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인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광성교회)

오늘 전도서 11장 1절에서 8절까 지의 말씀가지고 "보람있게 삽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람있게 산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오래 살면서도 인생에 보람이 없었다면 오래 살았다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짧게 사는 것보다 오래 사는 게 좋지만 오래 사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은 보람있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예배당에 어둠을 밝혀주는 전기. 이 전기를 통해서 이렇게 밝혀주는 이 전구를 에디슨이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연구하고 연구해서 만들어 발명해서 우리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질 때 에디슨 의 연구는 얼마나 보람있는 겁니까? 그런가하면 이상하게도 저 병원에서는 똑같은 병을 못 고치는데 이 병원에서는 고친다할 때 그 병원은 얼마나 보람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내 병원에 오는 사람마다 병 고침 받고 건강해서 돌아간다면 보람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공부를 했더니 정말 공부하는 것이 보람있다고 할 때 공부한 사람은 공부 한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동안에 우리가 1년을, 10년을, 30년을 예수 믿었더니 보람이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보람있는 믿음생활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0년을 믿었어도 아무 보람 이 없다면 30년 동안 믿었다는 건 아무 뜻이 없습니다. 이 까닭에 오늘 제목을 "보람있게 삽시다"라고 정했습니다.

첫째로 베푸는 보람입니다(1-4).

성경은 말하기를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푸는데 보람을 느껴야 합니다. 누구한테서 자꾸 받으려 고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는데도 보람이 있겠지만 너에게 베풀어주는데서 더욱 삶의 보람을 찾아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예수님의 비유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부자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를 하시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오 더니
"주님"
"왜?"
"우리 아버지의 유산이 굉장히 많은데요, 우리 형님 이 아버지 유산을 몽땅 다 먹어버리고 나에게는 유산을 한 푼도 안 줍니다. 내 형을 불러다가 동생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말씀을 한마디 만 해 주십시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너희 집 재산이나 나눠주는 그런 사람으로 보느냐?"하시면서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었는데 얼마나 그 해 농사가 잘 되었는지! 그런데 그 만 농사가 너무 잘되다 보니까 이 농부가 걱정이 생겼는데 "어디다 쌓 아 둘꺼냐"가 문제였었다. 그래서 걱정 걱정 하다가 창고를 다 헐어 버리고 몇 갑절의 창고를 지어놓았 고 그 잘 된 농사 전부를 거두어다 가 이 창고 안에다가 다 쌓아 놓고 배를 두드리며 하는 말이 "내 영혼 아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았도다."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밤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러가 버렸으니 그러면 지금까지 쌓아 둔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고 반문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결론은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대해서는 그렇게 부요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렇게 가난할 수가 없었다는 거였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쌀 한톨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돈 때문에 형제를 몰라보고 형제가 싸운다? 얼마나 어리석으냐 그 말입니다. 이 사람은 첫째로 형제를 몰라본 사람입니다. 안다고 하게 되면 나밖에 몰랐고 돈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형제라고 하는 건 내 알 바가 아니라는 태도였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도 내 알 바가 아니라는 자세였습니다. 그러니 자기를 위해선 그렇게 풍성하고 하나님을 위해선 그렇게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바칠게 없다 그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쓸 것은 그렇게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쌓아놓아도 절대 누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그런 사람은 없어요? 날 위해서는 쓸 것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께 바칠 것은 없다는 교인 말입니다. 내 집에 쌓아 놓은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농사가 잘 되려면 하나님의 도움 아니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망치면 하루에 망할 수 있는 것이 농사입니다. 우리 다른 사업도 하나님의 도움 아니면 안되지만 농사는 절대로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할 줄을 알았습니까? 전혀 감사 할 줄을 몰랐어요. 이런 사람은 모아 쌓아 놓기만 했지 절대 베풀 줄을 모르는 사람이요. 