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음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시23:5)



릭 워렌




오늘은 상처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시기를 원하시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가 불안전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상처를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사고를 상처받는 분야는 사람들을 통하여 옵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인간관계가 우리에게 제일 큰 상처를 안겨 줍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큰 축복과 기쁨도 또한 인간 관계에서 옵니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줍니다. 때로는 고의로 또는 알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줍니다. 문제는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에 대부분의 경우는 잘못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해결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잘못 반응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뒤죽박죽이 됩니다. 잘못 반응하게 되면 우리의 삶에 문제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Ⅰ. 상처를 받을 때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



1.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을 받을 때에 Clint Eastwood(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참는 것입니다. 총알을 입으로 씹는 것입니다.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면서 그런 문제들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상처를 받을 때에 마치 그런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방법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완전히 부인함 나는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상처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정말로 느끼는 바를 부인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에 상처를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2)상처를 최소한도로 줄임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상처를 많이 받은 것은 아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대응책을 세우는 것을 연기합니다. 자신이 감추려고 애쓰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문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더 악화될 때도 있습니다.



(시39:2)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시39:3)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연기하게 되면 사소한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상황이 더 나빠집니다. 점점 더 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즉각적으로 자르지 않으면 상처는 더욱 커지고 더 많이 퍼지게 됩니다.



2.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Don Knotts(돈 낯츠)방법으로 시도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으면 도망갑니다. 피합니다. 뒤로 물러갑니다. 문제로부터 도망갑니다. 아무것도 직면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다윗도 이런 방법을 취할 때가 있었습니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 (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시55:6-8)



상처를 받으면 피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직면하게 되면 도망가고자 합니다. 모든 건물의 문들이 밖으로 열리게 되어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겁에 질리게 되면 도망갑니다. 우리들은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합니다. 도망가는 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화, 텔레비전, 술, 마약,이혼, 디즈니랜드 등 여러 가지로 시도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들을 시도해도 이런 것들을 다한 후에도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고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들을 시도할 때는 다 해결된 것 같아도 그런 활동이 끝나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달라진 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3.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때에 도망가거나 무시하지는 않으나 숨기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간직을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를 않습니다. 가면을 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데에 있어서 아주 전문가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즐거운 미소를 얼굴에 띄우나 마음 속은 아주 크게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때로는 속이는 게임을 합니다. 누가 “당신 무엇 잘못돤 것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어 본다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에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화가 날 때에는 인정하나 상처를 받을 때에는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가장을 합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을 좋은 물질로 감춥니다. 좋은 차를 사고 멋있는 집에 살며 주위에 좋은 물건들이 넘치게 합니다. 그들은 상처를 받으면 물건을 사러 쇼핑을 갑니다. 소유물이 결코 상처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상처를 받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소유물들이 우리의 상처를 싸 메지는 못합니다.



(시3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상처를 감추는 것은 오히려 더 상처를 갖게 할 뿐입니다. 즉 상처를 더 악화시킵니다.

본 교회에서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정직하게 아픔을 나누며 서로를 세워 주는 데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 받음 없이 자신의 문제를 정직하게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 주며 사랑하는 교회가 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교회는 마음 놓고 자신의 상처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나눌 수 있을 때에 치유함이 따라 옵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문제와 상처를 받고 사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더욱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자신의 상처를 숨긴다면 함께 나누는 위로과 치유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치유함의 시작입니다. 상처를 나눌 때에 그 상처를 극복하는 첫 과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를 자신의 마음속에만 간직하며 숨기고 있는 한, 치유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상처들을 지금도 안고 있습니다. 계속 숨기고 있는 한 결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처를 제일 잘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소규모 그룹입니다. 그래서 구역성경 공부에 참가하는 것이 아주 필요합니다.



누구나 상처받은 분야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누구나 상처받은 분야가 있습니다. 나만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상처받은 분야를 나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자기 자신만이 이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서 자신이 상처받은 분야를 나눌 수만 있다면 상처를 치유 받아 안정감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상처를 무시하거나 회피하거나 감추면서 치유함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4.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란 다스릴 수 없는 것들을 다스리려고 할 때에 옵니다.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것들을 다스라고자 함으로써 염려를 하게 됩니다. 염려란 내가 하나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역할을 하려고 하면 더욱 더 불행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이 아닌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 가지고서는 세상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욥 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염려는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합니다. 상처를 결코 고치지 못합니다. 염려가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고통을 더 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번 염려하는 것은 매번 해가 되는 비디오를 다시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염려는 문제를 더 과장되게 되고 더 크게 만들뿐입니다. 우리 마음에 생각할 때 문제는 더 커지는 것입니다. 염려를 더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커지는 것입니다.



