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도할 책임이 있습니다!(롬10:13-15)

  신앙 잡지사에서 교인들에게 설교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먼저 '어떤 설교를 듣기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더니, 첫째는 '축복에 대한 설교(46%), 둘째는 은사에 대한 설교(28%), 셋째는 전도에 대한 설교'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으로 '어떤 설교를 들을 때 제일 부담이 됩니까?'라는 질문을 했더니 '회개 설교'라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고, 그 다음으로는 '전도 설교, 그 다음이 '헌금 설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전도'에 대한 설교를 하면 벌써 졸기부터 합니다. 그러나 부담스러운 설교라도 들을 것은 들어야 합니다. 왜? 전도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제목소개!▶

  아들이 못된 일만 일삼아 가슴에 못이 박힌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나쁜 짓을 하고 자기 가슴에 못을 박을 때마다 기둥에다 못을 하나씩 박았습니다. 임종이 가까워 오자 기둥에 박힌 못을 보여 주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내 가슴에 저렇게 많은 못을 박았단다. 이 어머니가 죽은 뒤에라도 제발 착하게 살아다오." 유언하고 어머니는 눈을 감았습니다.
  아들은 기둥에 박힌 못을 바라보면서 새삼 자신이 저질러온 죄악의 숫자에 놀랐습니다. 어머니로 하여금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시게 한 것이 너무 죄스러웠습니다.
  아들은 바르게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쁜 일을 할 때마다 어머니가 기둥에 못을 박으셨으니 자신은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못을 한 개씩 뽑기로 했습니다. 수십 년이 걸려 드디어 그 못을 다 뽑았습니다. 그러나 못은 뽑았으나 못 자국은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과거는 지울 수가 없습니다. 죄악은 사람의 힘으로는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남기는 가장 의미 있는 말은 유언입니다. 평소에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던 불량아도 부모의 마지막 유언만큼은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왜냐하면 유언은 그만큼 의미가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 즉 유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일본의 '우치무라간조'는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 전도하는 것은 진정으로 복된 일이다'고 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그분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시37:4절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막16: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고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상 명령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 전파의 임무를 물려받았습니다.
  바울은 딤후4: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라!"
  그런데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①복음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복음은 이 땅에 주어진 오직 한 길입니다. 요14: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은 오직 이 복음,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한창 다원주의 신학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주장입니다. 다원주의라는 쉽게 말하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유교에도 구원이 있고, 심지어는 통일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신학입니다.
  심지어 동학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최재우를 최메시야라고 부릅니다. 최재우가 동학을 일으켜서 농민을 해방했다고 해서 그를 최메시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요즘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다원주의 신학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이 복음에 대해서만은 절대성을 지녀야 합니다. 복음이 아니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절대성 말입니다.
  행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②복음은 긴박한 것입니다.
  전도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문은 열려 있는 때가 있습니다. 열려 있을 때에는 언제나, 누구나 들어와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활짝 열려 있던 문이 언젠가는 굳게 닫힐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누가 와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가 있고 멸망을 받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을 때가 있고 문이 굳게 닫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의 긴박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때가 중요합니다. 그때가 지나가 버리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디'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일생에서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저질렀던 때가 있었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가 시카고에서 대전도 집회를 했습니다. 수많은 청중이 모인 운동장에서 설교를 하는데 자꾸만 성령이 감동해 오기를 이 시간에 심판에 대해서, 종말에 대해서, 영혼 구원에 대해서, 설교하라고 자꾸만 감동이 옵니다.
  그 설교는 내일 저녁에 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오늘밤에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감동하기를 '내일은 네 날이 아니다'고 그러십니다. 그런 것을 억누르고 '내일 저녁에 하면 되겠지'하고 하던 설교를 마치고 그 날은 집회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역사에 기록될 '시카고 대 화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 밤에 시카고 전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무디는 전날 밤에 인생의 종말에 대해서 설교를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죄인 된 심정으로 살았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긴박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은 내 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내일을 아무도 모릅니다. 내일 아침에 내가 오늘처럼 또 일어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장로님은 두 내외분이 평상시처럼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옆자리에 누워 잠자던 장로님이 이미 숨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장로님이었으니 망정이지 믿지 않는 사람이었더라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 말입니다.
  그분이 다름 아닌 믿지 않는 나의 아버지고, 나의 형제이고, 나의 남편이라면 이것이 적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긴박한 것입니다.

