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고 보고 들으면 감사이다   (신 29:1-9)  


2004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성도 여러분에게 진정한 감사의 제목들이 가슴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으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큰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올해 추수감사주일이 다가오면서 마음속에 점점 더 크게 울려오는 노래가 있습니다.
시편 126편 2절 전반부입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2004년 목양교회 추수감사주일이 웃음과 찬양의 축제가 되기를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4년의 추수감사주일은 두 가지 면에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적으로 대부분 경제 형편이 참 어렵고 분위기가 침체된 가운데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였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교회적으로 성전준공을 바라보는 가운데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어제 성전 종탑 부분의 비계를 제거했습니다.
보는 사람 모두가 성전의 모습이 훨씬 돋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종탑의 제일 윗부분은 전망대입니다. 어제 비계를 벗은 전망대의 모습을 보면서 저 전망대가 교회 건물의 일부분일 뿐만 아니라 혹시 수지 제일의 명소로 부각되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가운데 맞이하는 추수감사주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거의 끝내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깨닫고 보고 들으면 감사이다’라는 제목으로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자주 드리게 되는 말씀입니다만 성경을 읽을 때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이것을 전제하고 읽어야합니다.
이것을 ‘성서의 동시대성’이라고 하지요.
성경 말씀 가운데에서도 오늘 본문 1절의 말씀,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이 말씀은  특별히 오늘 목양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셔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던 해에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
이것이 1절 앞에 나오는 호렙산 언약입니다. 시내 산은 성경에 종종 호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이 호렙산 언약의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가나안 가까운 곳, 모압 땅까지 왔습니다.  
모압에서 조금 더 가 요단 강을 건너면 가나안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다시 한 번 언약을 맺을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신명기 29장과 30장에 기록되어 있는 모압 땅 언약입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판」은 “모압 땅에서 세우신 언약”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성경은 여러 종류의 번역이 있고 또 주석 성경들이 있는데  “새로 맺은 계약”이라는 제목을 붙인 번역판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주석들은 신명기 29장과 30장을 “언약 갱신”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참고하는 성경주석에는 모압 땅 언약은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기 두 달 전인 기원전 1407년 11월에 있었던 일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나 초기왕국 건설시대까지는 연대를 아주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든 일인데, 어떻게 연도는 물론, 달까지 말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무엇인가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했겠지요.
그 주석에 적힌 대로라면 오늘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3,411년 전 바로 이 무렵에 있었던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먼저 애굽에서 나올 때의 일, 광야에서의 일들을 돌이켜 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신명기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인데 신명기는 ‘명령의 반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요약’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신명기 29장과 30장은 모세의 세 번째 설교, 마지막 설교인데 이것은 요약 가운데에서도 압축된 요약입니다.
2절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은 애굽 땅에 내린 열 가지 재앙, 홍해가 갈라진 일, 이런 것들을 모두 말합니다.
출애굽기 전반부가 모두 이 말씀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5절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광야의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메추라기, 생수를 모두 말합니다.
7절은 광야에서 있었던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모두 말합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의 기록들이 이 두 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출애굽과 광야생활을 돌아보게 하신 하나님은 이제 호렙에서 맺은 언약을 재확인합니다.
모압 땅에서 언약을 새로 맺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맺은 언약의 요점을 추리고 쌍방이 도장을 다시 찍은 것입니다..
그것이 모압 땅 언약인데 그 골자는 30장 20절 전반부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매우 간단합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불변의 지침입니다.

