 밤중에 남자를 찾아가 육체적 관계를 요구했고, 그 남자는 거절했고……. 이렇게만 보여질 수 있기 때문에 참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룻을 어떻게 축복하여 주시는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룻과 나오미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만약에 보아스가 그 일로 말미암아 “이방 여인이……. 행실이 형편없고, 음탕하고…….”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면 베들레헴에서 정말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것을 두려워할 것 없었습니다. 마음이 그렇지 않으면 도전하는 겁니다.
열정과 도전을 통해서 하나님은 성도를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도전이라는 것은 사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대학 입학시험 10:1, 취직 시험 60:1, 9급 공무원도 수십 대 일, 5수6수가 생기고, 교사 임용시험 300:1……. 도전해서 성공할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문제는 1%의 가능성을 보고 뚫고 나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분은 99%의 가능성이 있는데도 불가능한 1%만 보고 한숨짓고 도전조차도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능성 때문에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100%를 넘어선 200%의 축복을 체험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도전하는 열정을 가질 때에 놀라운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열정과 도전으로 축복을 이루어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열정으로 도전하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축복은 결코 감나무 아래서 입 벌리고 있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땀을 흘리고 감나무를 키우고 감을 따는 자를 통해서 축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결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복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 룻에게 명령한 것은 타작마당에서 보아스가 누울 때에 그에게로 들어가서 거기 누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4절에서 나머지는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고 했습니다.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에, 나오미와 룻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그날 밤에 보아스가 룻을 보고 “내가 네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 그러지를 않았고, 룻을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계기로 ,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게 됩니다. 믿는 자의 도전은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은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그래서 아무런 도전도 열정도 다 잃고 그냥 주저 앉아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냥 주저앉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역사에도 은혜 받은 사람이 그냥 주저앉은 사람은 없습니다. 변화산상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너무 행복해서 “이 자리가 좋사오니, 여기 초막을 짓고 여기에 머무릅시다…….” 그랬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결코 허락하지 않고 세상에 내려가도록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도전입니다. 한 달란트의 안일함!!!
성경에서 말씀하는 축복은 그냥 굴러오는 것이 아니라, 땀 흘려 찾고 캐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값진 진주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값진 진주 하나를 얻기 위해서 기꺼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다 팔아야만 가질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그 아비가 할 수 있거든 내 아이를 고쳐달라고 할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9:23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실패와 창피한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는 열정 속에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서는 500여 번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성공은 수백 번 수천 번의 실패를 해도 도전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다른 말로 도전적인 신앙입니다. 안일한 정통주의자가 아니라, 부단히 성경 말씀으로 개혁을 이루어가는 도전적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Reinfold Nieheber의 기도처럼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구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현실은 용감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도전이 없는 신앙은 변화도 없고 , 승리도 축복도 없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가 위대한 도전자들이었습니다. 소년 다윗은 물맷돌과 막대기를 들고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향하여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선포했습니다. 모두가 부딪혀 보지도 않고 두려움과 절망의 반응을 보일 때에, 다윗만은 믿음으로 도전했습니다. 마르틴루터는 교황과 전체의 부패되어진 교회를 향하여 개혁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바위에 계란던지기라고 비유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받을지라도, 여호와의 만왕의 왕 되심을 믿고 썩어진 부분들을 향하여 도전하였을 때에, 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앙의 삶은 끊임없는 개혁의 삶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의 교회 생활을 보면, 정말 눈치, 창피, 누구 말 때문에 포기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분명히 아름다운 봉사인 것을 알면서도 실패를 두려워하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축복도 기적도 없습니다. 젊은 두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될 때에, 갑자기 제 3의 인물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고 할 때에, 그 관계를 우리는 삼각관계라고 말합니다. 삼각관계가 될 때에, 나타나는 반응은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로, 두려워하면서, 저 사람은 나보다 배운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고, 더 잘생겼고, 키도 크고……. 그런 사람은 절망과 두려움과 포기일 뿐입니다. 겨우 만나서, 의심의 눈초리로 그 사람 언제 만났느냐? 혹시 좋아하는 것 아니냐? (수염 기르고, 밥도 안 먹고…….) 둘째의 반응은, 네가 감히 우리 사이를……. 할 테면 해보라. 더 용기를 가지고 더 적극적인 모습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속에서 주어지는 장애물들과 부딪히는 현실과 신앙의 싸움에서 두려워하지 마시고, 담대하게 도전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2. 주님 만날 장소로 성결한 모습으로 나아가라 - 주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 핵심

룻이 축복을 받는 열정의 가장 큰 핵심은 보아스를 만날 만한 장소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보아스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나오미는 룻에게 명하기를 3절에서 “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참 지혜롭습니다. 두 가지를 명령하는 것인데 (1)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서 가라는 것이고 (2) 성결한 모습, 향기로운 모습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땀 냄새나고 더러워진 옷을 입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결하고 깨끗하고 향수를 뿌리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성도가 축복을 누리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 계실만한 곳으로 나아가되 깨끗한 성도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담판을 지으라는 뜻입니다.