  ③복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희미한 태도를 가지면 안 됩니다. 확신 있고 확실한 태도를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말도 확신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답니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할/
  복음은 확실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입니다. 이 확실한 복음을 확신 있게 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④복음은 반드시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누군가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저희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복음을 전하는 이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전도는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물론 기도도 해야 하지만 기도하고는 나가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름진 옥토도 있어야 하지만 누군가가 밭에 씨를 뿌려 주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맛을 내듯이 복음 전도는 누군가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에는 누군가의 전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랬듯이 여러분도 누군가를 그렇게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전해 주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반드시 누군가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⑤복음은 잘 받아들이는 사람부터 전해야 합니다.
  너무 쉽게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정된 자, 준비된 자입니다. 이런 분은 신앙 생활을 해도 아주 깨끗하고 순전하게 잘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아주 힘이 드는 분이 있습니다. 아주 안 받아들입니다. 10년, 20년을 두고 기도를 했는데도 변화의 조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때는 그 한사람에 매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해가면서 꾸준히 노력은 하되 듣는 사람부터 우선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을 되도록 한다고 끝까지 우기며 고집을 부리다가는 시간과 정열만 낭비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일해 나가야 합니다.
  마치 시험을 볼 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뒤로 미루어 놓고 쉬운 것부터 먼저 풀고, 어려운 문제는 나중에 시간이 되는 대로 풀어 나가야지 어려운 문제 하나에 매달려 있다가는 한 문제도 풀지 못하고 그 시험은 망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는 잘 받아들이는 사람부터 우선해서 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⑥복음 전도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도 학에서는 '전도를 하려거든 먼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전도를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아버지가 고집스럽게도 믿지 않으려고 하는데 저러다가 어느 날 그냥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큰 걱정을 합니다. 사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버지가, 내 어머니가' 그냥 돌아가신다면 이것은 큰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도 별 생각이 없다면 이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이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렇게 큰일을 놓고도 별 감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 다미앤'이라는 사람은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문둥이들을 상대로 해서 전도를 했는데 너무 깨끗한 얼굴을 가지고 전도를 아니까 잘 먹혀 들어가지가 않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께 "나도 저 사람들처럼 문둥병을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했다는 합니다. 그러고는 사람들과 살을 비비고 함께 살고 해서 나중에는 자신도 문둥병자가 되어서 그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서 효과 있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바울도 전도를 하기 위해서 이방 땅에 가서는 이방인처럼 살면서 전도를 했고, 유대인에게 가서는 유대인처럼 살면서 전도를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전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⑦복음 전도는 '억지로라도' 꼭 해야 합니다.
  고전9: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바울도 부득불 복음을 전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득불'이란 하기 싫은 데도 억지로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화를 내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서 억지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고 항상 복음을 전하는 일이 즐거웠겠습니까? 그도 인간이기에 어떤 때는 전하기 싫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무섭고 핍박받는 것이 싫어서 도망이라고 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육신이 약해 쉬었으면 할 때가 얼마든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고 싶지 않을 때도 억지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기에 순종하기 위해서 전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사도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전하기 싫어도 억지로 전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⑧복음 전도는 강권하여 데려오는 것입니다.
  눅14:23절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여기서 '강권하다'는 말은 '강한 의지로 설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도할 때 한번 두 번 해보고 안되면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집요하고 끈질기게 찾아가고 설득하고 매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⑨복음 전도의 우선 순위는 가까운 곳 네 이웃부터입니다.
  마10:5-6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멀리 가서 다른 민족을 전도한다고 하지말고, 차라리 가까운 네 민족이나 먼저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내 가족을 구원하고, 내 형제를 구원하고, 내 주변의 가까운 이웃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는 데는 순서가 있습니다. 행16: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먼저는 가족입니다. 남들이 다 구원을 받고 내 가족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고는 친척이고 다음이 이웃이고 기타입니다.

  ⑩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칭찬하십니다.
  본문은 "아름답도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어느 권사님이 건강을 위해서 날마다 공원을 한 바퀴씩 산책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다 보니까, 그냥 공원만 돌 것이 아니라 뭔가 좋은 일을 하면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기로 마음먹고, 전도지를 만나는 사람마다 주었습니다.
  그 후 2년이 지났습니다. 권사님의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며느리 되는 처녀는 권사님이 2년 전에 전도를 했던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는 권사님이 공원에서 나눠준 전도지를 받고 교회에 나가 착실하게 신앙 생활을 하다가 한 청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청년이 바로 권사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권사님의 전도가 착한 며느리를 얻게 한 것입니다.
