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삼우목사 (잠실중앙교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시험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고통과 어려움만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업에 실패를 하거나, 아니면 병들거나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할 때 그것을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고 말씀도 찾아봅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다시 말해 사업 잘 되고 건강하고 평안할 때는 그것을 시험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여기에 시험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있습니다. 사실은 평안한 것도 시험인데 시험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더 큰 시험이 됩니다.

한 십 년 전 이야기입니다.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자신이 18년 무사고 운전이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혹시 그 무사고 운전에 비결이 있느냐고 있다면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에게 사고 내본 적 있냐고 반문을 합니다. 제가 가벼운 사고를 내 본 적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그 때 앞에 길이 막혀 있었는지 열려 있었는지 묻습니다. 열려 있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길이 열려서 조금 속력을 냈는데 그 길이 급커브 길이었습니다. 커브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브레이크를 잡고 핸들을 틀었는데 차가 미끄러져 반대방향에 주차해 둔 차를 들이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에 차가 없었고 길이 열려 있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기사가 제 대답이 딱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바로 그것이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무사고 운전의 비결은 길이 열렸을 때를 조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차가 밀려 있을 때, 큰 사고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길이 확 열릴 때 신난다고 달리다가 사고나기 십상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길이 열렸을 때를 조심하라, 이것이야말로 인생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길이 활짝 열릴 때, 다시 말해 평안할 때, 모든 일이 잘 될 때가 가장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내 물건을 도둑 맞으면 "아이구 시험에 들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가 선물을 가져오면 좋아합니다. 결코 시험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 선물이 뇌물일 수 있습니다. 뇌물을 선물로 알고 받았다가 큰 곤욕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누가 나에게 달갑지 않은 충고나 언짢은 소리를 하면 기분 나빠서 "시험 들겠네" 걱정합니다만 칭찬은 지나친 칭찬을 들으면서도 좋아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그 칭찬을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칭찬 들었다고 으스대다가 넘어집니다.

하나만 더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병들면 시험 당한다 하고, 건강하면 시험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쉽게 생각해보십시다. 병들었을 때하고 건강할 때 언제 죄짓기 쉽습니까? 병들면 기도하지 죄 짓지 않습니다. 병들고도 죄 짓는 사람 없습니다. 오히려 지은 죄를 회개합니다. 건강할 때 죄 짓습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죄 짓습니다. 건강이 더 큰 시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평안하고 잘 될 때 아무도 그것을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어려움의 시험에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풍요와 평안의 시험에서 넘어집니다. 풍요와 평안에는 완전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 한국교회가 만난 가장 큰 문제도 여기 있고, 우리가 만난 가장 큰 어려움도 여기 있습니다.

