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일과 땅의 일  (시51:10-19,눅18:18-23)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는 담이 없는 세계여서 하느님과 사람과 다른 피조물들이 모두 한 집안처럼 살았습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막힘 없어서 대화가 이루어졌고, 사람과 동물들 사이에도 대화가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 것을 보면 동물들이 아담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이 하나의 생명 체계 안에 있었기에 거기에 분쟁이나 전쟁이 없이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죄가 들어와 인간이 타락하면서 벽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불신이 생기고, 사람과 동물들 사이에 간격이 생겼고, 마침내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남으로 하느님과 사이에 벽이 생겨 대화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가인과 아벨 형제 사이에도 간격이 생겨 결국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그리고 점점 죄악이 더하여지면서 더 많은 벽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다고 하므로 민족과 민족 사이에 높은 담이 생겨서 함께 살수 없게 되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서 말이 통하지 않으면 결국 생활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문화가 다르면 사상도 달라지고 서로가 함께 살수 없고 대립과 경쟁과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크고 강한 민족이나 나라들이 약하고 작은 민족이나 나라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일이 당연시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함께 협력하며 살기보다는 벽을 점점 높이면서 서로 적대시하며 경쟁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민족, 다른 나라 사이에만 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민족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이나 이념에 따라 분쟁하며 살고 있습니다. 남북의 분단은 바로 이념에 따른 것으로 같은 말을 쓰는 한 민족이면서도 벽을 높이 쌓아놓고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 안에서 지역으로 나뉘어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옛날과 달리 교통수단의 발달과 수많은 도로의 신설로 서로 오고 가게 되었음에도 서로의 마음에는 길이 뚫리지 않았으며, 높은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의심하고 받아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처음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하나였던 세상이 조각조각 나뉘어져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이 다르고, 사람과 자연이 나뉘었으며, 민족과 민족 사이의 삶이 다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사람에게 통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고, 자연을 이용하면서 파괴하고, 사람끼리 싸우면서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동맥경화로 혈로가 막혀 온 몸이 마비되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와 같은 형상입니다.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중대한 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시어 막혀 있는 모든 벽을 헐고 다시 하나의 세계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막힌 벽을 헐어 하늘과 땅이 하나되게 하고, 사람과 자연이 하나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모든 지역과 계층 간의 차별과 다툼을 그치게 하고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막혀 있던 대동맥과 같은 통로가 뚫렸고, 따라서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에도 큰 길이 활짝 열려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이 별개의 것이 아닌 같은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사는 삶이 곧 하느님 나라의 삶이 되었고, 육으로 사는 이 땅의 삶의 결과가 곧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에는 이 땅의 생활과 하늘의 일이 전혀 다른 것이었으며, 서로가 통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땅의 삶을 바르게 살면 그것이 곧 하늘의 보화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자와 삭개오

오늘 읽어 드린 말씀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 나와 영생을 물었다가 그가 가진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돌아간 이야기입니다. 부자인 관리가 와서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영생은 하늘의 일로서 이 땅에서 행하는 일들과는 무엇인가 다르게 행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현재 누리고 있는 삶과는 별도로 특별한 하늘의 진리를 통하여 영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관리를 기특하게 여기셔서 친절하게 계명들을 지키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관리에게 어떤 새로운 하늘의 진리를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계명들을 그대로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이 오래 전부터 가지고 지키려고 했던 율법과 그 계명들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하늘 나라의 삶으로 변화시키고자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제대로만 지킨다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관리는 자기가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영생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했기에, 무엇인가 또 다른 어떤 길이 있는 것이 아닐까하여 예수께 찾아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것은 그 관리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재물이 영생을 얻는데 걸림돌이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가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가 된 일은 땅의 일이고, 지금 그가 구하고 있는 영생은 하늘의 일로서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율법을 제대로 지킨 유대인이라면 부자가 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땅을 사지도 팔지도 못하게 되어 있어서 자기가 물려받은 땅에서만 소득을 얻는다면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나 그 조상이 남의 땅을 많이 사드렸고, 그것을 희년이 돌아왔을 때도 돌려주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땅에서 얻은 소득을 바탕으로 장사를 하여 돈을 더 벌어서 큰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었으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절대적 계명을 그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율법 조항들은 무시하고 넘어갔기에 그는 부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이 전혀 율법이나 계명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한편으로는 께름칙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정통으로 그 문제를 제기하시자 결국 근심하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간 이유는 그의 삶을 품위 있게 만들어주는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니면 경제문제와 영생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하나로 보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부자 관리와는 다르게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그 앞에서 스스로 자기 결단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삭개오는, 그가 갈망하는 영생에 이르려면, 그가 이제까지 혈안이 되어 모았던 재물을 처분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상 