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받으라   (로마서 15:1 ~ 7)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15: 1-7

   존경하는 김상복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단에 서서 성도 여러분을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보이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이 부족한 저를 늘 인정해 주셨기에 이 자리에 지금 서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김목사님이 저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김목사님이 제게 오늘 설교를 부탁하실 때 참 기뻤습니다. 훌륭하신 분이 나를 인정을 해 주셨구나! 생각하니 참으로 좋았습니다.

   여러 성도님들도 일상의 삶에서나 교회의 삶에서 남에게 인정을 받을 때 기쁘시지요? 누가 나를 인정해 주고, 받아 줄 때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고 받아주지 않을 때, 무관심하거나 무시할 때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목숨의 줄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새에게 날아다니는 공중이 그 새의 생명의 줄이듯, 또한 물고기에게 물이 생명의 줄이듯이 우리 사람에게는 인정해 줌이, 받아줌이 없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주위에서 나를 인정해 주고 받아줄 때 나는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오셔서 복음 선교를 하실 때에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너무나 많은 백성들이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사는 사회 현실이었습니다. 극소수를 빼고는 거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의 학정 아래에서 무시당하고 억압을 당하고 굶주리고 춥고 배고픈 생활을 하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이런 정치적 사회적 소외 속에 사는 백성들이 자기네끼리라도 서로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고 서로 인정해주고 받아주고 도와주면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당대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자기 백성들을 무시하고 학대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 전혀 종교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유를 통하여 “아이들이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너희들이 함께 춤을 추지 않고 애곡을 하는 사람을 보아도 함께 울어주지 않는 구나!” 말씀하시면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회의 이런 냉랭하고 차디찬 분위기를 조금씩 허물어 가시면서 나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동족인 이웃에게서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받으시고 행동으로 저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심지어 죄인들로 낙인이 찍힌 사람들과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하시면서 저들을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로마 정권의 지배자들과, 동정심도 없고 눈물도 말라버린 유대 종교지도들의 억압과 학정 속에서 소외당하고 아파하는 수많은 백성들을 받으셔서 저들과 함께 웃고 울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피리를 부는 자들과 함께 춤을 추셨고 애곡하는 자 앞에서 웃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늘 뜨거움으로 가득 찼었고 눈에는 눈물이 마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땐데 당대 소련의 망명 작가였던 솔제니친이 하버드대 졸업식에 와서 강연을 하면서 자신이 미국에 와서 충격을 받은 것은 미국의 청년들이 뜨거운 가슴이 없고 열정이 없고 삶에의 용기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설파했습니다. 저도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크게 감동을 받았는데 그가 쓴 단어가 “파토스”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passion이지요. 열정이 없는 미국의 청년들, 파토스가 없는 미국의 청년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솔제니친은 권고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의 청년들은 월남전 등으로 상심하고 상실하여 있을 때입니다. 삶의 의욕이 없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감정이 메말랐고 그 무엇에도 관심을 상실한 세대였습니다. 감동도 없고 감격도 없고 고마움도 못 느끼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솔제니친의 강연은 당대 미국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무감동, 무관심, 냉담 등등은 정신병의 징조라고 합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사람들을 보면 어떤 일에도 관심하지 않습니다. 지각도 희미하고 감정은 메말라 있습니다. 누가 자기를 방문해줘도 고마워할 줄을 모릅니다. 오로지 자기라는 상자 속에 갇혀서 외부의 작용에는 일체 응답하지 않고 있는 기형인이지요. 이런 무감동, 무감각의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서도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보면서도 아파할 줄 모릅니다. 춤을 추면서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전혀 기뻐할 줄 모릅니다. 무감각, 무감동하기 때문입니다.

   무감각, 무감동 즉 ‘아파토스’라는 단어는 어원적으로 보면 “아픔으로부터의 자유, 열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파토스 즉 passion은 열정이라고 번역을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밖으로부터 오는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동의 뜻이 "passive"인데 파토스에서 그 어원을 찾습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에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파토스에 부정사 ‘a’를 앞에 놓으면 ‘아파토스’가 되어 영향을 받지 않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됩니다. 감동이 없는, 감각이 없는 상태 즉 무감동, 무감각 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아파토스’가 고대와 중세의 윤리에서 가장 위대한 덕목이 되었었습니다. 고대와 중세의 철학이나 신학에서 위대한 신은 아파토스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위대한 신은 무감동, 무감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인간도 무감동하여야 위대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중세교회는 이런 철학과 신학을 도입하여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고통도 아픔도 당하지 않는 존재라고 설파했습니다. 파토스적인 신, 즉 아파하고 고통하고 울고 웃는 신은 진짜 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성을 찾는 사람들은 무감동하고 무감각하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가장 고상한 경건은 아파토스, 즉 무감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창조주요 구세주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 반대의 인간의 모습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는 정말 파토스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울기도 하셨고 웃기도 하셨습니다. 신구약성경 안에서의 하나님의 이야기, 그의 독생자의 이야기는 파토스적인 아픔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박스 속에 갇혀서 혼자 고독하게 사신 분이 아니고 사람들 한 가운데 사시면서 사람들의 행과 불행에 함께 웃고 함께 우신 분입니다. 누군가가 피리를 불면 그와 함께 즐거워했고 누군가가 애곡을 하면 그와 함께 울어준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운 종교 기독교는 아파토스 종교가 아니고 파토스 종교입니다.

