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 (대흥장로교회)

한 여전도회 헌신예배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사회를 맡았던 분이 여전도회 회장이셨던 권사님인데, 한동안 부동산 투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서 어떻게하면 추첨을 통해서 하나를 건지나... 뛰어다니시면서 교회도 집도 잘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 기도도 없이 사회를 보긴 보아야 하니까 미장원에 가서 머리는 하고, 이 옷 저 옷을 갈아입어보다가 시간 맞추어서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강단에 서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찬송가를 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찬송가 102동을 부르시겠습니다 라고해서 온 교회가 웃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노래는 단지 곡조와 화음과 음율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슨 음악을 듣고, 무슨 음악을 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 5-6년 전에 소록도에 부흥회를 하러 가면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 안에서 계속해서 (두만강 푸른물에....)가 크게 틀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끄럽던지, 저는 조용히 부흥회를 준비하면서 갔으면 좋겠는데.... 투덜대면서 도착해서 내렸는데, 발걸음마다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두만강”가요가 나오는 겁니다. 무엇을 듣느냐?하는 것과 무엇을 부르냐?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자녀삼으시고, 택한 백성 삼으시고, 구속해 주셨는가?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 맨 끝에 21절에 보면,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을 부르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와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와 찬송을 받으시기 위하여 이 자리에 불러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청년교회 답게 찬송을 힘을 다해 부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느 교회든지 그 교회의 색깔과 독특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데, 특별히 그 교회를 힘있게 하는 것은 찬양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디를 갈 때면 먹을 것도 필요없고, 입을 것도 필요없는데 꼭 챙겨가는 것이 있습니다. 귀에다 꼽은 MP3 Player입니다. 젊은이의 특징은 찬양입니다. 어떤 분은 곡조를 몰라서 못하겠다는 분도 있고, 음치라서 노래를 크게 못부르겠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찬양대가 음치면 좀 곤란하지만, 대중찬송은 음치가 크게 부르면 옆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세상에 예배드리면서 옆사람이 너무도 음치인데도 불구하고 뜨겁게 엄청나게 찬송을 불렀다고해서 은혜 떨어진 사람은 없고,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고 찬양의 도전을 받습니다. 저사람도 저렇게 크게 부르는데, 나는 더 크게 불러야지... 성도의 삶과 찬양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송할지로다...” 숨이 붙어있으면 누구라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1:3을 보시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무려 6절까지 쉼표, 마침표 없이 한 문장으로 찬양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도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하려는 것이라”라고 마칩니다. 고린도후서1:3을 보면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고 편지가 시작됩니다. 베드로전서1:3에 보시면, 이번에 베드로도 “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편지가 시작됩니다. 에베소서에서 증거할 모든 편지의 결론, 고린도후서의 모든 편지의 결론, 베드로전서 모든 편지의 결론을 서두에서 밝히는 것이 “찬송하리로다”라는 것입니다.
동물은 아무리 사랑하고 평생을 베풀어도 감사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동물원에서 어떤 동물이든지 먹이를 주는 사육사가 먹이를 주면 가로채듯이 받아갑니다. 고개 숙여서 감사합니다 이러는 법이 없어요. 집에서 키우는 개도 먹을 때는 건들지 말라고 하쟎아요. 평생 먹이를 주어도 먹을 것 건들면 물어버리는 것이 동물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것,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보호하시며, 나를 택하여 하나님의 천국 백성 삼으신 것을 알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그 감사의 최고의 표현이 찬양입니다.