그가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그의 인격이 손상되었고,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으며, 하느님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뼈아프게 체험하고 있었기에 스스로 예수님 앞에서 결단하고 그 재물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땅의 경제적 행동이 바로 하늘의 영생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이런 깨달음과 결단을 인정하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도 이런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임금님은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오른쪽과 왼쪽에 갈라놓으시고 오른쪽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여기서도 이 땅의 일상적인 일들이 그대로 하느님 나라를 이어 받게 하였습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대접하고 나그네를 영접하며 병든 자들을 돌아보는 일은 지극히 일상적인 이 땅의 일들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한 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이 되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정반대로 그런 일들을 소홀히 한 결과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그런 일상적인 평범한 일은 하느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보다는 열심히 금식하고 십일조 내고 안식일 계명들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데 더 중요한 조건들이라고 믿고 일생동안 충실하게 그런 신앙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생활과 신앙을 별개로 생각하고 생활 속에서 행해야 할 작은 계명들은 소홀히 하고 신앙적 행동인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나 제사에만 열정을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런 신앙생활을 비판하시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계명들이 그대로 나타나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올바른 분별력을 키우자

우리는 흔히 교회 생활을 충실히 하기만 하면, 생활 속의 작은 잘못들은 다 가려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굳어지면서 우리는 생활의 잘못됨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기 시작하고 그리고는 마침내 좀더 큰 잘못으로 발전하여도 별로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다만 더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헌금도 더 많이 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들이 다 상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굳센 믿음을 지니면서 안심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에 떠들썩하게 나오는 사건마다 기독교인들이 그 주인공으로 문제가 되는 까닭이 바로 이런 신앙에 기인한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일상적인 삶에서 항상 정직을 추구하고 바른 삶을 세우기를 힘쓴다면, 어찌 부정 사건에 연루되며, 부당한 뇌물을 받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는 장로요, 집사요, 권사로 존경받는 신앙인들이 사회생활에서는 어찌 청렴결백하지 못하며, 불의한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여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국 땅의 일상적인 삶 속에 신앙이 깃들지 못하고 겉돌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동차 때문에 가끔 화를 내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남의 차고에 연락처도 적어 놓지 않고 차를 대는 사람 때문에 화가 나고 남의 차 앞을 가로 막아놓고 어디론가 가버린 사람 때문에 화가 납니다. 그래서 그 차창 앞에다 욕을 써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참습니다. 강단에선 거룩하게 보이던 목사가 자동차 때문에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작은 일 때문에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싸운다면 목사의 이미지가 형편없이 구겨지고 말 것입니다. 일상의 일이 곧 신앙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새삼 다짐하면서 화를 내야 할 때 오히려 웃으면서 넘어 갑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좀더 범위를 넓혀서 이런 원리를 적용한다면, 정치와 신앙, 국가와 교회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 둘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 와서는 정치나 경제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은 세속적인 일이고 교회에 와서는 거룩한 이야기만 해야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의 정치적 현실이 항상 여야의 대립, 지역감정에 따른 대립, 특정 정치인에 대한 호 불호(不好)의 대립, 진보와 보수의 대립, 요즈음 특정 신문을 둘러싼 대립 등으로 감정의 골들이 깊게 파여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교회에 끌어 드리면, 교회도 결국 양편으로 나뉠 수밖에 없기에 가능하면 그런 세속적인 이야기를 교회에서는 삼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속(聖俗)을 구별하려는 의식이 바로 문제입니다. 세속적인 세계는 우리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신앙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교회가 잘못되었음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모든 삶의 기준을 그 신앙에 근거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이 성경이 되어야 하고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실 정치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양과 염소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신문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 읽는 시간만 중요하고 신문 보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신문을 보는 것도 성경을 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이 없을 때 하느님의 나라 대신에 영원한 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만 보아서도 안되고 신문만 보아서도 안됩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신문을 읽고 분별력을 키울 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바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택함 받은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열심히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교회에 열심히 나와 말씀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우리의 일상적 생활이 그 신앙에 바탕하여 바르게 세워져야 합니다. 예배당에서의 생활 따로 하고 사회의 생활을 따로 하는 것은 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이 여러분의 일상적인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매일의 생활이 화내지 않으며, 언제나 정직하며, 언제나 선하며, 언제나 사랑과 웃음이 떠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적인 현실에 대해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성경을 열심히 볼 뿐 아니라 신학자들이나 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의 글을 많이 보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땅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들이 바로 하늘 나라의 일로 직결(直結)된다는 의식을 분명하게 갖고 매일 매일의 생활을 신앙으로 이끌어 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데,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일상적인 삶을 바르게 세우는 일임을 기억하고 매일 매일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유경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