베푸는데서 인생의 보람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풍성한 것을 베풀며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저렇게 동생이 유산을 가지고 싶어하니, 그래 자네도 좀 가지게 하고 좀 주었더면 얼마나 좋았을 겁니까? 나는 먹고 쓰고도 이렇게 많이 남아 쌓았는데, 이웃 사람들은 먹을 것도 없어서 야단이니,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아요. 베푸는 보람을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불행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베푸는 보람, 그 보람속에 살라는 뜻으로 이런 비유를 해 주신 겁니다. 우리들은 베푸는 즐거움, 베푸는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꼭 부자만이 남에게 베푸는 줄 아십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큰 부자가 되고도 못 합니다. 가난해도 마음만 있으면 베풀 수 있는 겁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4절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 나 여덟에게 나눠 줄 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 함이니라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다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 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네 먹는 식물 즉 먹는 것을 물위에 던지라는 말씀은 저 흘러가는 강에도 던져버리라. 혹은 바다에다 던져버리라는 말입니다. 물에다 먹을 것을 던져버리면 그걸 언제 도로 찾을 수 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혀 못 찾 습니다. 물위에 먹을 것을 던지는 사람은 찾을 생각을 하고 던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 님은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아 주신 다는 겁니다. 그 물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면 이웃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웃에게 도로 찾을 생각 없이 베풀라는 겁니다. 언젠가 너도 도움 받을 때가 올 거라는 겁니다. 너는 항상 베풀기만 하고 살 줄 아느냐? 너도 언젠가 도움이 아쉬울 때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 다. 그럴 땐 그 이웃들도 너에게 도로 받을 생각 안 하고 베풀 거라는 겁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누 주라고 계속적으로 성경은 말합니 다. 그 많은 사람에게 즉 필요로 하 는 사람에게 필요이상 가진 것을 나누어주라는 겁니다. 내게 있는 것 즉 내 필요 이상의 것은 절대로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눠주게 하시는 청지기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에게나 여덟에게나 베풀어 줄 수 있을 때 주라는 겁니다. 무슨 재앙이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본문은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지금은 큰소리치고 살지만 너도 언젠가 재앙을 당해서 망해버리고 너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될 때 가 있을는지 누가 아느냐? 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계속되는 말씀이 구름의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쓰리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너도 한번 섰다고 자만했지만 쓰러지면 그냥 있는 나무처럼. 너도 망하고 못 일 어 날 때가 있을는지 누가 아느냐? 는 겁니다. 망하기 전에 네 손에 힘 이 있을 때 베풀어주고 너도 쓰러지고 못 일어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일어 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네 손에 힘이 있을 때, 네가 쓰러지기 전에 베푸는 보람 속에 살라 또는 베푸는 즐거움을 가지라는 그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하며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망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구제하는데 망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구제하는데 망설이면 절대 구제를 못합니다. 처음에 저 사람에게 내가 한 20만원은 줘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다음에 가서 곰곰이 생각하면 얼마를 주고 싶어집니까? 10만원으로 깎아 버립니다. 그 다음에 또 다시 곰곰이 생각하면 얼마 주고 싶습니까? 만원만 주고 싶어집니다. 그 다음에 곰곰이 생각하면 시치미를 떼고 맙니다. 본문의 뜻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처음 생각이 났을 때 바로 해 버리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꾸 망설이지 말고 우유부단하게 그러지말라 라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베푸는 보람은 처음 생각을 가졌을 때 즉 마음이 변하기 전에 실천하는데서 얻는 겁니다. 지내놓고 보면 참 잘했다 싶어지고 나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저렇게 잘 되는 구나! 생각 될 때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거 얼마나 좋으냐 그 말입니다. 즉 베푸는 즐거움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렇게 베풀어주는 보람, 베풀어주는 즐거움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손에 힘이 있을 때, 내 손에 가진 게 있을 때 베풀어 주는 즐거움, 이게 우리 성도가 살아야 할 첫 번째 보람입니다.