1. 미래 지향적 자세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을 보면 찬양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18절에 “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그리고, 18절 앞에까지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말씀합니다. 엄청난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에 의해서 파멸된 사건과, 홍해를 나누어서 길을 내어 너희를 살렸고, 반면에 애굽의 모든 군대들은 그 물에 일시에 엎드러져 죽게하였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게 과거사를 말씀하시고는 곧바로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 말씀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을 다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기억지말라, 생각지도 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관심을 앞으로 행할 새 일에 맞추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바벨론 사건이나, 출애굽의 사건, 홍해의 모든 사건들은 이스라엘이 영원토록 기억할만한 엄청난 사건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행할 하나님의 새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새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펼쳐질 하나님의 새 일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는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앞으로 이루어가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찬양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나와 함께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되며, 하루하루 이민 생활속에서 늘 함께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감사하며 그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내게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더욱 힘있게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그랬었었던 하나님이야.... 과거지향적인 사람은 결코 힘있는 찬양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에 과거에 대한 불만이나, 과거에 대한 동경함으로 가득한 사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후회와 추억 뿐입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가수들도 가만히 보면 그들이 부른 노래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송대관이라는 가수가 별로 외모도 별로요, 노래도 뛰어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렇게 떴느냐? “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이거 부르고서 떴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홍해를 기적과 같이 건넌 후 불렀던 모세의 찬양이 나옵니다. 그 찬양에 보면, 물론 기적과 같이 홍해를 넘게하시고, 애굽을 멸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바라보며 찬양을 합니다. 13절이하에 “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 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이 모든 고백은 앞으로 펼쳐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하지만, 미래 지향적인 사람은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크게 찬양합니다. 찬송은 반전과 역전을 가져옵니다. 시편119:16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을 하루에 일곱 번씩 찬양할 때에 놀라운 역전의 승리가 주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힘없는 노래는 결코 힘있는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 음악은 인격을 빚어내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군인들이 군가를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교가를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할 때에 열심히 청소하고 일만하면 되지, 왜?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왜 온 국민들에게 외우고 부르게 하신지 아십니까? 노래에는 힘이 있습니다. 일반 노래에도 힘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성도를 가장 힘있게하는 능력이 됩니다.
신앙이 추억이 되지 맙시다.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이 됩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온전한 승리를 이루어가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2. 긍정적인 마음으로 찬양하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의 자세는 긍정적 삶의 찬양입니다. 이전일을 생각하지말라고 말씀하시면서 19절이하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이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이 이루어가실 일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이 마를 때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했고, 배고 고프고, 길이 없이 막막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에 빠졌습니다. 내가 물을 주고, 내가 강을 내고 먹고 마시게 할 것이니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자는 긍정적 마음을 가진자입니다. 민수기21:5에 보면 “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불평 가운데 가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서 수많은 불평으로 가득한 자들을 죽게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원할 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들고 있는 놋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민수기 21:17절에 가면 브엘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불평의 입술을 닫았고, 찬양부터 합니다. “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가로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 하였더라 광야에서 맛다나에 이르렀고...”
앞이 환하게 뚤렸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은 긍정적인 마음으로부터 앞 길을 환하께 열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행전16장에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옥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점치는 여인을 고쳐준 댓가는 예상을 깨고 죽도록 매를 맞고 옥중에 갇혔습니다. 병고쳐주고 고통당하고 옥중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밤중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고, 그 찬양 중에 모든 죄수들의 착고가 풀려지고, 옥문이 열려지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을 말씀합니다. 찬양은 긍정적인 마음에 담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625 때에 정말 언어가 다른 유엔군인 미군들이 와서, 서로가 통했던 방언이 찬송가였습니다. 실제로 저희 고모님도 배를 타고 남한에 올 때에 누가 공산당인지, 크리스챤인지를 알수가 없어서 찬송을 부르게하였다는 겁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한 공산괴로군이 미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삽을 주더니 6명에게 구덩이를 파라는 겁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자기는 그에게 다가가서 나는 크리스챤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 미군이 찬송을 부르라고 하는데, 아는게 없쟎아요. 자기 아내는 장로 딸이었는데, 교회 간다고 때리고 핍박을 하면 늘 부르던 찬송 하나가 생각 난겁니다. 좀전에 불렀던 455장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근심 있으랴... ”그리고는 아내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콱 쏟아졌습니다. 그랬더니 오케이하고는 자기는 살려주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장래의 모든 일에 길과 강을 내어주시고 , 우리로 먹고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내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자는 찬양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내일을 여호와께 맡겼으면,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욥기36:2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 욥이 고통중에 있을 때에 엘리후가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환난 중에서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됩시다.

3. 성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찬양의 특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43장 전체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4절에 “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은 우리를 성결하고 존귀한 자들로 삼아주셨으며, 성결한 자들에게 찬양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찬양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성결케 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세상의 제아무리 선행과 좋은일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더러운 자의 찬양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결한 자의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존전에 나왔으면 먼저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성결한 자임을 확인하신 후에 힘찬 찬송으로 영광돌리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마음에 더러움이 가득하면 큰소리로 찬양할 수가 없지만, 성결한자자가 힘있는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 예배시간마다 제 마음이 참 안타깝습니다. 전도사님 혼자 마이크에 대고 큰소리로 부르고, 나머지는 가만히 앉아서 찬송이 어렵다 쉽다 하고 계시고, 아예 밖에서 들어오지도 않고 계시다가 땡!하면 들어오시고... 무슨 기쁨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
토인비라는 영국의 한 귀족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 당신이 우리 집에 와서 내가 사는 것을 보고 나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가구나 음식들은 행복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는 매일 아침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 염려없이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집의 비싼 물건들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이 집이 갑자기 오두막집이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유일한 만족이요 기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찬양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성도님들이 집에 가보면, 행복과 집의 유무와 대소와 품질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대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집이 있고, 특별히 이렇게 추운 겨울에 어떤 집에 가면 찬바람이 씽씽 더 부는 집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결한 것만큼 힘있는 것이 없습니다. 법정에 선 자들이 두렵고 떨리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경찰차만 봐도 떨리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성결한 자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 때에 암몬과 모압, 그리고 마온 족속들이 연합해서 유다를 둘러쌌습니다. 그 때에 여호사밧이 두려워서 여호와를 바라볼 때에 레위사람 스가랴의 아들 야하시엘이 일어나 이렇게 외칩니다.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18절 이하에 보면,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목이 터질듯하게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호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좀 그렇게 찬양합시다. 오늘 내가 찬송을 부르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목이 아파서 못하겠어요... 큰 소리로하면 머리가 울려서 못하겠어요... 그러지 마시고, 부르다가 죽으면 그것보다 귀한 축복 없으니까”, 마치 전쟁을 앞에둔 유다의 군사들처럼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역대하20:에 계속해서 22절에 보면, “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전쟁이 시작되었고, 싸워볼 것도 없이 저들끼리 싸우면서 피차 망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6절에 “ 제 사 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이것은 전쟁 후에 승리의 찬송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의 시작과 준비도 찬송보다 더 좋은 것은 없고, 전쟁할 때에 찬송으로 승리하였으며, 전쟁 후에 승리의 최대의 표현도 찬송이었습니다.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찬송이 좀 바뀌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찬송을 부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씀입니다. 찬송하러 나오셔서, 그냥 조용히 귀로만 예배드리고 가십니까? 목소리가 좀 쉬도록 힘 있게 찬양합시다. 찬양만큼 우리의 삶의 기적과 역사와 축복도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풍속의 노래를 보리고, 하루 찬양 중에서 승리하시고, 하루를 마칠 때에도 찬양으로 가득하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찬양이 바뀐 청년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찬양의 시간을 사모합시다. 그리고, 알든지 모르든지, 목소리를 높혀 심히 큰 소리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는 미래형 그리스도인, 긍정적 그리스도인, 정결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