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 4:35-41)


2004년 10월21일은 성수대교가 붕괴된 지 1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해마다 우리 사회는 성수대교의 그 사건을 교훈으로 새깁니다. 금년에도 여러 가지 보도가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 모 양의 사연과 유족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녀는 당시에 21살의 서울교육대 3학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남기고간 일기장에 열네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저기 보도된 것을 수집해보니까 열 가지로 수집이 되었습니다. 첫째, 나는 백 명에게 전도한다. 둘째, 목사관을 짓는다. 셋째, 교회당을 짓는다. 넷째, 장학재단을 설립한다. 다섯째, 시각장애인들을 봉사한다. 여섯째, 이동도서관을 세운다. 일곱째, 1명 이상 입양을 한다. 여덟째, 장기기증을 한다. 아홉째, 복지마을을 세운다. 열번째, 신앙소설을 쓴다. 그 중 일곱 가지가 거의 성취가 되고 한 두 가지는 진행 중에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교회에서 전도훈련을 받고 백 명에게 전도하기로 서약을 했는데 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어머니가 전도사로 헌신을 하고 평생동안 딸이 못 이룬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중에 있다고 합니다. 장학재단을 설립하는데 이것은 보상금으로 2억5천만원을 받았는데 전액 모 학교 장학재단에 기증을 해서 50명에게 장학혜택을 주었다고 합니다. 시각장애인을 봉사한다, 이것은 어머니가 매주 자원봉사자로 시각장애인들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이동도서관을 세운다, 무소를 하나 사 가지고 전방부대에 이동도서관으로 현재 쓰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1명 이상 입양을 한다, 이것은 이모가 대신 해주기로 약속을 하고 진행 중에 있다고 합니다. 장기기증을 한다, 그녀가 죽은 후에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나서 장기기증을 못했답니다. 그래서 모 대학에 그 시신을 기증해서 해부실습용으로 쓰도록 했답니다. 복지마을을 세운다, 이것은 자기에게 장학금을 받은 그 학생 중에 독지가가 나타나서 지금 장애인들을 돌보는 시설을 세워서 운영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그녀가 소원을 담았던 그것이 이루어져 간다는 소식입니다.
   그 유족들의 슬픔과 아픔은 우리가 상상을 못합니다. 한 아버지는 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딸을 따라 자살한 아버지도 있습니다. 미화원을 하는 한 아버지는 거리를 쓸 때마다 딸이 이 거리를 지나간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딸이 그리울 때는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잠시 멈추어 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10월이 오면 딸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이 솟아나기 때문에 정처없이 집을 떠나서 여행을 한답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마음이 안정이 될 때까지 여행을 하다가 돌아오는 그런 부모도 있다고 합니다. 뉴스가 날 때마다, 한강변을 차를 타고 가면서 성수대교가 보일 때마다 그 죽은 가족에 대한 슬픔, 그리움이 떠나질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아픈 이야기들을 이번에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왜 어머니가 죽은 딸에 대한 소원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딸에 대한 그리움, 슬픔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내 남은 힘을 가지고 딸이 이루고자 하는 이 소원을 이루어야 하겠다는 것이고, 또 딸에 대한 소원은 곧 내가 하나님 앞에 이루어 드려야 될 좋은 일이기 때문에 딸의 소원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거기에 딸에 대한 슬픔을 잊고 자기 자신이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살다가 예기치 않는 풍랑을 만납니다. 우리의 인생고는 불가피합니다. 어떤 사람도 질병을 피할 수 없고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겪어야 되는 크고 작은 모든 고난,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인 길입니다. Dr. 롤러 메이라는 분은 사람이 위기를 당할 때 세 가지를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는 사람은 대단히 성공할 확률이 많고 재기할 확률이 많다는 것입니다. 첫째, 가치를 잃어버린다. 위기를 만날 때, 고통이 올 때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되는 가치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언어를 잃어버린다, 이것은 대화를 말합니다. 사람이 위기가 올 때는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진정한 기도로 대화해야 되고 가족끼리, 친구끼리 내 아픔을 함께 나누는 대화를 해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도 말문이 막히고 사람들 앞에도 말문이 막히고 심지어 부부라도 그 가정의 위기에 대해서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화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용기를 잃어버린다, 이 용기를 잃어버릴 때 사람이 자신감을 상실하고 기회가 와도 행동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메이 박사가 가르친 이 세 가지 교훈도 아주 우리에게 좋은 교훈입니다. 가치와 대화와 용기를 항상 붙잡고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풍랑 앞에 제자들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풍랑을 만난 시간은 밤입니다. 이 위기 앞에 제자들은 풍랑만 보고 어떻게 할 바를 모르다가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님이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명령하셨습니다. 무슨 말로 꾸짖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바람아, 잠잠하라, 고요하라’ 이렇게 명령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 졌습니다. 주님은 그것으로 끝나시지 않고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명령하신 후 이제는 제자들을 향하여 꾸중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주님의 꾸짖으심은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신 것보다도 더 강합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은 풍랑의 문제였지만 주님은 그 풍랑이 너희들의 믿음의 문제라고 귀결을 시킵니다.
   오늘 우리들도 육신적으로 온갖 일을 당하고 경험하고 왔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온갖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위기를 우리의 믿음의 문제로 평가하십니다. 우리가 위기를 당할 그 때 주께서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라고 우리를 향하여 실망하시지는 않았는가? 주님이 실망하시고 꾸중하시는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제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상황에 주님은 그 제자들의 믿음의 중심을 정확하게 평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깨울 때 ‘우리 주님이 창조주시다, 우리 주님이 이 풍랑과 바다를 잔잔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을 믿고 깨운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할 바를 모르니까 노를 저어도 안 되고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이 그렇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는 이렇게 위기를 당하고 있는데 선생님 어찌하여 팔자좋게 주무시고 계십니까? 일어나서 어떻게 해보십시오. 이것은 주님을 주로 믿고 깨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그 중심을 알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나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하는 그 부탁 속에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것인가를 연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이미 성경 속에 이런 것이라고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연구하는게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친 믿음을 내가 받아들이므로 나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한 분이 F. B 마이어로  이 분의 설교 가운데 믿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내 생각과 내 소원과 내가 하고 싶은 충동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확증하는 것이다.” 믿음이 무엇이냐? 내가 하고 싶은 그 감정과 충동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고 그것이 주의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욕심도 하나님을 향할 때 거룩한 욕심이 됩니다. 순수한 생각도 나를 집중할 때 그것이 악이 됩니다. 충동도 하나님께로 향할 때 그것은 걸러지고 여과되어 거룩한 기도가 됩니다. 마이어 박사가 가르친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소원이 많고 욕심이 많은데 그것이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정의는 우리에게 성경적인 믿음을 강렬하게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마이어 박사가 가르친 이 믿음대로 살려면 우직스럽고, 때로는 어리석고, 때로는 손해 보는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그것이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그 믿음의 길에는 온갖 과정이 있습니다.

