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자들  (디모데전서 6:17-21)

아직도 여러분이 고정적 관념을 가지고, '재물은 복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계시는지요. 성경에 보면, 재물은 복도, 화도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리하도록 위임한 관리의 대상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관리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셈하리라'하는 그 뜻대로 분명히 책임을 물을 날이 올 것입니다. 경제학자 마르크스 웨버는 '자본주의의 최고의 선은 돈을 벌고 또 버는 것이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마르크스 웨버의 이 물질 중심의 사상을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부자의 개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부자는 육적인 부자입니다. 그리고 한 부자는 영적인 부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부자, 이는 육적인 부자인 것입니다. 이 부자란 재물을 자기의 뜻대로 사용하고 자기의 뜻대로 관리했던 사람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소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에 관하여서는 하나님께서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 비판의 결국은 지옥에 관한 말씀을 리얼(real)하게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 부자는 지옥에 갔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얼마나 견딜 수 없었던지 그 견딜 수 없었던 고통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바른 재산의 관리자가 되지 않을 때, 받아야할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떤 농부가 있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열심히 일해서 이제 거둔 곡식이 창고마다 가득 찼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이제는 좀 편하게 살자. 이제는 이만큼 걷어들였으니까 내가 이제는 좀 내 뜻대로 살아보자." 이런 생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을 이렇게 이어가십니다. '그 생명을 그 날밤에 하나님이 취해버리면, 그가 추수한 모든 재산들이 누구의 것이 되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육적부자는 결코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없다.'하는 말씀을 주님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 말씀은 '육적부자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천국적 삶을 살기가 아예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씀을 해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영적 부자를 예수님이 또 이렇게 가르칩니다. 종말의 날에 예수님이 선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에게 참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내가 배고플 때, 너희는 먹을 것을 주었지? 그리고 내가 목마를 때, 너희는 마실 것을 주었지? 그리고 내가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었어. 참 고마웠다.' 이 선한 사람들이 '아, 주님! 주님을 제가 만난 일이 없는데 제가 언제 주님을 만난 일이 있습니까? 만난 일이 없는데 괜히 그런 말씀 마세요. 송구스럽습니다. 그런 말씀하시지 마세요.' 이런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자, 소외된 자, 힘없이 억눌린 자, 그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재산을 관리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재산을 잘 관리하는 순한 청지기,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큰 은총을 입는다. 주님은 우리에게 극명하게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또한 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 중에 요즘 급박하고, 가장 힘주어 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영의 사람들은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출애금입니다. '돈을 사랑하고, 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유함을 얻어라.' 여러분, 사랑한다는 말은 스스로 종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내가 아내를 진실로 사랑한다.' 그 다음부터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자기 생애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재산을 사랑한다. 물질을 사랑한다.' 그러면 나는 물질의 종이 되는 것이지요. 재산의 종이 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진정한 관리자가 되어라.' 이것이 바로 출애금입니다. 하나님이 요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강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너희는 이제 선한 관리자가 되어라. 이제는 절대 저 물질에 종노릇하지 마라.'
여러분, 만약에 물질의 종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면, 물질에 종노릇했던 자기 우상화했던 이집트의 바로에게 내리던 재앙을 우리에게 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재앙, 그 성격상, 세 종류로 말씀드리면, 첫 번째, 재앙은 나일강을 피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나일강은 삼각주 지대에 곡창의 그 많은 곡물을 생산케하는 원천 바로 관개였지요. 이것이 만약에 쓸모 없이 되어버리면, 결국 이집트 사람들은 모든 소득이 다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힘은 바로 여기 삼각주 평야에 쌀 생산에 있었는데, 그 모든 재산이 다 자기들은 얻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다시 한번 해석하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너희가 재산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 못한다면, 관리권을 넘겨버리겠다라는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삶의 질을 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하니, 경제적인 측면으로서의 철학적 삶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리적 삶이 있습니다. 이 경제적 측면에서의 철학적 삶은 어떤 것인가? 내가 생각하고 철학화해서 그 철학화한 것을 경제생활로 적용할 수 있는 삶, 이것이 바로 경제적 측면에서의 철학적 삶입니다. 