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 (대흥장로교회)

축복의 통로(1)- 선택 (룻1:15-18) 2007.4.15 대흥 1부

인생의 성공은 세 가지 차원으로 말을 합니다.
첫째는 목적에서의 성공입니다. 바른 목표가 설정되었으면 그 사람은 가는 것만큼 성공입니다. 아무리 땀 흘려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실패한 인생은 목적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이 없거나, 삶의 목적이 그릇된 삶은 아무리 땀 흘려 노력해도 헛된 실패뿐입니다.
둘째는 과정의 성공입니다. 목표가 분명하면 과정의 바른 길을 통해서 성공적인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과정 속에는 고난의 시간도 있고, 역경의 시간도 있지만, 넘어가는 과정 자체가 후회 없는 과정이었다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미국에서 참 존경스러운 것은 대를 이어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큰 바위얼굴 사우스 다코타에 있는 것은 한사람이 이룬 업적이 아니라, 대를 이어서 이룬 업적입니다. 다 끝내야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목적을 향하여 아름다운 바통을 넘긴 사람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세 번째는 결과의 성공입니다. 바른 목적, 바른 과정을 통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얻어진다면 결론적인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온 룻은 목적에서 또, 과정에서 아름다운 성공과 승리를 이루었음을 보여줍니다.
룻기는 전체 4장, 85절로 이루어졌습니다. 1:1의 시작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고 말씀이 시작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매우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사사기를 보시면, 사사들은 빤짝 태평성대를 이루다가 또 실족하고 타락하고 고통 속에서 회개하고 사사를 보내어 회복시키면 또 실족하고 타락하고 고통 속에서 또 회개하고……. 이러한 삶의 반복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하여 그의 뜻을 전달하시기 위해 직접적인 간섭을 하심으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흉년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엘리멜렉이라는 한 유대인의 가정이 소개됩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 사람으로서 흉년의 기근을 피해 모압땅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흉년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 뜻을 전달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아비멜렉은 자기의 지식과 방법으로 피하려고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모압 땅에서 살다가 엘리멜렉이 죽었고, 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두 죽었습니다. 엘리멜렉의 집에는 졸지에 그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의 자부 오르바와 룻, 이렇게 세 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기름진 풍성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재 이민하기로 하고, 이제 두 과부가 된 자부를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돌아가기 원했습니다. 모압 여인 두 자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권하고, 나아가 강권합니다.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다던 두 자부 오르바와 룻은 각자 그 길을 다르게 선택합니다. 오르바는 시어미의 말씀대로 고향 모압으로 돌아가서 새 출발하기를 원하였고, 룻은 목숨을 걸고 결코 어머니를 버리지 아니하고 ,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리라…….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룻기 말씀을 통한 전체적인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은 “혼돈스럽고 불안정한 시대에 너무도 보잘것없지만, 룻의 아주 작은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혼돈스러운 여건이라도 하나님은 룻의 아름다운 모습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룻은 훗날 구속사의 절정인 다윗의 계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오는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정말 목회자도 축복하고 싶은 아름다운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마침내 아름다운 축복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봅니다.
룻기 1장에서 가장 대조적으로 말씀하는 것은 “선택”입니다. 흉년의 기근 속에서 엘리멜렉이 선택한 것과 혼자 남은 나오미의 돌아오는 길을 선택한 나오미의 선택 / 두 과부이며 동서인 오르바와 룻의 선택은 대조적으로 보여 집니다. 기근 들었던 예루살렘과 풍성했던 모압 땅, 불과 10여년 만에 뒤바뀌어서 풍성한 예루살렘과 모두를 잃어버린 모압 땅이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축복을 받을 만한 아름다운 룻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도 향기롭고 성공적인 삶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행복과 불행은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1-5)