   미련하게 보이는 믿음

   1924년 파리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그때 100m 금메달 후보로 영국의 에릭 리 선수를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릭 리가 출전하기 하루 전날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내일 100m 경주에 출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내가 경주하는 그 시간에는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므로 나는 경주를 포기하고 예배를 선택합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영국언론에서 엄청난 실망과 함께 말로 못하는 비난을 했습니다. 두 가지 비난 중 한 가지는 조국을 배반한 사람이다, 두 번째는 가장 옹졸하고 편협한 크리스찬이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요즘처럼 몇 부의 예배가 있는 시절이 아니고 주일에 한번 있는 공 예배이기 때문에 그는 그 예배를 선택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400m 경주가 있었는데 선수단에서 다른 선수를 출전시킬 사람이 없어서 에릭 리에게 주 종목은 아니지만 400m 출전을 권유했습니다. 에릭 리도 허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경주에 나갔는데 100m 주종목 선수가 연습도 안하고 나갔는데 스타트부터 100m를 달리듯이 전력질주를 했습니다. 코치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렇게 달리다가는 절대로 끝까지 못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에릭 리가 그 당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습니다. 기자들이 몰려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가 남긴 위대한 말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때 200m는 내가 뛰었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이 뛰셨습니다. 그 이상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여러분, 믿음은 이렇게 우직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정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고 주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구하는 거기에는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있고 남들이 이해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을 돌파해야만 나의 믿음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예 믿음이 없는 이런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이 경고는 상당히 강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지금 풍랑만난 너희들의 행동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기업경영 진단가이며 미래학자로 유명한 피터 트루커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이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컵의 물을 반쯤 담아서 이것을 두 가지로 보는 관점이 있다, 하나는 컵의 물이 반이나 채워져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고, 컵의 물이 반밖에 없다 고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관점이 엄청난 의미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80년대부터 흑인들을 연구했는데 흑인들은 그 의식이 컵의 물이 항상 비어있는 거기에 집착하는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흑인들의 그 의식 속에 일반 사람들보다 몇 배로 많은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날 때부터 좌절감이 있답니다. 그리고 분노심이 있답니다. 흑인들은 건드리면 폭발합니다. LA폭동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흑인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흑인들은 물 컵의 반이 채워져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고 쓸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빈 컵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절망하고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의식은 언제나 물이 반 컵 차있는 것을 염두하고 그것을 가지고 빈자리를 메우는 창조성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기업인은 이미 차 있는 반 컵의 의미를 살피고 그 안에서 반 컵을 채우는 혁신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기업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이 분이 아마 크리스찬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글의 논조가 신학자가 ‘기업가’라는 말에 ‘하나님’을 넣고 ‘목사’ ‘장로’를 넣으면 이건 위대한 신학서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지금 풍랑밖에 못 봅니다. 한 배에 타고 계시는 주님을 볼 줄 모릅니다. 이 풍랑이 자기들을 삼키려는 그 공포 앞에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 그러나 예수님은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창조주입니다. 그 분이 바람을 통치합니다. 그 분이 바람을 지으셨습니다. 그 분이 바람의 주인인데 그것을 볼 줄 모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도다” 이렇게 진단하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로 돌아감

