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아라!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산다는 일이 싫어졌다. 모든 것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라,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나에게는 괴로울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마음을 주셨지만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여 어떻게 일을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결국 좋은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잘 살며 즐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다 같은 데로 가는 것을! 다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가는 것을! 그러니 제 손으로 수고해 얻은 것을 즐기는 것밖에 좋은 일이 없다.


멋지게 잘 사는 것은 하늘 아래에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다. 인생은 비록 짧아도 하느님께 허락받은 것이니 그렇게 살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부귀영화를 하느님께로부터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마음껏 누려보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물려주는 일이 있다. 헛되다 뿐이랴! 통탄할 일이다.


나는 덧없는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만사를 다 겪어보았다. 착한 사람은 착하게 살다가 망하는데 나쁜 사람은 못되게 살면서도 고이 늙어가더구나. 그러니 너무 착하게 살지 말라. 지나치게 지혜롭게 굴 것도 없다. 그러다가 망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렇다고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라. 어리석게 굴 것도 없다. 그러다가 때도 되기 전에 죽을 까닭이 없지 않느냐!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하느님 앞에서 조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잘 되어야 하고 하느님 두려운 줄 몰라 하느님 앞에서 함부로 사는 악인은 하루살이처럼 사라져야 될 줄은 나도 확신하지만 땅 위에서 되어가는 꼴을 보면 모두가 헛된 일이다. 나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착한 사람이 받는가 하면 착한 사람이 받아야 할 보상을 나쁜 사람이 받는다. 그래서 나는 이 또한 헛되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네 몫의 음식을 먹으며 술을 마시며 기뻐하여라. 이런 일은 하느님께서 본래부터 좋게 보아주시는 일이다. 언제나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하늘 아래서 허락받은 덧없는 인생을 애인과 함께 끝 날까지 즐기며 살도록 하여라. 이것이야말로 하늘 아래서 수고하며 살아 있는 동안 네가 누릴 몫이다.


이 말씀들은 모두 구약성서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들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말씀들이 아니라 무슨 동양의 무위(無爲)철학자나 희랍의 쾌락주의 철학자의 책, 또는 별 깊이 없는 에세이집에서 인용한 말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분명히 전도서에서 한 글자도 가감하거나 변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옮겨 읽었습니다. 성경 안에 이런 말씀들이 있는 줄 몰랐던 분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긴 전도서란 책이 워낙 성경 중에서 변방으로 밀려나 있는 책이니 이런 내용이 있는 줄 몰랐던 것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아직까지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해오면서 목사들이나 교수들로부터 전도서를 본격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전도서에서 입맛에 맞는 몇 구절이 심심치 않게 인용될 뿐입니다. 그것도 맥락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제가 3-4년 전에 전도서를 갖고 강해설교를 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저도 그때 처음 본격적으로 전도서를 읽었습니다.

전도서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언뜻 보면 아무 관계도 없어 보입니다. 앞에서 읽은 몇 구절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전도서는 쾌락을 추구하라는 책이고 염세적이기까지 한 책입니다. 도대체 왜 이 책이 성경 안에 들어왔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수난을 당하시고 죽임 당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만사가 전도서가 말하듯이 헛되고 헛되다면, 인생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너무 진지하게 살려고 하지도 말고 그저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즐기다가 티끌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쓸데없는 죽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만사가 헛된데 무엇 하러 남을 위해 남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남을 대신해서 죽기까지 하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전도서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려주일을 제외하면 다섯 주간 동안 사순절이 이어집니다. 사순절 다섯 주간 동안 우리는 전도서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나란히 읽으면서 2006년 사순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그러면 왜 이 두 이야기를 나란히 읽으려 할까요? 극과 극은 통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억지로 두 이야기를 꿰맞추려는 것도 아닙니다. 두 이야기에는 정반대의 면도 있지만 놀랍게도 서로 통하는 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할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세상사는 동안 적당히 즐기며 살자는 전도서의 메시지는 분명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도서가 내리는 결론에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이야기를 억지로 혼합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를 서로 보완하며 읽게 되면 하느님의 뜻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전도서를 읽으면서 섬광같이 영감이 떠올랐고 이를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와 연결해서 읽으면 놀라운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순절에 그것을 시도해보기로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질서를 깨닫고 이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

오늘은 다섯 주간에 걸친 사순절 설교의 서론 격으로서 전도서가 어떤 책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서른아홉 권의 구약성경 가운데 잠언, 전도서, 욥기를 지혜문학이라고 부릅니다. 개신교의 구약성경에는 들어와 있지 않고 가톨릭의 제2경전에 들어와 있는 ‘지혜서’(Wisdom of Solomon)와 ‘집회서’(Sirach)도 역시 같은 지혜문학으로 분류됩니다.