   대 종교들의 배후에는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에게 크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면서 그들을 받아주기 위하여 스스로 큰 고통을 마다하지 않은 창설자들이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애굽의 노예들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에 응답한 모세에 의하여 시작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픔에 동참한 신이었습니다. 아파하는 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세가 만남에서 그리고 그가 친히 자기 백성들의 아픔에 동참함에서 유대교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불교의 시초를 보면 석가모니가 왕궁 주변에 사는 자기 백성들의 가난과 질병과 역경을 보고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데서 불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도 왕궁에서 호화스럽게 살 수 있었지만 노예들이 불쌍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석가모니도 왕자로 호화롭게 살 수 있었지만 서민들의 아픔을 동정하여 왕궁을 버리고 저자 거리로 내려옴에서 불교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종교의 시작은 모두 창설자들의 파토스에서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파토스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육을 입으신 사건에서 기독교가 아픔의 종교로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죄인들과 경건치 않은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거기에서 그들을 자유케 하시고 해방하시려고 십자가에 못이 박혀 상하시고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파토스 위에, 그의 아픔과 고통 위에 기독교는 세워졌습니다. 앞으로 17일 후 재 수요일부터 사순절에 들어갑니다. 우리 인간들을 뒤틀린 그대로, 죄인 그대로, 약함 그대로 받으시기 위하여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었고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과 교훈을 그대로 받아서 로마의 교우들에게 오늘의 편지를 전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15장 1절의 서두는 예수님의 아픔을 통하여 새로 태어난 믿음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예수 안에서 이제는 더 이상 약한 자가 아니고 강한 자가 되었으니 “약한 자들을 위하여 살자”는 권면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자고 권합니다. 연약한 자를 받자고 7절에 강조합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받자는 말씀입니다. 강한 내가 약한 상대를 있는 그래도 받으려면 나는 괴로움을 당합니다.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나의 경우 은퇴를 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젠 별 볼일 없다는 것이겠지요. 주고받는 관계(give and take)가 소멸되면 인간관계가 끊어지기 십상입니다. 상대를 만나서 점심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사람이면 가까이 할 수 있지만 만나서 반대로 점심을 사줘야 하고 부탁도 들어줘야 하는 상대라면 가급적 만나기를 꺼려하겠지요. 약한 자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픔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손해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예수님을 예로 드시면서 본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와서 우리 유한한 인생, 죽을 인생, 죄악 인간, 정말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받으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듯이, 그리스도안 에서 강한 자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나보다 못한 자, 약한 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뜻도 됩니다.

   어려움에 처하여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찡합니다. 마음이 아픈 증거입니다. 그것이 파토스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받아줌에서 나는 어려움을 당합니다. 상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그 고통의 짐을 나눠집니다. 고통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아서 손해를 볼까 두려워서 도망치지 않고, 희생이 있고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 고통에 참여합니다. 이 때 그 약한 자는 힘을 얻고 강해집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 썩어야 많은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파토스의 삶, 아픔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약한 자를 받을 때 나도 살고 상대도 삽니다.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에 전염되지 않으려고 혼자만 있으려 하면 상대방도 죽고 나도 죽습니다. 이기적인 삶에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약한 자를 받음에서 나도 살고 상대도 삽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저 홀로 살려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이웃의 어려움, 가족의 고통, 교회의 어려움, 민족의 아픔 등등을 외면하려고 합니다. 전혀 마음에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아픔의 현장에서 도망치려고 합니다. 이런 무감동, 무감각한 자들이 곧 정신병 환자들입니다. 중대형 교회를 나가는 이유가 조용하게 교회 생활을 하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어떤 성도의 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아픔 없는, 고통 없는, 수고 없는 교회 생활을 즐기겠다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교회에는 이런 분이 아니 계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란 하나님 찬양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할렐루야 교회에 나오셨으면 서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학식 많은 자가 학식 약한 자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재물이 많은 자가 재물이 적은 자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얼굴도 몸도 잘 생긴 짱들이 잘 생기지 못한 사람들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북의 동포들을 받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북과 통일되면 남한의 백성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해가 될 것이라는 통계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강한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이 저 약한 북의 사람들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외국인들이 수십만 명 와서 일하고 있는데 그들을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피부색, 생각의 차이, 생활과 문화의 차이 등등의 다름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 혼자만 즐기고 나 혼자만 조용히 살려고 하면 자신의 몸은 편안할지 몰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약한 자들을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그 약한 자들이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주어진 삶을 멋지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약한 자들은 누군가요?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생명들이 소망 속에서 신나게 사는 것을 보시면 제일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약한 자를 받음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가 됩니다.

    어떤 가정에서 돈이 생겨서 새 집을 하나 짓기로 했습니다. 그 가정엔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장애자였습니다. 부모들은 어떤 구조로 집을 지을까 궁리를 합니다. 단층집을 지을까 2, 3층의 큰집을 지을까? 이왕이면 대궐 같은 집을 지어야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막내아들이 걸립니다.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할 수 없는 장애자 아들의 아픔을 생각합니다. 결국엔 단층집을 짓기로 했습니다.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받은 것입니다. 약한 자의 아픔을 받은 것입니다. 강한 자들의 아픔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한 자를 받은 그 아픔을 통하여 그 가정은 더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가정의 삶에도 평안이 임했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된 가정이 되었습니다. 땅에는 평화, 하늘엔 영광의 삶이 이뤄진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시는 강한 자들 여러분 모두는 파토스적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변의 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뜨겁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받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생명임을 알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도 살리고 여러분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출처/홍성현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