  전도는 남을 위해 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데 드는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아깝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 수고의 대가를 반드시 지불하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전도의 결실이 곧 축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⑪복음 전도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접촉점입니다. 만나야 합니다. 전도는 접촉점이 일어나지 않으면 출발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시다가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 들렸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구하러 가셨는데 마침 수가성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내게 물을 좀 달라며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물가에서 물 이야기로 예수님과 그 여인은 접촉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나게 되고 대화를 하게 되는 이 접촉점이 바로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 전도의 출발이 되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대상자의 영혼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끈질기게 전화도 해야 합니다. 접촉점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찾아가야 합니다. 전화 속에서 대화가 무르익고 찾아갈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될 때는 찾아가야 됩니다.
  다섯 번째는 데리고 와야 합니다. 일단 '와 보라'입니다.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송구영신예배 때, 우리 모두 타이밍을 맞춰 데리고 오세요.
  여섯 번째는 계속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전도해 놓고 돌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관심이 중요합니다. 전도자는 전도한 사람이 신앙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며 기쁘고 즐겁고 자기 신앙이 더 성장합니다.

  ⑫우리 주변에 있는 전도대상자들은 세 부류입니다.
  하나는 불신자입니다. 이웃집에 살아도 불신자는 영적으로는 우리와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한 집에 사는 식구라도 불신자 식구는 영적으로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낙심자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하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전도의 대상자들입니다.
  세 번째는 전입자입니다. 이사를 왔거나 교회를 정하지 않고 이 교회 저 교회를 가보고 있는 과정에 있는 교인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 세 부류는 모두가 우리 교회의 전도대상자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장 긴급한 소리가 무엇입니까? 당신이 외쳐야 할 소리는 무엇이며, 세상이 들어야 할 소리는 무엇입니까? 예수 십자가와 부활 소식입니다.
  전도자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못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몇 가지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①지옥에서 부르짖는 고통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눅16:19-31).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즐겼습니다. 그는 세인들이 가출 것을 골고루 다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빠진 것이 있는데 예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간에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몸에 헌데를 앓으면서 고통 중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는 세상 적으로는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를 그 중심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 두 인생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후의 세계는 정반대였습니다. 부자는 음부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았으며,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천국에 가서 낙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음부에서 부르짖는 부자의 고통 소리입니다. 음부에 고통 중에 있던 부자가 눈을 들어서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부자는 물 한 방울을 청원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5)고 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 물 한 방울의 자비와 긍휼을 받지 못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남은 형제들에게 전도를 부탁했습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마저도 거절했습니다.

  ②'건너와서 도우라'는 성령의 소리입니다(행16:6-34).
  바울이 아시아 지방으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하는데 성령이 막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변 도시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환상을 따라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마게도냐 지역으로 나아가니 예비된 영혼을 붙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마게도냐 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준비된 영혼을 세워 놓고 바울을 불렀던 것입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는 기도에 열심하고, 말씀에 청종하는 신실한 사역자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연합하여 귀신들린 여종을 온전케하여 복음에 수종드는 청지기가 되게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옥중에 갇혔으나 하나님은 간수를 변화시켜 복음에 동역자로 붙여 주었습니다.
  이들이 마게도냐 복음을 위해 빌립보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설립 멤버였습니다. 당신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의 예비하신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③'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사명의 소리입니다(출3:1-12).
  사십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던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배웠던 학문과 갈고 닦았던 기량과 왕궁을 배경으로 한 권세로 민족 독립운동을 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운동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어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이전의 계획들을 산산이 부서 버린 것입니다.
  이제 팔십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주었습니다. 호렙산 기슭에서 본 환상은 '세속적인 신을 벗고 사명의 신을 신어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도 가시떨기 환상을 봐야 합니다. 이 환상은 광야 서편에서 되어진 일로, 하루해가 저물어 가는 날이며, 한 인생의 마지막인 황혼기였습니다. 그 때 가시떨기에 불이 붙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나무가 가시 떨기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모습이 마치 가시 떨기 같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그와 같습니다. 이 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고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현장으로 달려간 모세에게 네 발에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이드로의 양을 치는 세속적인 신을 벗고, 하나님이 주는 복음의 사명적인 신을 신어야 했습니다. 너는 이 신을 신고 내 민족이 있는 바로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 나는 못합니다'. 이전에는 할 수 있다고 했으나 이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아가 포기될 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일은 모세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3:12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④'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회개의 소리입니다(막1:1-11).
