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요한복음 4:3-4)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거쳐 가시게 되었습니다(요4:3-4).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세겜에서 북서쪽으로 11km 떨어진 언덕에 세운 북왕국 이스라엘의 새 수도와 그 주변지역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앗수르에 포로로 잡아간 이스라엘 사람들 대신 이방사람들을 이주시켜 사마리아에 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 사람들의 신앙은 혼합적인 모습을 띄게 되었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며 상종하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을 때 길 가시느라 피곤하셔서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다가 물을 길으러 온 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셨습니다(요4:5-7).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며 말을 거셨고(요4:8),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그녀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사실 등 그녀에 대하여 이미 다 알고 계심을 드러내셨습니다(요4:17-18).  그러자 그 여인은 깜짝 놀라며 예수님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절)라고 말했습니다.

   신12: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예배할 때에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예배할 것을 명하신 바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과 사마리아사람들은 모두 조상들이 받은 이 말씀을 따라 예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드리도록 택하신 장소냐 하는 것은 유대사람과 사마리아사람들 간의 오래고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거기에 성전을 지으려했었고, 하나님께서도 그 아들 솔로몬에게 거기에 성전을 짓게 하셨으며,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왕의 허락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온 유대백성들이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성전을 재건한 것도 예루살렘에서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언자 이사야도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2:3) 말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그 어느 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택하신 예배장소의 기원을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찾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란을 떠나가 도착하여 거주하게 된 것이 세겜이였고 거기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는데(창12:5-8), 세겜에서 북서쪽으로 4km에 그리심 산이 있고 거기서 다시 북서쪽으로 가까이에 훗날 사마리아가 건설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심 산은 훗날의 넓은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산인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모리아산이 바로 그리심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 또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라"(신11:29-30)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위하여 택하신 예배의 장소는 당연히 그리심산이라고 주장하며 그 산에서 예배를 드려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아보게 된 사마리아여인은 "그렇다면 우리와 유대인들 사이의 첨예한 논쟁거리인 이 예배처소의 문제에 대하여 이 선지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져서 예수님께 여쭌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물음에 답하시면서 어디서 예배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예배하며 어떻게 예배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예배의 본질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먼저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디서 예배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예배하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어디서 예배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때가 왔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즉 예배의 대상에 대한 바른 지식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함을 적시하신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이 이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것은 벌써 그 아들이신 자신을 참된 예배와 연관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아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일 것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에게 그것을 깨우치는 말씀이 2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먼저 2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너희" 즉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를 아는 지식과 그 아들을 통해서 계시되는 구원의 진리 위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즉 유대인들은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하신 말씀의 뜻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계시되는 구원의 진리를 유대인들은 다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쨌든 말씀의 진리는 유대인들로부터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한 말에서도 그러한 확신은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3:1-2).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의미하신 바는 구원자는 유대땅에서 나오실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는 그를 통해서만 드러날 것이며, 그를 아는 것만이 참된 믿음이 될 것이고, 참된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만이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 안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인지 "아는 것을 예배"하는 것인지를 가리는 시금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참 예배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님은 오늘 본문의 저자인 요한이 훗날 목도한 계시 속에서도 확인되었습니다.  계21:22를 봅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이어지는 23-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말씀하신 참된 예배를 어떻게 드릴 수 있는 것인지를 언급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함"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참된 예배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깨달아 알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진리의 영을 소유하게 되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진리를 확실히 깨달아 알아야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만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주어진 진리를 바로 알게 하시는데, 그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의 영을 받아 예배할 때가 이제 도래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신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그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서 이미 와계심을 가리키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절) 하자 예수님께서는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26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인해 우리에게 진리의 영이 생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며 그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깨달아 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질이 결여된 예배와 비본질적인 것들로 채워지고 장식된 예배는 갱신되어야 합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예배라고 할 수 없도록 심히 왜곡되고 변질되고 손상되었던 예배를 회복하는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의 회복운동은 개혁과 갱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교회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예배의 본질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참된 예배와 참되지 못한 예배를 분별하는 눈을 더욱 크게 뜨게 합니다.  우선 참된 예배는 어디에서 예배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입니다.  어느 교단에 속했느냐, 얼마나 좋은 예배당 안에서 예배드리느냐, 몇 부 예배에 들어가 예배드리느냐, 얼마나 많은 회중과 함께 예배드리느냐, 얼마나 좋은 오르간과 얼마나 훌륭한 찬양대를 가지고 예배드리느냐, 어느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예배드리느냐 하는 것은 참된 예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특정한 장소나 공간이나 시설 자체를 신성시하거나 우상화하는 것도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것도 이미 확인된 바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 되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는 예배라야 참 예배입니다.  우리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예배 중에 누구에게 박수를 치거나 찬양자가 찬양 전후에 회중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도 다 그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주의 전으로 나아오는 이들만이 참 예배자입니다.  그저 사람 만나러 오고 회의하러 오고 행사에 참석하러 올 뿐 하나님에는 관심 없는 이들은 예배자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그저 어떤 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자신의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써의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히 복된 삶을 허락하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고 힘껏 하나님을 찬양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뜻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입니다.  또 하나님을 만유의 창조주시며, 지으신 모든 세계와 인생과 역사를 모든 주권과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선하심과 의로 주관하시는 섭리주로 믿으며,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만사를 그의 뜻에 맡기며 전적으로 그에게 순종하고 모든 일을 오직 그에게 아뢰며 간구하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회복한 예배는 말씀중심의 예배입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설교만을 중요시하는 것은 바른 예배의 이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씀중심의 예배는 설교중심의 예배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모든 순서가 가진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하며 모든 순서 하나하나에 다 진지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설교 전에만 예배당에 들어오면 되고 축도만 받고 가면 된다는 사고는 전혀 예배자의 사고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소치인 것입니다.  받으려고만 하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고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감사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과 귀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희희낙락하며 느릿느릿 걸어오곤 하는 사람들은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꼭 예배가 시작된 후에야 어슬렁어슬렁 들어오고 그렇게 들어오면서도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은 예배자의 기본자세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회중이 모여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공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일도 있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한 인터넷 중계를 통해 예배드릴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예배는 하나님께서 회중으로 불러 모으시는 백성들이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함께 모이고 함께 흩어지는 것이 회중의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시작하는 순간도 중요하고 예배를 마치는 순간도 중요합니다.  시작과 마침을 함께 할 때 회중의 예배가 되고 예배하는 회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진정한 예배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모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파송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흩어지는 것은 그저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세상 속으로 파송 받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파송 받는다는 것은 세상 속에 흩어져서 숨겨지고 잊혀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에서 하나님께 다짐한 대로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받은 말씀을 잊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예배는 평소의 예배적 삶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배와 삶이 괴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삶은 예배의 연장이어야 하며, 예배는 우리의 예배적 삶이 농축되어 가장 아름답게 꽃피는 완성도 높은 순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그런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되고자 끊임없이 힘쓰는 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맞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예배에서부터 개혁이 이루어지며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