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빛나는 별  (단12:3)


실로 오랫만에 하늘의 별빛을 보았습니다.
금요 저녁 기도회를 헐몬 수양관에 17명이 갔었는데 빙 둘러서 함께 기도를 하고 나서 각자 기도의 처소를 찾아 움직이려는데 아내가 별똥별을 보았다고 좋아 했습니다. 밝은 서울밤 하늘 아래서 자라온 아내는 나이 40이 다 되도록 아직 별똥별을 한번을 본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름날 시골 평상이나 마루에 누워 밤하늘을 10분만 쳐다보고 있어도 잘하면 몇개의 별똥별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 자신도 어름이 된 이후 거의 별똥별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1시간의 개인기도 약속 시간을 보내고 아직 내려오지 않은 지체를 기다리면서 조금전 별똥별 이야기가 생각나서 도시의 불빛을 뒤로한 동남쪽 밤하늘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은 변해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밤 하늘의 별자리와 별빛들은 아름답기만 했습니다. 온갖 조명들과 네온 싸인으로 아름다운 치당을 도시의 건물에다 하는동안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고 영롱한 아름다움을 주는 하늘의 별빛과 아름다움은 우리에게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하늘의 별빛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거기 계시지요?(……)
수많은 별빛 전체가 하나님 자신인 듯 보이다가 이내 영롱히 빛나는 큰 별빛의 주인공들이 다윗의 별이요 다니엘이 별이요 요셉의 별이요....등으로 새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변화하는 세상의 아름다움은 금방 식상해져서 바꾸어야만 하는데 변하지 않는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우며 힘을 발하는 것을 우주의 별빛 속에서 보았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안에는 놀라운 아름다움이 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유명한 현대의 기독교적 지성으로 일컫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자신의 저서에 제목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의 말씀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랑이 죽끌듯 변질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지금까지 그는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동일한 사랑으로 변하지 않는 말씀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별빛이 그 모양과 위치가 변하지 않듯이 그는 늘 그곳에 서 계시며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몸이신 예수님을 인간의 몸을 입혀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이땅은 이기적이고 변하는 곳이고 더러운 곳이라 마치 도시의 밝은 불빛이 하늘의 순결한 별빛을 감추어 버리듯 그리스도 예수를 이기의 희생물이 되게 했고 비난받게 했고 더럽혔으며 희생시키었습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빛을 보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거기 서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말씀앞에 우리가 청종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고 더러워도 성령님을 의존하면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
포로로 잡혀가 포로로서 일평생을 살아야 했던 다니엘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70년 바벨론 포도시대에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울 한 시대를 보게 하셨습니다.
4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하자면,
속도의 시대 지식정보의 시대인 현시대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니라"
어두운 시대에 빛이 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혜자입니다. 다니엘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의 예언자가 되기도 합니다.
'지혜' 란 바른 것을 보는눈을 말합니다. 또,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다니엘은 그런 사람입니다.
생각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우리가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의 지혜까지 가진 사람을 본다는건 쉽지가 않습니다.
겁많았고 내성적이었던 저의 유소년기의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라 물가에 가서 마음껏 놀아보지도 못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마음껏 공차며 놀고 다닌 기억이 저에겐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환경이 좋아서 도서관에 쳐박혀 책을 마음껏 보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이 아까운 시기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감사한것은 교회 생활이 취미 이상의 큰 기쁨이어서 성경공부를 하고 암송을 하고 봉사했던 기억입니다.
어떤 지식 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경험은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 이라 말합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지혜는 모든것을 압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지식들이 언제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의 옷으로 짜여져 나오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깊은 은혜가 되고 사랑이 되고 관용이 되고 겸손이 되며 온유함이 되고 진실함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목회 생활의 힘이 될때 목사의 삶이 행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기술도 아니고 실력도 아니고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남을 비추어주는 빛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발산하는 자기 만족의 빛입니다.
빛은 발산체가 있고 반사체가 있습니다.
작은 촛불은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자체로 비추는 발산체입니다.
그러나 달빛은 보름달일때에 밤길을 무난히 걷게 할 밝음이라해도 자신의 영광은 없습니다. 그 빛의 힘이 자신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자의 힘은 바로 자기안에 있는 지성적인 힘입니다.
요즈음 자기의 힘보다 남의 힘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확장하려 하였던 기업들이 무더기로 넘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는 지혜로운 자만이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바로 거짓이 아닌 참을 좇아가는 사람입니다.
지혜자의 길은 참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참이 있는 길을 '진리의 길'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은 그 길만이 참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상과 이론앞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시는 그의 말씀만을 우리는 따라야 합니다.
