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복 받는 비결? 화를 피하는 비결?

지난주에 신문에서 일세를 풍미했던 부흥사 한 분의 부고를 봤습니다. 이 분은 1970년대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부흥사 중 한 분이었을 것입니다. 한참 잘 나가던 이 분은 갑작스럽게 이단 시비에 휘말리자 이곳 나성에 와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한 10여 년 그 교회를 목회하다가 이단 시비가 잠잠해졌다고 보고 다시 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대가 크게 바뀌어 이 분의 메시지가 과거와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말하자면 유행이 지났던 것입니다. 이 분은 할 수 없이 다시 이곳으로 왔는데 다시 교회를 개척하려니 너무 나이가 많아 그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자기가 목회했던 교회에 가서 교인 몇 명을 협박하고 회유해서 당시 그 교회를 목회하던 목사와 교인 몇 명을 내쫓고 교회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나는 이 교회를 사임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 교회 담임목사는 여전히 나다.”라는 억지 주장을 내세워 교회와 교회 건물을 차지했습니다. 그때 쫓겨난 담임목사와 교인들은 소송도 생각해봤지만 시간과 돈 때문에 포기하고 그만 얌전히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왜 사정을 이렇게 소상히 아는가 하면 이때 쫓겨난 목사가 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한 4-5년 전 이야기입니다. 사람이란 4-5년 후의 일을 내다보지 못하면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는 존재인 모양입니다.

1970년대에 이 부흥사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부흥회 포스터에서 이 분 이름을 보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신문을 보니 이 분이 평생 5천 번 부흥회를 인도했다고 하더군요. 5천 번 부흥회를 인도하려면 매주 거르지 않고 2번 씩 인도한다고 해도 거의 50년이 걸리는데 가능한 얘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1970년대 한국 교회 부흥회의 가장 흔한 주제는 ‘복 받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냥 복 받는 ‘방법’도 아니고 복 받는 ‘비결’이었습니다. ‘비결’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나만 아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 부흥회에 오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복 받는 방법을, 아니 그 부흥회에 오지 않은 다른 기독교인들조차 모르는 복 받는 비결을 알려준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포스터를 보면 ‘복 받는 비결이 뭔지 나도 배워야지.’하는 생각은 안 들고 ‘또 누가 무슨 사기를 쳐서 선량하고 무지한 교인들 등쳐먹으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부흥사는 그 비결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기왕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주실 작정이라면 그걸 왜 ‘비결’이란 이름으로 몰래 몇 사람에게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대학에 처음 들어가서 기초교양과정을 공부할 때 경제학 개론이란 과목을 들었습니다. 첫 시간에 교수님이 “경제학의 원칙은 최소의 노력을 들여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라고 정의하더군요. 제가 그 과목 성적을 C+를 받았고 경제학과에 가겠다는 생각은 그 강의 듣고 접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디, 나도 최소의 노력을 들여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방법을 배워보자.’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이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드니 제가 경제학과에 가서 뭐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경제학 공부한 분들이 다 도둑이란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저 그 정의를 듣고 제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뿐입니다. 그 교수가 말한 경제학의 원칙이 아직 그대로 통용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글을 보니까 어떤 사람이 경영학과에서 경제학과로 전과를 했는데 그 이유가 “경영학에서는 부채도 자산이다.”라는 강의를 듣고 ‘남의 돈 빌려놓고서 그것도 자산이라니 이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경제학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경제학과에 가서 “경제학의 원칙은 최소의 노력을 들여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저처럼 생각했다면 그는 다음에는 어떤 과로 전과해야 할까요? 사회학과? 인류학과? 고고학과? 신학과? 신학과도 만만치 않습니다. 만일 신학이 ‘복 받는 비결’이나 가르치는 학문이라면 말입니다. 경제학은 최소의 노력이라도 기울이는 데 반해서 신학은, 만일 신학이 복 받는 비결을 가르치는 학문이라면, 그나마도 노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하겠다는 태도이니 더 심한 도둑놈 심보랄 수도 있겠습니다.

'복 받는 비결'이 주제인 부흥회는 흔했지만 '불행을 피하는 비결'을 주제로 걸어놓고 하는 부흥회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너무 소극적인 느낌을 줘서 그것 갖고는 사람들을 끌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하지만 정말 ‘비결’이란 것이 있다면 복 받는 비결보다는 우선 불행을 피하는 비결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복 싫어하는 사람이 없듯이 자기에게 불행이 닥치기를 원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복은 불러들이고 화는 피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복을 불러들이고 화를 피하기 위해서 흔히 썼던 방법이 ‘부적’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부적을 지니면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어떤 존재가 접근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종교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을 ‘미신’이라고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미신적인 요소가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른바 고등종교들에도 미신적인 요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이 더 죄가 많아서가 아니다!