  세례요한은 참으로 귀한 인물입니다. 그는 제사장 가문의 출신입니다. 유대에서는 가장 엘리트 가문입니다. 그 아버지는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경건한 제사장 사가랴였습니다.    
  그가 노경에 자식이 없어서 성소에서 기도하다가 응답 받아 아들 세례요한을 얻었습니다. 그는 태 중에서부터 성령에 충만함을 받았습니다(눅1:41).
  그는 많은 유대인들이 소망하는 관원이 될 수 있는 신분을 가졌으며, 대제사장이 되어 산헤드린의 의장도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을 버리고 거치른 광야로 갔습니다. 그는 산해진미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나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의 소리로 살았습니다.
  그 소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소리요, 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이름 그대로 소리로 살다가 소리로 살아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였습니다.
  우리가 외쳐야 할 소리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이러한 복음의 소리가 있는가? 오늘도 수많은 무리들이 이 소리를 듣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고 외치는 세례요한 같은 사명 자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도 복음의 신을 신고 나가는 현장에 놀라운 구원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몇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①영혼 구원의 불타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교회 목사님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닙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에게만 주어진 사명도 아닙니다.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구체적으로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의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남이야 믿든지 말든지 상관할 것이 무엇이냐는 식으로 전도하는 일에 무관심하며, 혼자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회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요 기독교를 그저 윤리와 도덕의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자손을 선민으로 택하신 것은 그들을 통해 온 세계 만민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께 특별히 택함이 받았다는 선민 사상에만 사로잡혀 있었고 이방인들을 구원하려기 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을 무시하였고 극단적인 자들은 '이방인들은 지옥불의 땔감을 위해서 창조되었으며 뱀은 밟아야 하고 이방인은 죽여야 한다'고 까지 이방인을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 계속해서 이웃나라들을 통해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고통 중에서도 깨닫지를 못했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뜻을 이루시고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의 사명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믿/
  교회가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다른 일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전도하는 일입니다.
  '에밀 부르너'라는 신학자는 교회 존재 이유에 대해 '불이 탐으로써 존재하는 것같이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불이 타지 않으면 그것은 불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전도하지 않으면 교회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하지 않는 교회, 전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 존재가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 구원의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힘써 전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실 때 '너희는 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는 말씀은 경계를 넘어가라는 뜻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경계를 넘어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또한 경계를 넘어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혈 족이라 하여 개 취급하고 상종치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 사마리아를 지나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유하시며 먹고 즐기다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듣기까지 했습니다.
  전도란 바로 죽은 영혼을 구원해 내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 값으로 죽은 자들이요 그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친히 오셨고 두루 다니셨으며 지금은 먼저 구원받은 우리들을 보내어 세상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듣고, 믿고, 부름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보내심을 받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을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전도하라고 하면 대단히 부담스러워 합니다. 나는 아는 것이 없고, 나는 말을 잘못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전도하는 일을 피하고 게을리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도 어려운데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은 사실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폭군처럼 불가능한 일을 무조건 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의 사명을 주심과 동시에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약속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은 지체치 아니하시고 이 약속을 이루셔 부활 승천하신 지 열흘째 되던 오순절 날 예수님의 영이신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리스도인들이 늘 예수님과 함께 하심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령은 전도의 영이십니다. 예수님은 행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로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④전도할 때  능력도 주십니다.
  마10:7-8절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막16: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⑤일꾼들은 보상도 있습니다.
  마10:10절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은 삯, 보상을 받습니다.
  딤전5:18절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일하는 사람은 일한 것만큼 보수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일하는 소를 굶겨서 죽이겠습니까? 열심히 일하는 소는 일하게 하고, 빈둥빈둥 놀고 먹는 소는 잡아서 잔치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풍족한 양식을 주십니다(왕하4:8).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마6:33). ▶이 땅에서 백 배의 축복을 받고 내세에도 영생을 얻게 됩니다(막10:29-30).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계2:10). ▶큰 영광을 얻게 됩니다. 단12:3절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유언이요,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의무요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림 제단의 파수군들입니다.
  파수군은 때를 따라 정확한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복음의 나팔을 힘있게 붑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생명운동을 일으키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기시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송수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