엘리멜렉에게도 행복과 불행은 결코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니고, 두 자부 오르바와 룻에게도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이 결코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 땅에 기근을 주셨습니다. 그 기근은 그냥 고통 겪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자기의 방법과 수단을 통해서 기근을 이겨보려고, 예루살렘을 버리고 모압을 선택하였습니다. 불행과 고난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빨리 벗어날 것인가? 내가 해결하기 보다는 “ 고난 속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무엇인가?”를 찾는 길이 행복한 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시편 37:1-2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행악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엘리멜렉은 또한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모압 여인들과 결혼시켰습니다. 훨씬 편안하고 안정을 취하려면 당연한 방법이었습니다. 멀리서 유대인 며느리를 데려오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모압 땅에서 모압 여인하고 결혼하여 빨리 적응하는 것이 훨씬 행복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율법을 범한 행위였습니다. 신명기7:3 “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결국은 두 아들을 잃어버리는 불행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참된 안식과 행복은 우리의 잔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 보이고 풍성하게 보여도 아비멜렉은 불과 10년이 못되어서 자신도 죽었고, 모든 것을 잃었고,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불행과 행복은 굉장히 멀리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너무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도 그 코앞에 불행이 있고, 불행하게 보이는 사람도 그 코앞에 행복이 있습니다. 욥과 같은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도 당대의 최고의 부자의 자리에서 모든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온 몸에 병으로 고통을 겪는 것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또한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때에 하루아침에 모든 고통과 불행이 엄청난 행복과 축복으로 이어지는 변화를 체험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으로 미디안의 노예가 되고,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그 아내의 계략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옥중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꿈을 해몽하는 한 사건으로 그는 일약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에는 운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의 변함없는 중심으로 보시고 최고의 행복한 자리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도 불과 3일만의 사건입니다. 가장 추한 죄인을 대신하여 낮고 천한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몸이 깨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불과 3일 만에 그는 왕의 왕으로 , 부활의 첫 열매로 변화되신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한국에서 어떤 교회의 장로님이 장관이 되셨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목사님이 그분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데요. 장로님, 축하를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1) 장관 목숨 파리 목숨인데 언제 그만둘지 모르니까요……. (2) 날마다 터지는 일들이 심상치 않기 때문에 모든 오물 다 뒤집어 쓰실까봐……. (3) 그만두고 나면 그 다음엔 할 것이 없는 영원한 실업자가 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풍성하게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 땅에 목숨을 거는 것은 헛된 불행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불행과 고통이 행복으로 바뀌는 것은 멀지 않습니다. 또, 우리의 행복이 하루아침에 고통으로 바뀌는 것도 멀지 않습니다. 말씀과 신앙을 택하는 것이 때로는 좀 어리석고,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말씀 안에 우리의 변함없는 행복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고난 속에서 이룬 행복 (6-10절)

사람들은 고난이 닥치게 되면, 당황하게 되고, 자기 힘으로 벗어나 보려고 애를 쓰다가 안 되면, 스스로 자포자기 합니다. 그러나 본문 룻기1장 6-10절까지를 보면, 어떻게 고난들이 행복을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해 줍니다. 6절에 보면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라고 말씀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자기 백성을 권고하시는 일”입니다. 권고라는 말은 “ 방문하다, 순시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근 중에 고통당하는 자기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1) 고통과 고난의 해결책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의 문제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주실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찾아 오셨을 때에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되었습니다. 어느 백부장은 찾아오시면 해결될 줄로 믿는데, 바쁘신데 오실 것까지 없습니다. 그저 명령만 하옵소서! 그러면 하인이 낫겠나이다…….라고 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의 해결은 주님이 찾아주시면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우리가 주님을 찾으면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더 큰 발걸음으로 찾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시편 42:1-2에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 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갈급함으로 주님을 찾으며 주를 앙망하는 자는 주께서 찾아주시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축복으로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고통은 결코 모든 것이 죄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가까이 하시기 원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감기 걸리면 열이 나고, 목이 아프고, 기침이 나오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것이 없으면 쉬지 못하고 그렇게 나가다간 죽음까지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전서4:1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라” ( 현대어 성경에 보면, 죄에 대해서 죽으려면 고통이 불가피함을 알아야 합니다 ) 고통은 더욱 우리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와줍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2) 고난을 행복으로 바꾸었던 인물이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고난 중에서 자신의 욕심을 구하지 아니하고 두 자부의 행복한 삶을 우선적으로 걱정해 주었습니다. 나오미가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젊은 두 자부를 데리고 가야 조금이라도 심신이 편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고난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보다는 작은 사랑으로 두 자부에게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8절에 보면 “죽은 자와 같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절에 “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선대함과 평안함을 진심으로 간구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자신의 육체적 고난보다 , 자기를 잃어버리고 초조하고 불안해 할 제자들을 먼저 걱정하셔서, 겟세마네에서 그들을 위한 기도가 우선이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 남은 기름과 밀가루를 의지하지 말고, 사렙다 과부처럼 다른 사람을 오히려 축복하고 베풀고, 여호와만 의지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의 길로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렵고 힘든 고난을 행복으로 바꾸시기 원하시면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에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 베풀고 더욱 나눕시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 되도다고 말씀합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줍시다. 줄 것이 없으면 기도하여 주고 축복하여 주고……. 고난을 행복으로 바꾸는 모범을 나오미는 이렇게 보여주었습니다.