불행을 피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 1절에서 5절에 나오는 얘기가 이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로마 총독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던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들의 피가 제단을 물들였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누가복음 말고는 다른 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빌라도는 이미 유대인의 성전을 짓밟은 적이 있었던 포악한 총독이었고 갈릴리 사람들은 외세의 지배에 대해서 끊임없이 저항했던 ‘반골’이었으니 이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갈릴리 인들이 성전에서 모종의 저항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그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획을 세워 거사를 벌인 사람들은 아마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수할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다가 불행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변을 당한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셨습니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이 말씀은 문제를 해결해주기 보다는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죄를 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매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서도 마찬가지로 회개는 중요한 신앙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한다고 해서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습니까? 회개하면 화가 비껴갑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회개해야 할까요? 우리가 짓는 죄 중에는 알면서 짓는 것도 있지만 모르고 짓는 것도 있습니다. 인간이 무슨 수로 자기가 지은 죄를 모두, 빠짐없이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회개하는 것이 불행을 피하는 길이라면 우리는 하루 종일 회개만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지난 한 주간의 죄를 참회하는 순서를 갖는데 그 정도 갖고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얼마나 회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만 두고라도 기본적으로 정말 죄를 회개하면 화를 당하지 않고 불행이 비껴갈까요?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1:2)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인격과 신앙을 설명하는 네 마디의 말, 곧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란 말은 그가 얼마나 완벽한 인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도 인정하셨고 그를 시험했던 사탄도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사람이었던 그에게는 재물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욥기는 그가 얼마나 세심하고 조심스런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의 여러 아들들이 돌아가면서 식구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하곤 했는데 욥은 그 잔치가 끝나면 늘 자식들을 하나씩 불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게하고 자식들 하나하나의 몫으로 번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혹시 저질렀을지도 모를 죄를 씻기 위해서였습니다. 욥은 이 정도로 조심스럽고 세심하며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욥에게 엄청난 불행이 닥쳤습니다. 신앙 깊은 사람에게는 불행이나 화가 닥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욥은 불행을 겪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욥과 같은 사람에게도 불행이 닥쳤습니다. 회개할 죄가 없는 사람도 그렇거늘 하물며 회개했다고 해서(회개한 사람은 일단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불행이 비껴갈 리 없습니다.

욥이 흠 잡을 데 없는 의인임은 사탄도 인정했고 하나님도 인정했습니다. 다만 사탄이 제기한 물음은 ‘왜 욥이 그렇게 의롭고 신실한 믿음을 갖고 살겠는가?’하는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 그런 것 아니냐는 것이 사탄의 주장이었습니다. 그걸 다 빼앗기면 천하에 둘도 없는 의인이라는 욥도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사탄은 단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일정한 한계 안에서 욥을 마음대로 다룰 권한을 주셨습니다. 재산과 자식들을 다 잃은 후에 욥은 말했습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의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탄도 끈질겼습니다. 욥의 몸을 치면 그는 야훼의 면전에서 야훼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이에 야훼는 목숨만은 건드리지 말라 명하시고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욥의 온몸에 부스럼이 나서 그는 잿더미에 앉아 토기 조각으로 온몸을 긁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요?”




화를 피할 수는 없지만 복으로 만들 수 있다

욥기에 따르면 복(좋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처럼 화(나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복이 우연이 아니듯이 불행도 야훼 하나님에게서 비롯됐다는 것이 욥기의 메시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왜 복을 받고 왜 화를 당하는지 그 이유가 늘 분명치는 않습니다. 때로는 확연한 경우도 있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유를 안다는 사람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 받는 비결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극히 일부의 사람에게만 알려져 있는 그런 비결은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기 원하시는 분이므로 그걸 극소수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르쳐주셔서 혹세무민하게 하셨다고 믿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화를 피하는 비결 같은 것도 없습니다. 누구나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져서 망한 것이 아니듯이 천재(天災)나 인재(人災)에서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도 남들보다 더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화는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비결도 없습니다. 부적이 도움 되지 않는 것처럼 ‘회개’ 역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욥의 경우가 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지난주일에 복(福)에 대해 생각할 때 복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복의 흐름이라고 했습니다. 뚱뚱한 사람이 반드시 건강하지는 않습니다. 뚱뚱한 사람은 순환이 잘 되지 않아 뚱뚱해집니다. 건강한 사람은 순환이 잘 되는 사람이고 쌓아두지 않고 잘 흘려보내는 사람입니다. 영양분도 쌓아두면 독이 되고 잘 흘려보내야 몸을 건강하게 만들듯이 복도 쌓아두면 오히려 화가 됩니다.

화(禍)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화를 피하는 비결은 없지만 내게 닥쳐온 화를 어떤 자세와 태도로 겪는가, 그 화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은 크게 달라집니다. 화가 닥쳤을 때 그것을 ‘불운’의 탓으로만 돌리면 거기서 아무 것도 얻거나 배우지 못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를 이렇게 다루십니까?”라고 하나님께 불평만 늘어놓는다면(때로는 불평이 필요하고 받아들여질 때도 있지만 ‘불평만’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의 인격이 상하고 신앙이 피폐해지는 것 외에 다른 결과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게 닥친 화를 계기로 다시 한 번 내 신앙과 삶을 돌아보고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내가 뭘 깨닫기 원하시는가?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를 깊이 성찰한다면 그 화는 오히려 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가 이런 뜻이었다고 생각해봅니다.

신앙은 복 받는 비결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화를 피하는 비결을 알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오히려 내가 받은 복을 갖고 나는 뭘 해야 하는가, 내가 받은 복을 어디로 어떻게 흘려보내야 하는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내게 닥쳐온 불행에서 내가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변화될까 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