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 (대흥장로교회)

시편 23편은 성경중에서도 가장 잘 알고, 한 번쯤은 외우셨던 익숙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의 최고령자이신 박희일 권사님도 지금 95이 되어가시는데, 시편 23편을 줄줄 외우세요. 그리스도인의 10명중 9명은 마지막 자신의 임종의 시간에 듣고 싶은 말씀을 이 시편 23편이라고 택했습니다. 저도 성도님들의 임종시간에 안타까움을 갖게 되지만, 시편 23편은 저에게까지도 큰 은혜와 위로의 말씀이 됩니다.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행복의 순서를 이미 정해놓고 시편 23편을 읽기 때문에, 참된 의미를 놓칩니다. 흔히들 많은 사람들의 감사는 풍성하고 모자람이 없고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감사를 합니다. 사업이 잘되고, 구하는 것 마다 척척 이루어지고, 자녀들도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가고, 청춘 남녀에게는 좋은 신랑감이 이미 딱 정해져있고.... 그러면, 누가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서는 바뀌었습니다. 좋은 환경이 그를 감사하게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에 모든 일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1절을 봅시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정말이십니까? 우리는 “ 내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까? 아무런 조건없이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행복하고 감사하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이십니까?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야말로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의 착한 행위를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깊은 수렁에서 더럽고 추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말은 바로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 무조건적인데,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무조건적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은 다 뒤로하고,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하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만족과 기쁨에 대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기쁨은 피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만족과 기쁨이라는 것이 외형적인 조건에 대한 충족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고 직장 승진이 잘 되어야만 기쁨과 만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만족과 기쁨은 선택의 요소라는 것입니다. 기쁨이 선택의 요소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얼마나 몸이 불편한지에 개념치 않고 기뻐하고 만족해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고, 만물이 여호와의 것인줄로 믿으면 우리는 선택적 기쁨이나 피동적 만족이 아니라, “그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줄로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불쌍하다...라는 개념을 대부분 물질이나 건강의 면을 따져서 생각합니다. 없는 사람은 다 불쌍하고....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2006년 가을에 영국 경제학획지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도가 높은 곳이 바누아투 라는 섬나라이고, 방글라데시... 베트남이 12위, 필리핀이 17위, 영국이 108위, 미국이 150위를 했습니다. ” 바누아투라는 섬은 고기잡아 먹는 사람들입니다. 얼마전에 인도네시아에 큰 장마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집이 물에 잠기고, 집안의 집기들이 떠내려갔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이 가슴을 쓰러내리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추장과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이런 슬픈 참사로 어려움을 당하시는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대체 무슨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모두가 얼굴에 히죽히죽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왜 않좋겠어요? 물고기 잡으러 물가에까지 내려가야 했는데, 집안에 물고기들이 가득 들어왔으니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을 쓸 때가 결코 행복할 때가 아닙니다. 많은 성경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이 시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하루아침에 광야로 쫒겨났을 때에 지은 시일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바람에 의존해서 항해하는 돛단배가 모두 바람의 방향대로만 갑니까? 아닙니다. 돛의 모양에 따라서 바람을 타고도 올라갑니다. 우리의 방향이 하나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것 하나만으로 어떤 환경에도 흔들림없이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1절에 대해서 잘 실감이 안나지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 사투리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시간상 1절만 합니다. )

경상도 - 여호와가 내 목자 아이가! 내사 마 답답할끼 없데이. 시-퍼런 풀구딩이에 내 디비지고 저 쓴한 또랑까로 낼로 이끄신데이.... / 전라도-아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겄는가? 그분이 나를 저 푸러브른 초장으로 뉘어불고 내 뻐친 다리 쪼매 수어불게할라고 물 가시로 인도해뿌네 / 충청도 - 여호와는 염생이 같은 지를 키우시고 멕이시는 분이시니 지가 부족한 것이 엄네유 그분이 지를 무지 파란 풀밭에 어푸러지게 하시며 조은 둠벙 가생이로 인도하여 주셔유....