5.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면 우리는 화를 냅니다. 우리는 쓴 마음을 품게 되고 화를 내며 비웃는 사람이 됩니다. 마음 문을 닫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욥18:4)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우리가 다른 데서 받는 어떤 상처보다도 마음 속에 쓴 마음을 품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 줍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강간, 배척, 희롱이나 악을 행하는 등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것들보다 우리에게 더 상처를 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쓴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쓴 마음은 우리를 죽이는 독소입니다. 우리를 안에서부터 잡아 죽입니다.



분노가 하는 일이 바로 상처가 우리 마음 속 깊이 박히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받아들여 계속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더 길게 지속시킵니다. 그것을 생각하며 화를 낼 때마다 고통을 연장하는 것입니다. 쓴 마음은 과거로 하여금 우리의 현재를 지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쓴 마음은 과거에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이 아직도 계속해서 현재의 우리를 괴롭히게 하는 것입니다. 위의 다섯 가지 방법이 상처받음을 돕지 못한다면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시편 23편 5절을 보면 장면이 들에서 잔치상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잔치상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돕도록 하신 우리가 해야 될 세 가지 단계를 말해 줍니다.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상처를 받았을 때에 치유함을 받는 비결입니다.



1.주님께서 해결하시도록 맡깁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복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도록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23:5상)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양은 이리, 늑대, 곰, 뱀과 이 등을 포함해서 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은 전혀 방비가 없는 동물입니다.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신을 방어하지 못합니다. 날카로운 이도 없어서 적을 깨물 수도 없습니다. 발톱도 없습니다. 걷어차지도 못합니다. 빨리 뛰지도 못합니다. 가장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동물입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모릅니다. 누가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면 전혀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상처 주는 사람들을 다스리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롬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 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은 누가 내게 상처를 줬는지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상처받는 것을 보셨으며 또 나를 돌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말씀해 줍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으며 심판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도 문제를 해결하실 수있는 지원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상처를 복수하려고 하는 한은 그 상처로부터 치유받을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자원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상처를 복수하려고 하는 한은 그 상처로부터 치유받을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 맡길 것인가, 아니면 내가 복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날은 복수하는 것이 아주 빈번합니다. 복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항상 다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계속 내가 상처를 받게 합니다. 내가 상처를 받아 복수를 할 때는 고통을 더 크게 할뿐입니다. 고통을 제거하지 않고 확대합니다. 상처로부터 치유함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용서란 “내게 상처를 줘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당신이 한 것은 나쁜 짓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란 내가 상처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이 세상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악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내가 상처받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으며 복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도록 하십시오. 복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왜 내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⑵ 화를 내는 것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⑶ 내 자신이 앞으로 많은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조건하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십니다. 내가 베풀어 준 것을 다시 받는 것입니다.



복수하려고 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나는 더 오랫동안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2. 주님께서 내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시 23:5하)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목자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상처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치료하기 위함입니다. 양에게 가장 큰 적은 파리입니다. 양들은 발굽이나 꼬리로 파리를 털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파리들은 양들의 코에 앉아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애벌레들은 양을 미치게 만듭니다. 여름에 어떤 때는 양들이 그들의 머리를 돌에 박는 것을 봅니다. 파리들 때문에 미칠 지경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양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작은 것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목자가 하는 일은 기름과 유황을 섞어 양의 머리에 발라 주는 것입니다. 즉 곤충들을 쫓아내는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목자가 양에게 “네가 자극 받는 것을 돌보아 주겠다” 말한 것이 실행된 것입니다. 양들을 자극하는 것을 돌봐 준 것입니다. 기름은 또한 고약으로 사용됩니다. 양들이 상처가 날 때에 목자는 기름을 고약으로 사용합니다. 상처를 보호하며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다윗이 “내게 기름으로 바르셨으니”라는 말을 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위와 똑같이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에 예수님께는 우리 삶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해주십니다.



(시 147: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예수님께서 “내게로 와서 네 상처를 맡기면 문제를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너를 회복시켜 주겠다. 상처를 치료해 주며 네 영을 소생시키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 주면 우리의 모든 고통이 사라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용서해 준 후에도 여전히 상처를 받습니다. 용서는 즉시 되지만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용서해 주는 것은 즉시로 되지만 회복하는 데는 우리가 받은 상처의 정도에 따라서 몇 주나 몇 달, 때에 따라서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조그만 상처가 나면 붕대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혼이나 부모로부터 배척함을 받거나 희롱을 당하는 것과 같은 삶의 깊은 상처를 입게 되면, 이런 것들은 쉽게 치유함을 받지 못합니다. 깊은 상처는 붕대로 싸서 보호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일단 상처받은 것을 용서해 주면 즉시 치유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복하는 첫 단계인 용서를 해 준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고치는 일이 시작됩니다.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어떻게 고치십니까?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에 예수님께서 무슨 붕대를 사용하여 우리의 감정을 치유해 주십니까?