목양교회가 서울 강남을 떠나 이곳에 와서 성전을 짓는 일은 종종 출애굽에 비교되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 성전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땅까지 온 것과 같습니다.
가나안 진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새 성전 준공을 앞둔 목양교회에 같은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교회에게만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2004년의 5/6를 다 보내고 올해를 돌아보며 감사주일을 지키고 있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중간에 한마디를 삽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4절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그렇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건만  너희는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걸어온 삶을 되돌아보며, 2004년을 돌아보며, 교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하나님, 나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옵소서, 보는 눈을 주옵소서, 듣는 귀를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걸어온 길, 이 나라가 걸어온 길, 우리 교회가 걸어온 길속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더욱 더 큰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내가 겪은 일들, 이 나라가 겪은 일들, 우리 교회가 겪은 일들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정으로 더욱 더 큰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이 있다면,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와 이 나라와 이 교회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래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의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이 찬송을 눈물을 흘리며 부를 수 있다면 역시 우리는 진정으로 더욱 더 큰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듣는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한 믿음의 귀가 필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합니다.
군대에서 하는 여러 가지 훈련 가운데 어두운 밤에 적이 접근하는 것을 부스럭거리는 소리, 발자국 소리를 통해 알아차리도록 하는 훈련이 있다고 합니다.
때로는 땅에 귀를 대고 땅이 울리는 소리를 들어서 적의 접근을 탐지하고 적의 숫자까지 알아내도록 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이 매우 어둡지요.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저는 지금 그것을 분명히 듣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어두울 때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악하고 어리석은 왕 아합 시절의 엘리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매우 지쳤습니다.
그는 호렙 산에 가서 굴에 머물렀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나가고, 지진이 있고, 불이 있고, 그 다음에 들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성경은 그 소리가 “세미한 소리”였다고 말합니다.(왕상19: 12)
그러나 듣는 믿음의 귀를 가진 엘리야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났습니다.

아합 왕 때만큼이나 이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믿음의 귀를 가지고,  지금 들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놓치지 않고 듣고 힘을 얻어 일어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시간은 나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차범근 축구감독이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 간증을 참 많이 했는데 그 때 그 분이 자주 하던 간증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로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데 다이얼을 돌리니까 통화 중이었다고 합니다. 급한 마음에 다시 다이얼을 돌리니까 또 통화 중, 계속해서 다이얼을 돌리니까 계속해서 통화 중이더랍니다.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수화기를 놓았는데 ‘따르릉’ 벨이 울리더랍니다.
받아보니까 자기가 통화해야 하는 상대방의 전화였다고 합니다.
이 일에서 교훈을 얻어서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 전화하는 일에도 힘썼지만 하나님의 전화를 받는 일에도 힘썼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전화를 자주 걸어주시더랍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전화를 자주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듣는 귀를 가져야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말씀을 듣는 일 중요성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잘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잘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 믿음이 자랍니다.

우리는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한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듣는 귀가 보는 눈으로 연결되고 발전되어야합니다.
욥은 많은 것을 깨달은 다음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 5)

라고 했지요.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발전했다는 고백입니다.

요즘 교회 오고 가는 길, 그리고 교회 주변의 단풍과 낙엽이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그것을 보면서 동시에 믿음의 눈으로 그 뒤에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크고 부드러운 손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오늘 저녁에 용인서지방 평신도선교대회가 저희 교회에서 열리는데 강사로 시각장애인인 안요한 목사님이 오십니다.
이 분은 30대 중반까지는 시각장애인이 아니었습니다.
정안자로서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갖고 유학을 준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믿음의 눈이 뜨여지지 않았습니다. 목사의 아들이었는데 그래서 이름도 요한인데, 아버지가 너무 고생하는 것을 보고 교회에 염증을 느껴 믿음을 버렸습니다.
신앙을 부정하는 말들을 마구하면서 ‘이것은 「안 요한복음」에 있는 말이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37세에 중도실명을 하였는데 그 때 믿음의 눈을 떴습니다.
다시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서 힘들게 신학을 공부했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낮은 곳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생애를 바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이 분이 하는 일을 남모르게 돕는 성도도 있고, 이 분이 책임지고 있는 새빛맹인선교회에 가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이번 평신도대회에 이 분을 강사로 모시는 이유는 이 분이 지금 저희 교회와 같은 지역사회인 용인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양로원 시설을 짓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준비하던 일인데 이 분의 나이가 60대 중반이니까 생애 마지막 사업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일을 시작할 때는 주민들이 혐오시설 들어온다고 심하게 반대해서 어려웠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착공을 하니까 건축업자가 성실하게 공사를 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잘 이뤄질 것으로 믿습니다.
같은 지역사회에 있는 교회들이 이런 일을 알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여겨져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육신의 시각을 잃고서 믿음의 눈을 떴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한동안 ‘눈 떴을 때의 손해와 눈멀게 되었을 때의 이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눈 뜨고 있을 때는 믿음이 없어서 손해 보는 일들이 많았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믿음을 갖게 되어 이익 되는 일이 많았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왜?’로부터 ‘비록’으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실 것입니다.  