1.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 잔이 넘칩니다(1,5)

신앙의 순서가 분명하면 “부족함이 없는 만족이 우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환경 때문에, 바람 때문에 흘러가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는 이렇게 삽시다. 환경 때문에 울고 웃고 하지말고, “여호와가 나의 목자 이시기 때문에 ,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족하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 10:11에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요 10 :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음의 자리까지도 서신 좋은 목자이시며, 인도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계 7 :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가장 완벽하게 인도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심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갈증을 느끼고 허덕이는 이유는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엉터리, 삯군이면 아무리 잘해봐야 소용없지만, 목자가 전능하신 예수님이시라면 어떤 환경이던지 환경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라, 목자되신 예수님 몫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꽌시.. 관계성이 인생을 좌우!)
다윗은 특별히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He”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그가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가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라고 5번이나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4절부터는 여호와와의 관계성을 2인칭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You” (우리말로는 당신... 당신...하면 좀 건방져 보이지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리고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당신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고,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풍성한 식탁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관계성으로 고백하며 시를 매듭짖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이런 관계가 되면 나머지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내와 남편 관계에서 제일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내 아내이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다 된 거쟎아요.... 아내나 남편의 능력이나, 외모나, 가진 재물 때문이 아니라, “내 사랑하는 사람이 내 남편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어려워도 가난하고 힘들어도 만족합니다... ” 이 고백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과 하나님의 관계로 고백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하와가 얼마나 예뻤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담이 얼마나 멋있게 생겼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손수 빚으신 작품이니깐 예쁘고 멋있었겠지요. 아담이 처음 하와를 그의 아내로 주셨을 때에 이렇게 고백하기를, “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창2:23)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아담이 하와를 그토록 예뻐하고 자기의 뼈와 살처럼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두 가지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 비교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이 중매자가 되시어서 짝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막 10 :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 그 당시에 하와 이외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아내가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틀림없이 남과 비교하였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키가 크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항상 큰 남자만 보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집에 디지털, 대형 T.V를 사시는데 실수하시는 겁니다. 아내, 남편의 눈만 높아져요... 얼마나 자세하게 나오는지.... 더 상세히 탈렌트를 볼수록, 비교하면 뼈중의 뼈, 살중의 살이 비교됩니다.(현명한 여인은 tv를 잘 끕니다) 제일 좋은 부부관계는 절대적 평가를 가지십시오. 그래야만 “뼈중의 뼈 살중이 살”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쓰면서, 항상 기뻐하라...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4:11에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왜 이렇게 고백합니까? 빌립보서1:6 서론에서 이미 해답을 주셨습니다. “ 너희 속에 착한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에 온전히 인도해주실 것에 대해 확고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 이시기 때문에, 사망의 자리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자족합시다. 자족함이 신앙에 큰 유익이 됩니다.


2.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3절)

우리의 목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3절에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소생이라는 말은 “넘어졌을 때에 손 잡아 세워주신다”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이 누구냐하면, 넘어진 사람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에 손잡아 일으켜줄 이웃과 형제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목자가 분명한 사람은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손잡아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자기 이름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지 39일만에 이스라엘은 자기의 진영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 이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다 진멸시켜 버리고 이제 내가 너로 큰 나라를 만들어 이 백성을 대신하게 하겠다...” - 그 때에 모세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애굽에서 그 큰 능력으로 구원하여주셨는데, 이제와서 하나님이 저들을 진노하시면 애굽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시키시려고 애굽에서 인도하였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이 원수들과 적들에게 욕을 당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참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 그 이름을 욕되게하는 것을 보십시오. 참을 수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 성도님들... 넘어지는것을 겁내지 맙시다. 우리는 “넘어져도 아주 거꾸려뜨리는 법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 고린도후서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시편 23편의 해설중에 유명한 것이 양을 키우던 목자 출신의 필립 겔러라는 분이 해석한 것이 유명합니다. 그가 양을 키울때의 경험으로 통해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양은 보통 짐승과 달라서 한번 발을 하늘을 향해 발라당 넘어지면 자기 힘드로 뒤집어 일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뒤집어졌다가는 좋은 날씨에는 한 3일 버티고, 덥고 힘든 날씨에는 한나절만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 양이 뒤집어지는가?하면... (참 중요합니다...우리들도 적용해야 합니다)

(1) 털을 깎지 않고 길어지면 쉽게 뒤집어진다는 겁니다. 자기 털의 무게 때문에 , 거기다가 털에 진흙이 묻고, 배설물, 벌레들, 가시덤불까지 끼어들면 무거워져서 쉽게 뒤집어진다는 겁니다. 털을 깎아야 합니다. (양은 사실 그 털로 이불도 만들고 옷도 만들어 유익을 주지만, 깎아주기 때문에 자기에게도 큰 유익입니다 ) 지저분한것이 묻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의 숲을 깎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2) 살찌게 되면 뒤집어집니다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뒤집어지고 못일어납니다. 사람도 그런분들이 종종 있는데, 영적으로 비대하지 않도록 힘써 영적 운동에 힘쓸 수 있기를 원합니다.