읽은 말씀 보면 하나님의 안타까운 탄식소리가 있습니다. 내 백성이 나를 잊어버렸다는 하나님의 슬픈 탄식입니다. 5절 이하에 "내가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노라" 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잊었다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애굽에서 비참하게 노예 생활할 때 하나님 저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이모저모로 보살펴주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얼마나 큰 은혜와 복을 베풀었는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는데 저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언제 저들이 하나님을 잊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배부를 때 하나님을 잊었다고 했습니다. 배고플 때가 하나님을 잊는 것이 아니라 배부를 때 마음이 교만해서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여러분, 배부를 때란 어떤 상황을 가리킵니까? 배부르다 - 단순히 밥을 많이 먹어 배부르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걱정 근심 없고 풍요롭고 좋다는 뜻입니다. 부유하고 어려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광야에서 먹을 양식이 없었고 때로는 마실 물마저 없었습니다. 광야의 위험과 이웃 민족들의 위협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을 40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때로는 원망 섞인 부르짖음이었지만 그러나 그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인도 속에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사막 길을 걸어가던 발걸음이 풍성한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밑에 앉아 시원한 요단강 물에 발을 잠갔습니다. 앞에는 황량한 모래밭이 아니라 곡식으로 가득 찬 넓은 들이 있었고, 하루의 음식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몇 달 몇 년 치의 곡식을 창고에 쌓았습니다. 좋은 주택에서 좋은 옷을 입으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십니다. 말 그대로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렇게 풍요롭게 된 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5절 말씀에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셨습니다. 그래서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배고플 때는 하나님을 기억했는데 배가 부르니 그 배부르게 해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민족을 두고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36년 일제의 압박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일제는 1945년 8월 17일 이 땅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전부 처형하려고 계획을 세워두었었습니다. 그 비밀 서류가 공개되어 이제는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3일 전에 일제로 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육이오의 전란에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그 때 남쪽에 조금 남았던 것 북에서 밀어 부쳤으면 그냥 끝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유엔군을 통해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 이만큼 복을 주셨습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고 자원 하나 제대로 없는 나라가 세계 13대 무역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올림픽을 치렀고 곧 월드컵도 치릅니다. 세계적으로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치른 나라 몇 나라 되지 않습니다. 정말 복을 받았습니다. 교회적으로는 또 얼마나 큰 복을 받았습니까? 불과 백 년만에 이렇게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이건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이토록 복을 주셨는데 잘 살게 되면서 점점 하나님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면서 열심은 식어가고 하나님과 오히려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어느 시골 여집사님이 새벽기도 가려고 시장에 가서 시간 맞추어 운다는 닭을 샀습니다. 닭 장수에게 틀림없이 새벽에 우는 닭인지 확인을 하고 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갖다놓으니 새벽이 되도 울지를 않습니다. 며칠을 기다려도 울지를 않습니다. 속았다고 생각하고 닭 장수를 다시 찾아가 벙어리 닭을 팔았다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닭 장수가 되려 묻습니다. "집은 지어줬소? 먹이는 제때 제때 줬소? 암탉도 넣어주었소?" 여집사님은 완벽하게 해주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닭 장수가 말합니다. "여보슈, 집 있겠다 마누라 있겠다. 먹고 살만 하겠다. 뭐가 부족해서 빽빽 울겠소" 핀잔을 주더랍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편안하고 어려움 없다는 것,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생활에는 가장 무서운 위기일 수 있음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역사를 보십시오. 풍요롭고 넉넉할 때 한결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배부르고 여유 있는 사회에 가보면 예배당이 텅텅 비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평안해졌을 때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잊어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미지근한 물을 큰 유리컵에 담아 거기 개구리 한 마리를 넣었습니다. 물을 미지근하게 한 것은 개구리가 제일 좋아하는 온도에 맞춘 것입니다. 오뉴월, 여름철, 논물,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뜻뜻미지근한 그 온도로 맞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구리가 여기가 내 고향이구나, 좋다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유리컵에 불을 가하는데 조금씩 조금씩 가합니다. 갑자기 온도를 높이면 개구리가 튀어 나갑니다. 그러나 서서히, 서서히 높여 갑니다. 그랬더니 개구리가 나가야지, 나가야지 생각하면서도 물이 따뜻한 것이 너무 좋아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하다가 결국은 물에 푹 삼기고 말더랍니다. 꼭 이와 같습니다. 평안하고 어려움 없을 때 서서히, 자기도 모를 정도로 정말 서서히,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영적으로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내 신앙생활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신앙의 열심은 서서히 식어가지만 몇 가지 점검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기도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는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성경에 대한 관심이 줄어듭니다. 텔레비전 보고 신문 볼 시간 그렇게 많아도 성경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큐티할 시간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나오는 횟수입니다. 할 일이 많아서, 세상적인 것들 즐겨야 되겠기에 교회 나올 여유가 없습니다. 교회 나오는 횟수가 점점 줄어듭니다. 여러분, 스스로 한번 점검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어떻게 해야합니까? 풍요 속에서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감격스럽게 감사하며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원래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에 하나님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처음 받았던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를 구원했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들이었습니다. 하나님 구원해주시지 않았다면 자손 대대로 노예생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생각할 때 하나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광야 마른땅에서 너를 권고했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로 먹여주시고 반석에서 샘이 솟게 하시고 그렇게 보살펴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생각할 때 하나님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 받았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처음의 은혜로 돌아갈 때 풍요 속에서도 감격스럽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며칠 못 가 죽었습니다. 마음 아파했지만 잘 극복하며 그런데로 살아왔는데 결혼 십년만에 서로 맞지 않는다고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합의를 하고 둘이 살림을 나누는데 하나 둘 나누다가 옷장 저 밑에서 10년 전에 죽은 아이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두 사람은 사진을 앞에 두고 한 참을 쳐다보았습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생각은 똑같이 십 년 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즐겁게 연애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고 함께 기뻐하다가 아이가 죽자 같이 슬퍼하며 서로 위로하던 그 처음 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쳐다보다가 다시 합쳐서 새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처음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 그 감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 은혜 받았을 때, 그래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며 헌신하던 바로 그 은혜와 기쁨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은혜는 희미해졌습니다. 가슴은 싸늘해지고 열심은 식었습니다. 대신 비판의 눈만 밝아졌습니다.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은혜를 회복할 때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몸 바쳐 충성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풍요가 시험인줄 알고 풍요로울수록 더 열심히 주님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혹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까? 평안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겠기에 하나님 어려움 주신 줄 알고 감사하십시오. 혹 어려움이 없습니까?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하십시오. 풍요롭고 평안한 것 하나님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시험인 줄 아셔야 합니다. 시험인 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시험이기에 여기서 나태하면 넘어집니다. 깨어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편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렵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 신앙생활은 결코 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무서운 사형틀입니까? 그 무서운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어렵게 신앙생활 하라는 뜻입니다.