참이 있는 실제가 '진실'이며 참이 있는 마음이 '진정'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삶을 사시면서 행복을 기대하십니까!
참이 자랑이 되지 못하고 참이 가리워져 버린다면 그 사회야말로 어두운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을 내세울 수 있는 마음이 자존심의 바탕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은 너무도 당연함이 아닐까요!
간혹 보잘것 없는 직업하나에도 조상으로부터 이어지는 기술이라는 가업의 특성때문에 다른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장인 정신을 고집하며 그 기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한낱 기교나 기술 하나에 전 생애를 걸며 보람과 긍지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데 깨끗한 삶, 더 나은 진실된 삶을 고집하며 살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가치관이고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의로운 사람>
지혜를 가지고 바른 길로 가는 사람이 복된 삶이겠지만 본문의 말씀에서는 또 다른 인생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길로 가도록 길을 닦고 인도해 주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 라 말합니다.
세상을 돌아 보십시요.
바른길로 가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도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선한 양심을 좇아가려는 사람들도 보면 나이가 들수록 세속적이 되어가고 거짓에 물들어 갑니다.
조금만 접해보면 거짓의 냄새가 얼마나 풍기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신앙외에 다른 모든 것은 다 포기한 듯 보입니다.
도무지 기독교적 가치관 같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퇴폐 향락의 문화속에 끌어들여 패인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기주의 물질주의 사조에 빠져들게 하여 물욕의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릇된 비진리의 길로 인도하여 영혼을 죽이는 이단들이 득실거립니다.
요즈음 도올 김용옥씨의 금요일저녁 논어 강의 때문에 기독교계가 시끄럽습니다.
그분은 심심하면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비난이 설득력이 있는것은 그 자신이 기독교 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녔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 자신 청년 시절에 성경 공부도 하며 열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의 강연을 들어보면 대단히 논리적이고 웅변적이며 또 감동적입니다.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적 기술만 배운것 같아 보입니다. 설교에선 감동을 주어도 청중이 박수는 못치는데 박수까지 받으면서 하니 더 열정적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아! 설교는 생명의 감동, 복음의 감동과 감격만을 주어야지 연설이 되어서는 안되겠구나!
여러분이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연설을 얼마나 들어보았습니까!
교회외에 다른 곳에서 그런 감동적인 내용을 얼마나 듣습니까!
세계를 움직인 20세기의 명연설 몇편을 들어 보았습니다. 내용을 이해해서 들은 것은 아닙니다. 아이젠하워, 맥아더 원수, 마틴루터 킹 목사등인데 시대적 상황이 명연설로 남게 하였지 모두가 뛰어난 언변과 웅변과 설득력을 갖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는 유명한 설교가들이 너무 많은것 같습니다.
C3TV를 인터넷에서 보게되면 그 모든 분들의 설교를 다 들을 수있습니다.
저도 그런 멋진 설교가로 인정받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회하면 할수록 깨닫는 것은 설교가 사람을 바른곳으로 인도하는 큰 힘은 아닌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목사는설교 하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겠지요.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이렇게 가득찬 세상에서 그들을 다시 바른길로 인도 할 수 있는 힘은 여러분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말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삶에 감동합니다.
젊은 사람에겐 날카로운 비난은 있어도 경험을 거친 지혜는 많지 않습니다.
참 지혜는 지식의 산물만이 아닌 경험이 플로스되어 나오는 판단입니다.

얼마전부터 현대 사회를 새롭게 구별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귀에 자주 들린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이 기억날 것입니다.
최근 불과 1-20년 사이에 너무도 세상이 많이 변하니까 그것을 구별해 보는 말입니다.
현대 사회와 후기 현대 사외의 구별인 것입니다.
신세대 또 나아가 N세대 등으로 세분하려는 것을 보듯 지금은 엄청난 세대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포스트 모더니즘의 구별은,
논리적, 이성적, 과학적 사고 방식 보다는 후기 현대사회가 감성적이고 영적이라는 점입니다.
말의 설득력보다 감성에 호소하며 삶에 호소하는 힘이 아니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말씀 앞에서 먼저 의의 사람이 되십시요.
그리고 나아가 그 의의 전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한순간 비쳤다 사라지는 유성같은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스타들은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옳은 데로 인도한 사람은 영원토록 빛나는 영원한 스타입니다.
지금은 자기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스타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오히려 그들 때문에 이 시대에는 영원한 스타가 나타나지 않는것 같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일은 자기 영광을 포기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영광을 고집하는 한 자녀 교육은 포기 되어야 합니다.
빛의 영광과 별빛의 영광은 다릅니다.
영원토록 빛나는 별빛의 영광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의의길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기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의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의 일은 더욱 힘들지만 더욱 영광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길을 걷는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임종학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