   여러분은 풍랑이 일 때 주님이 보입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까? 주님이 우리 가정에 주가 되심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풍랑이 일 때는 그 분을 의식하지 못합니까? 왜 풍랑이 일 때는 그 분을 등지고 삽니까? 우리에게 이 점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고백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여, 믿습니다!” 하고 믿는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그 고백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확증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풍랑의 문제인데도 믿음의 문제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 점이 아주 오묘합니다. 우리가 독감이 들고 몸살이 나면 주로 어디가 아픕니까? 머리가 아프고 목이 아프고  때로 심한 몸살은 눈도 아프고 귀도 아프고 전신이 아픕니다. 그런데 병원가서 치료받을 때 보면 주사를 어디다 줍니까? 아무 죄도 없는 엉덩이에 줍니다. 한 몸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고난은 믿음과 하나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 밖에서 붙잡고 제자들처럼 두려워하고 죽을 공포를 느끼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이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라는 주님의 실망스러운 이 말씀과 정반대되는 말씀이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내가 만나본 적이 없다.” 이 두 주님의 말씀은 극과 극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백부장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 길래 우리 주님이 그렇게 감동하셨는가? 이 트루커의 물그릇 비유와 원리가 똑같습니다. 백부장이 주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여러분, 이 말씀은 그 당시 사회적 관습으로 볼 때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백부장은 로마의 귀족으로 상류층입니다. 유대에 파견된 백부장의 그 위상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인 귀족 백부장이 자기 집에 있는 하인이 병들어 고통하는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서 지금 애걸하는 것입니다. 이 하인은 틀림없이 유대인 노예입니다. 로마의 귀족이 자기 집에 있는 노예 한 사람이 병들어 죽는 그것은 안중에도 없는 일입니다. 열 명이 죽어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일인데도 이 백부장은 병으로 죽어가는 이 하인이 자기 생명보다 귀한 것으로 붙잡고 주 앞에 나와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 있는 하인 한 사람도 자기 목숨처럼 소중한 줄 알고 이미 있는 하인에 대해서 그렇게 애틋한 사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 애걸하는 이 백부장의 믿음을 주님이 크게 보신 것입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주님이 이 말씀을 한 것도 정말 가시겠다는 의도도 있겠지만 다른 의도도 있습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의 위대함을 드러내서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다만 여기서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그 때 주님이 “내가 이스라엘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백부장의 믿음의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두 요소입니다. 자기 집에 있는 하인을 소중하게 생각한 것과 말씀으로 다 된다고 하는 말씀중심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믿음을 듣고는 이미 영으로는 집에 있는 하인의 집에 가셔서 진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시면서도 이미 영은 그 하인에게 가서 주님이 치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없는 빈 컵을 붙잡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게 아니라 채워져 있는 것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할 때 내가 준 은사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허구 속에, 빈 공간 속에서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믿음으로 살라는 주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여 믿음으로 살라는 주의 명령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은사가 없는데요. 나는 믿음으로 살 어떤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 말은 성립이 안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라고 생명까지도 마지막 까지 주님 앞에 믿음으로 드리고 가야 됩니다. 은사가 없습니까? 생명이 은사입니다. 여러분의 물질이 은사입니다. 여러분의 시간이 은사입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은사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이 은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 컵을 채워놓고 믿음으로 살라하지 빈 컵을 주시면서 믿음으로 살라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 안에는 주님이 계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주님도 의식 못하는 제자들, 그들이 진정으로 불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향한 주의 음성으로 들어야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 시대의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믿음없이 행한 게 너무 많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소원과 충동을 주께로 향하게 하고 말씀 안에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해야 합니다. 그게 믿음의 사람의 길입니다.

   맺는 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주님, 그는 창조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도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저 이것저것 해도 길이 없으니까 무작정 불러 보자가 아닙니다. 바람과 바다를 통치하시는 창조주를 믿고 나의 주되심을 믿고, 그 분을 불러야 믿음의 기도이며 믿음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도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주님이 감동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