(1) 주님께서는 교제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상처를 다른 성도들과 나눌 수 있을 때에 감정적 지원을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에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예수님을 믿는 친구와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을 고립시키지 마십시오. 지원 그룹이 필요합니다.



(2) 주님께서는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는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않으면 자신의 몸에 손상을 끼치게 됩니다.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짐을 내려 놓으십시오. 다윗은 시편에서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하나니께 다 내어 놓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3) 주님께서는 예배를 사용하십니다.



찬양을 할 때 고침이 따라 옵니다. 마음이 상심될 때에 교회에 오셔서 찬양이 시작될 때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예배를 통하여 감정적인 치유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과 말씀을 사용해서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고쳐 주십니다.



(4) 주님께서는 사역을 사용하십니다.



다른 상처받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상처를 고쳐줍니다. 상처받은 다른 사람을 도울 때에 우리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고 재생시키는 모임에서 우리들이 겪은 바를 나눕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에 우리가 고침을 받습니다. 교회는 상처받는 사람들이 모인 병원과도 같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친교, 기도, 예배, 그리고 봉사를 합니다.



지금 크게 상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두 가지 일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1) 고침은 두 단계로 일어납니다.



육체적인 고침이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겠지만 감정적인 고침도 필요합니다. 뼈를 부러트려 수술을 하고난 후에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에 치유하는 단계가 항상 두 단계입니다.

첫 번째는 조용히 있는 단계입니다. 수술 후에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카스트를 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카스트를 제거하고 손을 움직여 보라고 합니다. 이것이 둘째번 단계입니다. 움직이는 단계입니다. 이런 것을 돕기 위해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요법사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요법사들에 대하여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하라고 명령하며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침을 받고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압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조용히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일을 하라고 도전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사역을 시작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나가서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는 결코 치유함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조용히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조용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너무나 조용히 있는 단계에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정적인 치유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나가서 사역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하게 됩니다.



(2) 우리가 완전히 고침을 받은 후에도 상처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상처를 받은 후에는 항상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상처가 남아 있을 때에 우리가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상처를 계속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상처를 볼 때마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기억할 수도 있고 상처를 고쳐주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상처를 고쳐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를 원합니다. 상처를 보시고 고쳐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패배한 것과 실패한 것들, 즉 이혼이나 상처받은 것들을 생각할 때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최고 대상이라는 것들을 기억하십시오. 상처 대신에 고쳐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3. 주님께서 내 필요를 충족시키게 합니다.



(시23:5하)...내 잔이 넘치나이다



성경에서는 잔이 넘치는 것을 완전히 만족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채워져서 만족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중동 지방은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할 때는 물이나 술을 낭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막에서는 물이나 술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있지 않으면 낭비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상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을 사람들이 채워 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사람도 우리에게 절대적인 삶의 안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람도 우리가 필요한 모든 사랑을 다 줄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람도 우리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어느 사람이 그렇게 해 줄 것을 기대한다면 아주 철저하게 실망할 뿐만 아니라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다른 사람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도록 의도하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필요를 다른 사람들이 채워주기를 기대하면 그들이 채워줄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분노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하루 24시간 동안 조건없이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루 24시간 동안 안정감을 줄 수도 없습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필요를 다 채워 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부족하거나 모자라서 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잔이 넘치게 됩니다.

무엇으로 넘치게 됩니까?



(1) 소망으로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 사랑으로



(살전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3)기쁨으로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다른 사람의 집에 갈 때에 얼마나 오래 동안 머물러 있다가 떠나야 할까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집에 올 때에 언제 가라고 말할지를 모른적들이 있으십니까? 중동에 한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잔을 채우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의 집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막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서로 돌봐 줍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막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서로 돌봐 줍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잔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손님이 잔을 마십니다. 다시 채워줍니다. 주인이 계속 잔을 채워 주는 한 머물러도 좋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집에 갔을 때에 서너 잔을 채워준 후에 더 이상 채워주지 않아 잔이 비었을 때는 떠나야 할 시간이 왔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주인이 손님을 너무 좋아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기를 원하면 계속 잔을 채워줍니다. 잔을 가득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넘치도록 따라 줍니다. 사막에서는 물이나 술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잔이 넘쳐 흐르도록 따라 주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한 계속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당신이 특별한 손님임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 주겠다”라고 말하실 때는 내가 하나님께 아주 중요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큰 상처를 주어 마음이 상할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잔치에 초대를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원수 앞에서 잔치를 베풀려고 한다. 너를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줄 것이다. 네 잔이 넘치도록 재워 주겠다.”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상처를 싸매 주시며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십니다. 정말로 수지가 많은 거래입니다.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준비하신 잔치는 완전함과 도움과 구원의 잔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