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인간됨에 대한 질문

질문을 던지는 일은 머리가 하는 행위이지만 문제에 부딪치는 일은 머리뿐 아니라 온 몸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머리로 질문하고 대답해서 해결되는 문제라면, 곧 온 몸으로 부딪치지 않아도 해결된다면 그것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문제일 것입니다. 반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 머리로 질문하고 머리로 대답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온 몸으로 뛰어들어야 할 필요와 욕구를 느낀다면 그 문제는 단순히 호기심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인’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또는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묻는 것은, 다시 말해서 사람의 ‘사람됨’에 대해서 깊이 알아보고 싶어 하는 행위는 단순히 호기심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행위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이라는 젖먹이동물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하려는 욕망이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독일에서는, 사람은 비누 일곱 조각을 만들 수 있는 지방질과 중간 크기의 못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철분, 성냥 알 2천 개를 만들 수 있는 인(燐), 그리고 사람 몸에 붙어 있는 벼룩을 모두 없앨 수 있는 유황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유대인 학살을 미리 예고하고 준비했던 것일까요? 우리가 ‘사람됨’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이와 같은 생물학적, 화학적 정보를 얻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앎에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것입니다.

짐승은 적당한 보살핌이 있으면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에서 문제없이 잘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현재 자신의 모습과 스스로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 차이가 나면 잘 살지 못합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과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 사이에 차이가 있고 모순과 갈등이 있을 때 나는 불안해지게 마련이고 스스로에 대해서 근본적인 물음을 묻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시편 8편이 묻는 질문

시편 8편은 바로 이 물음을 묻고 나름의 대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시편 8편은 바로 ‘인간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노래입니다.

시인은 나를 묻기 전에 먼저 이 세상을 바라봅니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이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시인이 보기에 세상은 ‘주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곳입니다. 세상은 주님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고 주님의 손길이 닿아 있는 곳이며 따라서 주님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또 세상만물은 주님의 영광을 기리는 찬양을 소리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시인은 마치 세상만물이 부르는 찬양노래를 자기 귀로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 주님을 찬양한다고도 했습니다. 어른들을 물론이고 철모르는 어린이들과 천지사방을 분간하지 못하는 젖먹이들까지 주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지적으로 성숙하고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들만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들과 젖먹이들도 나름의 방법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노래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이 대목은 좀 의외입니다. 느닷없이 원수들과 반역자들과 주님께 맞서는 자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바로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온 피조물과 어린이와 젖먹이들이 찬양한다고 노래한 후에 곧바로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 주님과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한다 했으니 이들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과 피조물을 돌보시는 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주십니까?

그를 하나님 다음 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을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입니까?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 질문을 묻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하늘과 달아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며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늘과 달과 별들을 만드신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과연 사람은 누구입니까?”

시인은, 사람은 하나님 다음 가는 자리에 앉아 있는 존재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신 존재하고도 합니다. 만물을 다스리고 삼라만상을 자기 발밑에 거느리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존재라고도 합니다.




하나님 다음 가는 자리

여러분에게는 이 노래가 어떻게 들립니까? 매우 오만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자신이 하나님 다음 가는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 않나, 존귀와 영광을 관을 쓰고 있다고 하지 않나, 만물을 발밑에 거느리고 다스린다고 하지 않나, 옛날 사람들은 이런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현대인에게는, 특히 자연생태계를 아끼고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오만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시인의 상황은 우리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시인의 노래가 오만하게 들리는 것은 시인 탓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오히려 우리에게 있습니다. 현대인은 실제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래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오르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 ‘목표’를 성취하기에 인간의 힘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많은 부문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우고서 자연세계를 마구 짓밟고 약탈해왔습니다. 저는, 우리의 상황이 이와 같이 때문에 시편 8편 시인의 노래가 오만하게 들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길고 긴 지구의 역사에서 몇 번의 빙하기에 있었지만 생명은 끊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자연생태계가 전체적으로 위협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1백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1백 년 동안 인간은 2번의 세계대전과 수많은 국지전을 치렀습니다. 사실 국지전이라고는 하지만 인명살상과 자연세계 파괴의 규모는 근대 이전에 치렀던 웬만한 큰 전쟁보다 더 막대했습니다. 그만큼 현대인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힘, 생태계를 결정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힘, 지구를 몇 번이나 날려 버릴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시편 8편을 노래했을 때는 인간에게 이런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 힘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고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옛날에 우상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우상화 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자기 형상을 만들어놓고 거기 절하라는 정도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자리에 오른다고 하는 것이 기껏 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위임을 받은 존재

시인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피조세계에 대해서 그 어떤 직무를 ‘위임’받았다고 노래합니다. 인간은 분명 다른 피조물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시인도 그렇게 믿고 있고 우리 또한 그렇게 믿습니다. 시인은, 인간이 그런 자리를 갖게 된 데는 특별한 목적과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목적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피조세계를 관리하고 보존하라는 위임장입니다.

시인은 하늘과 달과 별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주십니까?” 시인은 사람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묻되 ‘단독자’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 주시는 존재요 보살펴 주시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시인은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걸려 있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이토록 광활한 우주 안에 한 점도 되지 않는 미미한 존재인 사람이 과연 무엇이라고 그토록 생각해주시고 보살펴 주시느냐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펴주시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시인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사용하고 있는 ‘생각하다’라는 동사와 ‘보살펴주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하다’라는 말은 히브리 원문에서는 ‘자카르’란 동사이고 ‘보살펴주다’는 ‘파카드’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는 모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선 ‘자카르’는 흔히 ‘기억하다’(remember)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창세기 8장에서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방주를 ‘기억하셨다’고 할 때 이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동사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할 때 쓰이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파카드’는 본래는 ‘방문하다’(visit)라는 뜻이지만 하나님이 주어로 쓰일 때는 주로 ‘처벌하다’ 또는 정반대로 ‘구원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보기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는 존재이고 방문해주시는 존재입니다.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고 하나님은 인간을 늘 기억해주시며 방문해주시고 뭔가를 위임해주셨다, 이것이 바로 시편 8편 시인의 인간 이해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임받은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짐승들은 그들의 욕구가 충족될 때 만족합니다. 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남을 만족시킬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필요한 것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만족합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있다가 없다가 하지만 필요한 것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불안은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인가?’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위임은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인간의 삶은 그것이 자신을 넘어서 있는 어떤 목적에 사용되지 않는 한 스스로에게도 무의미함을 기억합시다. “사람을 단순히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칸트가 말했지만 이 말은 남을 그렇게 대우하라는 말이지 자신을 그렇게 대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또는 누구인가를 위해서 수단이 될 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는 하나님도 될 수 있고 이웃도 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