이 분은 시각을 잃고 믿음의 눈을 떴는데 우리가 육신의 시각도 가지고 믿음의 밝은 눈도 가진다면 더 좋은 일이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기쁘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가볍다’ ‘마음이 무겁다’ 이런 말들을 합니다.
어느 동요작가는 우리들의 마음은 여름에는 파랗고 겨울에는 하얄 것이라고 했지요.
기쁜 마음, 가벼운 마음,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다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구원의 진리를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기도원에 들어가서 새해 목회계획을 세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목양교회가 걸어온 길, 특히 성전건축과 관련된 일들을 돌아볼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뤄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해 교회 표어를 일단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는 교회’ 이렇게 정했습니다.

우리가 깨닫는 마음을 가지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마음을 가지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부흥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마음을 가지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해서 하시려는 일을 다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마음을 가지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교만하지 않고 깨닫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이 찬송을 진정한 고백으로 부를 때, 주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참으로 아름다운 형상으로 빚으실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교만하지 않고 깨닫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교만하지 않고 깨닫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복 주실 것입니다.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지고 있으면, 깨닫고, 보고, 들으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깨닫는 믿음의 마음으로, 보는 믿음의 눈으로, 듣는 믿음의 귀로 여러분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세요.
2004년을 돌아보세요.
감사, 감사, 정말 감사, 진정한 감사, 뜨거운 감사, 감사충만의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감사가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기록에는 감사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성구사전을 통해서 확인해보면서 알았는데 성경에는 감사란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5경에는 감사와 관련된 말이 네 번만 나옵니다.
레위기7장 12절에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라는 말씀이 나오고 13절에 “감사제물”이라는 말이 한 번 더 나옵니다.  
그리고 15절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다음에 하나님을 찬양한 일이 출애굽기 15장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잠시의 일이고 바로 이어서 물이 없어서 하나님께 원망하였습니다.(출15: 24)
출애굽기 16장에 하나님께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사를 드릴 법 한데 출애굽기 16장에는 ‘감사’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는 르비딤에서 반석을 쳐서 생수를 얻은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도 ‘감사’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감사를 드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40년의 광야생활 없이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야생활이 단축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광야생활은 단순히 징벌과 고통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훈련의 의미도 있지요..
6절 뒷부분에 있는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하고, 성막을 통해서 제사 드리는 법을 훈련하는 유익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광야생활은 고생스러운 것입니다.
시내 광야, 성지순례 해 보면 대단히 거친 곳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이런 곳에서 60만 명이 어떻게 40년을 살았지? 정말 고생스러웠겠구나! 정말 하나님의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었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홍해를 가른 것을 감사하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감사하고,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를 감사하고, 언약을 맺은 것을 감사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 없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이런 훈련은 다른 형태를 통해서 하시게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지금 광야와 같은 형편 가운데 있습니까?
그 가운데 도우시기 위해서 임하는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세요.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세요.
하나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세요.
그리고 감사하세요.
그 광야가 물러가고 복지가 펼쳐질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끝 절인 9절을 보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요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입니다.
동시에 감사함으로 행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입니다.
이것도 진리입니다.
‘감사함으로 행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한다.’ 올해 추수감사주일에는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2004년의 추수감사주일, 목양의 성도들은 좀 특별한 마음으로 맞이하시고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나의 생명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갖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이하여 지나온 길을 감사함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감사충만의 추수감사주일을 보내고, 앞으로의 길을 힘 있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유관지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