우리말로는 ‘지혜’라고 하고 영어로는 ‘wisdom’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 ‘호크마’를 번역한 말입니다. 많은 히브리 단어들이 그렇듯이 ‘호크마’도 영어나 한글, 그리고 여타의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입니다. 한 단어로는 히브리어 ‘호크마’에 담겨 있는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크마’가 의미하는 바를 풀어 보면 이렇게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지혜문학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실 때 피조세계에 ‘질서’(order)를 부여하셔서 그 질서에 따라서 우주가 운행되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 질서를 통해서 실현하시는 것입니다. ‘지혜’는 이와 같이 우주와 역사의 질서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과 의지에 순응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하느님의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삶을 자연스럽게 형통하는 삶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질서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아는 ‘지식’을 뜻함과 동시에 그것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정신적, 지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혜문학의 이와 같은 하느님 이해는 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보는 하느님 이해와 여러 면에서 대조됩니다. 지혜문학 이외에 구약성경의 다른 책을 보면 하느님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자연의 운행과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연의 운행뿐 아니라 인간 역사의 진행까지도 하느님께서 당신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이야기를 우리는 성경에서 흔히 읽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모세나 다윗, 엘리야나 이사야 같이 특정한 ‘개인’이나 예언자, 제사장,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 같은 ‘집단’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이 확실합니다. 선택된 사람은 능동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반면 선택되지 않은 사람은 선택된 사람을 수동적으로 추종하거나 아니면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은 선택된 사람들 하고만 관계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이 관계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언약관계’(covenantal relation)입니다.

하지만 지혜문학의 하느님은 이와 다릅니다. 지혜문학의 가장 일차적인 특징은 ‘보편성’입니다. 지혜문학은, 하느님께서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선택해서 그들 하고만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문학의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하느님입니다. 지혜문학은 하느님께서 피조세계에 부여하신 질서와 그 질서를 통해서 이미 드러내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은 인종이나 종교의 다름에 상관없이 누구나(!)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선택된 개인이나 집단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실 때 이미 피조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셨고 그 질서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셨다고 지혜문학은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 점은, 지혜문학의 하느님은 자연의 운행과 인간 역사 진행에 마음대로 개입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혜문학의 하느님은 당신께서 피조세계에 부여하신 질서를 스스로 깨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지혜문학의 하느님은 자연이나 인간의 역사를 ‘순리’대로 진행하게 내버려두시는 하느님입니다. 이 하느님은 필요할 때마다, 또 당신이 하느님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때때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스스로 피조세계에 부여하신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에 직접으로나 간접으로 개입하시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시지도 않습니다. 자연이든 인간 역사든 스스로 굴러가게 하시는 분이 지혜문학의 하느님이십니다. 선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고 악한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것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일일이 축복하거나 심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질서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일 따름입니다.


지혜문학의 변주곡들

따라서 지혜 신학의 근본은 ‘하느님께서 피조세계에 부여하신 질서에 대한 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질서에 대한 신뢰가 지혜문학의 가장 근본적인 신학이고,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 밑바닥에 깔려 있는 대전제입니다.

이 신학적 전제에 가장 충실한 책이 바로 잠언입니다. 잠언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질서에 잘 순응하면 복을 받아 잘 살 것이고 순응하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누가 읽어도, 굳이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너무도 지당한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혜문학이 여기서 끝나면 너무 재미가 없겠지요? 지당한 이야기가 지혜문학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라면 그것은 아무 ‘문젯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그 어떤 도전도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혜문학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면 지루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변주곡이 만들어집니다. 음악으로 치자면 욥기와 전도서는 지혜문학의 기본 멜로디인 잠언의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욥기는 그만한 벌을 받을 잘못이나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큰 불행을 만나 고통에 빠진 욥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욥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전혀 흠이 없는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욥은 스스로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만한 고통을 겪을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습니다. 이 사실도 참기 어렵지만 더욱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 사실은 자기가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하느님이 침묵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왜 하느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가만히 계시는가? 뭐라고 한 마디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느님의 침묵! 이것이 욥을 더 큰 고통에 빠뜨린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욥기가 잠언의 1차 변주곡이라면 전도서는 2차 변주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기를 읽으면 원래 곡이 어떤 멜로디인 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원곡의 멜로디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변주된 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하느님께서 피조세계에 부여하셨다는 질서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욥기가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라는 개별적인 문제를 안고 씨름하고 있다면 전도서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의미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과연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느님의 질서에 순응하여 삶으로써 복을 누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복을 누리고 살아봐야 죽으면 그만 아닌가! 악인이나 의인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죽으면 모두 잊혀지고 정해진 한 곳으로 가는 것 아닌가! 세상에 과연 하느님의 질서가 있기나 한가? 하느님의 질서가 있다면 왜 악인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의인은 지지리도 못사는가? 지혜가 과연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되기는 하는가? 지혜가 있으면 머리만 복잡해지는 것 아닌가? 하느님의 뜻이라? 인간의 지혜로 그것을 알 수나 있는가? 그러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최고다! 전도서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전도서가 처음부터 무조건 먹고 마시고 즐기는 쾌락이 최우선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생 살면서 이것저것 다 해보았고 온갖 것을 다 추구해보았는데 그렇게 해본 결과 아무 것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저는 전도서가 내린 결론에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많은 물음들 중에는 공감되는 물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질문하는 태도에 저는 크게 감동합니다. 그는 이른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부조리와 무의미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적당히 타협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 물음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전도서에서는 느껴집니다. 묻기를 중도에 포기하거나 적당히 타협해서 적당한 답을 내놓지 않고 물음을 극한까지 몰고 간 점을 우리는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태도를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서도 봅니다. 전도서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지만 양자에 공통적인 궁극적인 물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질문을 밀고 나가는 뚝심에 있어서는 성경의 다른 이야기들보다 일관성이 있고 더 끈질기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 두 이야기가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어디서 갈라져서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과연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