둘째로 최선의 보람입니다(5-6).

이 말은 최선을 다하는 그 자체로 보람을 느껴야 한다는 그 말입니다. 다윗이 한 번은 어렸을 때 자기 형들이 세 명이나 전쟁터에 나갔었습니다. 요즘은 전쟁에 나갔을 때 TV 방송이나 라디오로 다 보고들을 수 있는 때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 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이새 가 다윗을 시켜서 형들이 잘 있는지 가 보게 하였습니다. 먹을 것을 많이 싸 가지고 형들을 찾아가 봤더니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고 있지 않겠습니까? 왜 그럽니까? 저 앞을 보라는 겁니다. 블레셋 군대가 맞은 편에 진을 치고 키가 9척 같은 골리 앗 대장이 나와서 우리 군대와 너희 군대가 다 싸울게 없다는 겁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대표로 나와서 1대1로 전쟁을 끝내자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있으면 나오라는 말입니다. 그런 마당에 누구가 나섭니까? 저마다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그때 다윗이 나가서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리하지 않습니까? 또 자기는 칼도 없고 검도 없었던지라 골리앗이 찼던 검을 빼어 그의 목을 잘라 가지고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 때 사울 왕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다윗을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그 젊은 사람이 군대의 장이 되어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더라. 즉 지혜롭게 행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최선의 보람이라는 그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윗의 인기가 점점 올라갔습니다. 사울 왕이 뭐가 됩니까? 결국은 다윗을 그냥 두면 안되겠다 싶어서 천부장 으로 강등을 시켜버리고 내 곁에 있지 말고 멀리 떠나 버려라 하여 좌천을 시켰습니다. 그런 경우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윗은 천부장으로 강등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지혜롭게 행하는지 백성들이 여전히 기뻐 하더라는 겁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 자리에서도 내쫓아 버렸습니다. 너 내 눈에 보이기만 하면 죽인다는 뜻입니다. 도망가야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다윗은 그때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그 지경에 됐을 때도 하나님 원망합니까? 다윗의 입에서는 단 한 마디 원망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쫓기는 신세가 되도, 고양이 앞에 쥐 같은 신세가 되어도 그는 믿음 생활에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운명은 하나님께 맡겨버렸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로서는 이런 환경에 처하든지 저런 자리에 처하든지 최선을 다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여기에 있고 우리의 보람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이란 이런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최선을 다 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본문으로 돌아가서 5, 6절"바람 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 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될는 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본문에서 말하는 바람의 길, 즉 이 바람이 불어서 이리로 갈는지 저리로 갈는지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까? 모르지 않습니까? 태풍도 일본 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서 부산으로 상륙합니다. 또 어떤 태풍은 부산으로 오는 것 같더니 중국으로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이 바람의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측을 한다고 해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리고 태중에 있는 애기의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지 않아요? 그런데 태중에 있는 아기가 열달 동안 뼈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임신한 어머니는 잘 먹어 주기 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안 먹으면 자기도 죽고, 아기도 죽으니까 말입니다. 아기도 살고 나도 살려면 열심히 먹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이건 내가 할 일 입니다. 아기가 태중에서 병신이 되지 아니하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6절의 말씀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말고 최선을 다 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잘 될는지 모르고 저것이 잘 될는지 모르고 둘다 잘 됐는 지도 모르니까 너는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고 잘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은 생활은 그래야 됩니다. 하나님께 맡길 것까지 우리가 끌어안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것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책임져 달라고 하면 안됩니다. 뭘 책임져 달라는 겁니까? 우리가 할 것을 왜 하나님이 책임지십니까? 하나님이 하실 것만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가 할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 할 때 그것이 믿음 생활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데서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아들딸들을 키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들딸들 에게 등록금 고지서가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등학교 다니는데 등록 금 고지서가 나왔습니다. 이 고지서를 끌어안고 한숨만 쉬고 밤을 꼬박 새우고 걱정하고 있더냐? 는 말입니 다. 등록금 내 주는 것은 자기 걱정 할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앞에 내 놓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아버지께 맡겨놓고 밤새도록 공부하는 것은 자녀가 할 일입니다. 공부까지도 아버지께 다 해달라고 하면 이런 못난 자식이 어디있습니까? 공부까지 해 달라고요? 공부하는 것은 자기가 할 일이지 왜 아버지가 책임 질 일입니까? 공부는 자녀가 할 일 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즉 내가 할 일까지 책임져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할 일을 내가 끌어안 고 밤새도록 고민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맡길 것은 즉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내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하는데 보람을 찾는 겁니다. 즐거움을 최선을 다하는 데서 찾으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공부하여 좋은 성적을 얻는데서 보 람을 얻지 않습니까? 등록금은 아버지가 책임지는 겁니다. 아버지가 가 진 것이 없으면 꿔서라도 줄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비를 뽑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그 제비 뽑은 결과는 하나님이 작정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맡길 건 맡기고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서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으시고 보람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대비의 보람입니다(7-8).

대비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준비, 예비라고 바꾸어도 좋습니다. 어떠한 일에 대해서 미리 대응책을 찾아서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대비하고 있었기 까닭에 얼마든지 극복 할 수 있습니다.
"대비", 여기에 보람이 있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120년 후에 이 사람들을 만드는 것을 후회하는 까닭에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노아는 120년 후 홍수를 대비하여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딴 사람들 은 노아를 가리켜 미친놈이라고 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아가 미쳤습니까? 백성들이 미쳤지요. 120 년 후에 홍수 심판이 있다고 아무리 노아가 선포를 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매 큰 홍수가 내리고 모든 사람은 죽고 노아의 식구들은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120년 후를 대비한 노아, 수고와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 준비를 한 것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었나! 그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별 소리 들어도 120년 후가 아니라 우리 죽음과 심지어 죽은 후까지를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7, 8절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 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날을 생각할 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인생이 살다보면 즐거운 날이 많고 또 즐거울 지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생 살다 가다 보면 그렇게 즐거운 날만 있느냐 그 말입니다. 아니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캄캄한 날, 즉 절망의 날, 고통의 날이 많다는 겁니다. 캄캄한 날이라는 것은 죽음의 날까지도 포 함하는 겁니다.
"이 날을 생각하라" 는 것은 대비하라는 뜻입니다. 너에게는 이런 좋은 일만 있을 줄 아느 냐? 잘 나가면 항상 그렇게 잘 나가기만 할 줄 아느냐? 너도 언젠가는 떨어지는 날도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날을 대비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렇게 한참 젊었다고 천년 만 년 살 것처럼 죽음을 전혀 생각지 않더라도 그래도 너도 죽을 날이 너도 모르게 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그 죽음까지도 대비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에게 닥쳐올 불행이나 고난이나 어려움을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고 보람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탈무드에 "재산은 죽음과 함께 하지 못하나, 선행은 죽은 후에도 함께 하느니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선행은 믿음이라고 해도 좋고 하나님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돈밖에 모르고 돈 돈 하지만 죽는 날에 한 발걸음도 따라와 주지 않습니다. 나 혼자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등한히 여기고 사돈의 팔촌 쯤으로 여겼던 예수님. 사돈의 팔촌 쯤으로 치부했던 하나님은 죽은 후 에라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죽음까지라도 대비하고 사는 사람은 평 상시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입니다. 하나 님은 죽음을 초월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두운 날을 생각하는 거요, 불행에 대 한 준비하는 대비하는 삶입니다. 정말 보람있는 일입니다. 죽음을 대비 하는 그 대비는 가장 보람있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