(3) 양은 특별히 평평한것 보다 우묵한 곳을 좋아해서 그런곳에 잘 앉게 되는데, 특별히 잘못 우묵한 곳에 눕다가말고 뒤집어질 때가 많습니다. 아무데나 눕지 맙시다. 잘못 누우면 뒤집어져요... 아무데나 앉지 말고.... 올해 우리 인생이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4) 본의 아니게 걷다가말고 잘못 헛디뎌서 벌렁 누울때가 있습니다. 발걸음을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걸어가야 안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올해동안 어떤 환경과 여건속에서도 넘어짐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이 우리를 소생케 하여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속에서 목자가 누구인가?를 확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2차 대전때에 사막에서 낙오한 병사들이 많이 죽었는데 사막에서 죽은 자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그 입과 식도에 모래로 꽉차있다는 것입니다. 목마름의 고통속에서 그들이 갑자기 모래가 오아시스로 보이게 되고, 샘물로 보이면 정신없이 달려가서 모래를 물 퍼마시듯이 막 먹다가 기도를 막아 죽는다는 것입니다. 갈증으로 실패하지 맙시다. 세상에 참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세워주시는 분은 “우리의 참된 목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한해의 발걸음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정녕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3,6)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라는 고백과 더불어 다윗은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4절에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리고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6절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너무 멋있는 결론적 고백입니다. 경상도 말로 하면, “ 내사 우짜든지 그 옆에 딱 붙터갓고 죽어도 마 안떠날란다...” 전라도 말로 하면 “ 나를 징하게 따라당깅께로 나가 어찌 그 분의 댁에서 묵고 자고 안하것냐? ” 충청도 말로 하면, “지가 여호와의 집에 아예 푹 눌러 살것시유...”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실줄로 믿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주의 양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권투시합을 할 때에, 선수들이 시작 종이 울리기전에 서로 기 싸움을 합니다. 그동안 훈련한 것, 그동안 준비한 나는 자신감이 있다.... 사실 여기서 싸움은 판가름 난다고 합니다. 올 한해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고, 그분이 항상 우리와함께 하심을 믿고 확신 가운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종말론 학자들이 세계의 모든 것을 고려하고, 전쟁, 핵무기, 기근등... 인류의 시간을 12시간으로 계산할 때에 2006년까지는 11시 53분으로 종말의 7분전으로 발표했었는데, 올해 들어서 바꾸었답니다. 11시 55분으로 “5분전”입니다. 정말 언제 어떤 일이 우리 앞에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길사람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사람은 올해도 한 해동안 생각밖의 넘치는 은혜로 , 기적으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33대 대통령이 마지막 임종의 시간이 왔을 때에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힐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친구였던 빌리그레임엄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당신이 남긴 업적 때문에 당신이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았고 , 그래서 당신은 천국에 이를 것입니다. ”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큰 숨을 쉬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이제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평안히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임종하였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 언제 어떻게 종말이 와도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승리의 비결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심”을 확신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무조건 미래를 좋게만 보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그 나머지는 당연히 다 목자가 감당하신다는 확신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하신 결론도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승리의 확신이었습니다.

짐승들은 과식을 안하는데, 사람들이 왜 과식을 할까? 짐승은 소화제도 필요없고 , 아무리 무서운 사자라도 그 옆에 소가 지나가도 배가 부르면 꿈쩍도 안합니다. 그런데 왜요?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사람의 과식의 이유는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언제 내일 또 양식이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음식이 보이고 있을 때에 먹어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식하는 자의 본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과식하지 맙시다. 70%만 먹읍시다. 그리고 내일의 양식은 또 내일 만나로 채워주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심”만을 확인하시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순서가 바뀌면 죽을 때까지 고생합니다. 순서가 바르게 됩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사이시기 때문에, 부족함도 없고, 넘어짐져도 소생케되고 최후의 승리까지 이루어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