(1) 복 받기 원하시면 주님을 만날 만한 장소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갔던 장소가 속죄소 이었으며, 회막문 이었습니다. 출25:22 -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주님 가시는 길목에 나아가서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주님을 만날 수 없었지만, 유일하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삶이 축복의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자식을 못나서 고통스러울 때에, 성전을 찾았습니까? 거기가 주님을 만나기 가장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났고, 위대한 아들 사무엘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현실과 분위가 영 아닌 곳에서 주님을 만나기란 참으로 힘듭니다. 축복을 사모하시면, 주님을 만날만한 곳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어떤 장소 (Local)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을 만날만한 상태를 이루어가야 거기에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사야55:1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지치고 힘든 영혼들을 풍성한 곳으로 초청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3절 “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6-7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누가복음15장에서 예수님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멀리 가서 탕진한 둘째 아들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배를 채우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둘째 아들의 축복은 누가복음 15:20에서부터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미국의 바쁜 이민생활 속에서 혹시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나 안정을 의지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열심이었는데, 지금은 먹고 살기에 바빠서 헌신하지 못하십니까? 아무리 아버지의 집에서 멀어졌어도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가기 원하시면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제일 먼저 아버지 집을 가까이 하십시오. 자주 교회를 오세요. 주님 만날만한 봉사와 예배와 헌신의 자리를 찾는 것부터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2) 또한, 정결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룻이 예뻤다고 할지라도 땀 냄새 팍팍 풍기고 빗지 않은 머리에, 흙 묻은 작업복으로 나타났다고 할 때에, 여러분이 보아스 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오미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목욕은 씻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축복된 날이 되시기 원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 예배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화목을 의미합니다. 기름을 치지 않은 모습은 부딪히고 소리 나는 빡빡한 모습이지만, 기름을 치면 부드러워집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제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미움과 용서치 못한 마음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의복을 입으라는 것은 성도가 입어야 할 성결의 옷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버리고 의와 성결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3. 은혜를 사모하라 - 그 발치 이불을 들고. 덮으소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된 룻의 아름다운 모습은 간절히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보아스에게 가까이 간 룻은 이렇게 청원합니다.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 이다” 옷자락으로 덮는다는 의미는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의 최대한의 표현입니다. 룻기를 보면, 옷 덮어주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춥다 고해도 옷을 잘못 벗어 주었다가는 책임지소……. 그러면, 성경적으로 큰일 나는 겁니다. 아무리 춥다고 해도, 집에 들어가라……. 그래야지, 옷을 덮어주는 것은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결혼해야할 청년 중에 혹시 맘에 드는데, 춥다고 했는데 옷을 덮어주었다……. 그러면 제게 말씀하세요. 제가 책임을 추궁할 테니까…….
룻기에 보면, 강조되어있는 것이 “기업 무를 자”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이 고엘 제도입니다. 가정마다 땅을 기업으로 주었는데, 그 땅의 경영권을 남자에게만 주었습니다. 이 땅은 팔아먹을 수도 없었고, 여자로서는 농사를 짓는다는 것을 감당키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엘리멜렉의 집안처럼 남자가 다 죽었을 때에는 고엘 제도 법에 의해 유지하게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족이 자식을 낳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가정을 돌보아야 하며, 그 기업의 땅을 잘 경영해주어서 훗날 그 집안에 남자가 장성하면 다 돌려주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룻기를 잘 보면, 고엘 제도보다 더 핵심적으로 강조된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헤세드 라는 단어입니다. 인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아니면 룻기는 아무것도 그 스토리가 진행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축복된 삶을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레미야29:13절 “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 시 70:4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 시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은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에도, 예배 때에도, 봉사와 헌신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미련하고 욕심 많은 부모라도 자식이 달라고 하면 떡도 주고 다 주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말씀을 들으며, 읽으신다면 어떤 은혜도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오늘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는지 기대하는 하루가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실 때에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룻은 모압 땅의 한 이방여인입니다. 남편도 없고 기업 무를만한 비전도 없고, 시어미 나오미와 함께 하루하루 이삭줍기를 통해서 살아가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열정과 도전은 엄청난 축복으로 그 삶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우리 대흥 모든 식구들이 결코 안일함에 빠지지 말고, 주와 함께 열정적인 도전하는 신앙으로 우리의 삶을 축복으로 바꾸어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