3. 결단과 선택이 이룬 행복 (11-18)

마지막으로 나눌 말씀은, 참된 행복의 핵심적인 인물은 룻이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두 자부 오르바와 룻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도록 권하고 축복까지 해주었습니다. 두 자부에게 떠나도록 권했을 때에 오르바와 룻은 “소리를 높여 울며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나오미가 간청할 때에, 오르바는 입을 맞추고 떠났습니다. 이제 룻에게 더욱 강력하게 권할 때에 룻은 목숨을 걸고 어머니를 따를 것을 결단합니다. 그리고 16-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자신의 결단을 고백함으로, 나오미가 할 수 없이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룻기를 보시면, 룻의 위대한 축복의 시작, 이스라엘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당당히 오르게 되는 축복의 시작을 알리는 부분이 바로 룻의 결단과 선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버려야 할 것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 믿음이고, 붙들어야 할 것을 강하게 붙들 수 있는 결단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연륜과 지식으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삶은 날마다 결단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확고히 붙들어야 할 것을 머뭇거리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룻은 새로 모압 땅에서 새 가정을 이루고 새 남편과 살아가는 것이 육체적인 행복이 될 수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없는 땅에서 결코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축복은 우리 마음의 결단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시 108: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시 119:106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님을 택하고 믿음의 길을 선택할 때에 참된 행복의 길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자 이삭을 드리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선택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 다음날 일찍 그를 데리고 모리야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중국 고사 성어 가운데 “동가식서가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뜻은 동쪽 집에서 식사를 하고 서쪽 집에서 잠을 잔다는 뜻입니다. 과년한 딸을 둔 아버지가 있었는데, 딸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버지는 늘 고민이 되었습니다. 빨리 저 딸이 출가해야 마음이 편할 텐데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어느 날 두 군데서 동시에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두 집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두 집은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서쪽 집의 신랑은 힘이 장사고 건강이 좋은데 집이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또한 동쪽 집의 신랑은 돈은 많은데 신랑이 늘 골골해서 병치레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해답이 없었던 아버지는 고민 끝에 딸을 불러 물었습니다. “너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니?” 딸은 웃으면서 “ 잠은 건강한 신랑이 있는 서쪽 집에 가서 자고요 먹는 것은 부잣집인 동쪽 집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둘 다를 택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일생에 정말 중요한 선택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첫째는 직업 선택일 것입니다. 그것이 학교를 과를 결정하고 일생을 좌우합니다. 이것이 잘못 선택하면 평생 이거했다가 저거 했다가……. 어떤 분은 미국에 유학 와서 과를 6번이나 바꾼 분도 보았습니다. 둘째 중요한 것은 배우자 선택일 것입니다. 정말 좋은 사람 만나 야해요. 잘 못 선택하면 평생 고생합니다.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하다는 이 선택들은 잠시 후면, 아마 60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가지 선택만은 영원토록 유효하고, 정말 중요한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택할래? 세상의 부귀영화를 택할래? 고민하지 맙시다. 다른 것은 다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택하면 영원합니다.
축복을 받을만한 아름다운 모습은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선택하여 축복될 만한 성도님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