정채봉 선생의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 가운데 [코뚜레가 일을 한다]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미 소가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송아지가 자라 어느덧 코뚜레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맏송아지가 농부한테 사정을 합니다. "저에게는 제발 코뚜레를 하지 말아주십시오" 농부가 대답합니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되고 말 텐데" "아닙니다, 주인님. 두고 보십시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곱절이나 일을 잘 할 테니까요" 농부는 맏송아지의 말을 받아들여 동생 송아지에게만 코뚜레를 했습니다. 맏송아지는 자신의 약속대로 코뚜레 없이도 스스로 멍에도 매고 쟁기도 끌었습니다. 그 송아지들은 자라서 어느덧 어른 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뚜레를 하지 않은 맏송아지는 차츰 꾀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농부에게 뒷발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뚜레를 한 동생 송아지가 들에서 돌아와 보니 맏송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행방을 묻는 동생 송아지에게 주인이 대답합니다. "일은 안 하고 꾀만 부려서 도살장으로 보냈지"

여러분, 이 이야기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에게는 코뚜레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코뚜레를 꿰어야 합니다. 사람은 별 수 없습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버려 두어서는 제대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스스로 열심을 내고 스스로 어렵게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더 열심히 모이십시다. 모여야 말씀 듣고, 모여야 기도하고, 모여야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다락방모임 참석하십시다.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봉사하십시오. 억지로라도 봉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사는 길입니다.

3월 14일은 우리 교회 설립 26주년을 기념하게 됩니다. 26년 동안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상장해 왔고 또 좋은 교회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왔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미래입니다. 주 오일 근무제도 실시된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풍요로운 한 때, 위기의 한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때에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성장하며 주신 사명 감당하기 위해서는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모이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전도하고 더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보세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쳐서 흩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할 때 무서운 징계를 받게 됩니다. "나를 잊었느니라" 이 하나님의 탄식이 우리를 향한 탄식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처음의 은혜와 감격을 회복하고, 더 열심히, 주님 섬김으로 풍요로운 시대에도 계속해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