그러나 경제 측면에서의 생리적 삶은 어떤 삶이냐? '오늘 일당이 얼마다. 그 일당만 받으면 된다.' 노예가 작업하듯이 일당의 노예가 되어서 아무 생각과 의식과 목표도 목적도 없이 로보트처럼 일하는 그러한 사람, 이것이 바로 경제적 측면에서의 생리적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자, 자급 종료시간이 땡합니다. 철학적으로 사는 사람은 '아이쿠! 벌써 시간이 이만큼 갔나?' 그러나 생리적으로 가는 사람은 '지겨워, 어찌 이렇게 시간이 안가냐?' 그러다가 종료시간에 환호를 울리면서 뛰쳐나갑니다. 삶의 질이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 적어도 신중하게 영적으로 오늘 우리의 경제 흐름을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외자유치를 많이 하고, 그리고 우리는 일자리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국민의 삶의 질이 달라져버립니다. 이것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이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원하는 청지기로서 재물을 관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너희들은 생리적인 삶밖에는 살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섯 번째 이집트에 내린, 바로에게 내린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독종입니다. 독종은 몸에 피부병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대로 재산을 관리하지 못하면 몸의 건강이 해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16장 2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천사에게 대접을 주면서 진노의 대접을 가지고, 부어라 그 대상은 누구냐 우상에게 절하는 자에게 진노의 대접을 부어라. 그랬습니다. '부어라'라는 말씀 안에는 이것을 만약 붓는 날에는 독한 헌데가 온 몸에 번져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재산을 제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를 못하면, 거기에 틀림없이 지어지는 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윤리의 완전히 문란입니다. 재산을 선하게 잘 관리하면, 성윤리가 아주 건강해집니다. 이 재산을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관리 못하고, 나를 위해서 돈을 쓰면, 틀림없이 거기에 딱 붙어있는 것이 바로 성적 윤리의 문란입니다. 여러분, 올해 인류 중에서 300만이 AIDS로 죽어갔습니다. 우리 나라라고 성할 것 같습니까? 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건강이 나빠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꾸만 먹기 때문입니다. 많이 먹게 됩니다. 자꾸 먹으므로 비대해집니다. 비만은 모든 병의 원인이 됩니다. 여러분, 비만 되면 아주 큰 벌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벌? 살 빼야 되니까. 살 빼는 사람을 보면 애처롭고 불쌍스러워요. 저두 그 중에 하나 속합니다만, 정말 건강, 많이 먹어서 건강하고요, 이거 참 불행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이것 때문에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재산을 관리하면 이런 건강의 해침이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상기해 보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출애금하지 아니하면, 열 번째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장자의 죽음입니다. 장자의 죽음은 생명의 단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단절이 무엇입니까? 내가 물질을 사랑하고, 물질을 나의 삶에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 하나님이 무시됩니다. 하나님이 믿기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참 나의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겠습니까? 이러다 보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단절되어서 교회 밖으로 구원 밖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교단이나 또한 이 전국적 크리스천의 통계는 잘한다던지, 현 상태를 유지한다던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체감적으로 느끼는 오늘 우리가 사는 고장에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혹시 숫자는 그렇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이 얼마나 지금 떨어졌는지 모릅니다. 세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자칫하면, 생명을 잃는 자녀들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재산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돈의 종노릇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면, 우리의 영혼의 생명까지도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돈을 일만하게 뿌려라.' 그랬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하게 뿌리라.' '욕심이 잉태한 즉 죄가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람을 낳는다.' 그랬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끊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인류들을 보면 사상이 없습니다. 물리성 주의입니다. 공산주의가 어디 있고, 민주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전부다 유물주의에 빠져버렸습니다. 어디 요즘 온 인류를 보십시오.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바가 재산밖에 없습니다. 물질밖에 없습니다. 우리 나라도 1900년대에 검은 안경쓴 지도자가 나와서 하는 말이 '우리도 잘 살아보세.'라고 캐치 프레이져를 걸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삶이란 춘궁기 보릿고개 오면 소나무 연한 줄기를 꺾어서 그 안에 껍질을 벗겨서 그것을 먹는 것이라고 먹었습니다. 뿐입니까? 칡을 캐서 먹었습니다. 그것도 못 먹어서 사람들의 몸에 헌데가 나고, 그야말로 참 지금 생각해보면, 어쩜 짐승처럼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그 말을 들으니 환상을 보는 것이지요. 또 그들이 내놓는 용어는 생소하지만 아주 고무적이었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뿐입니까? GNP 그 때는 어디 방언 하는 줄 알았습니다. 또 소득증대, '소득'이란 그 때로서는 대단한 얘기입니다. 이런 전문 경제용어가 나오면서 모든 사람이 거기에 동의하고 빨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히 잘 살아졌습니다. 돈맛도 알았습니다. 그 때는 노동의 착취라는 건 생각도 못했습니다. 인권유린도 아예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여간에는 잘살아보자는 것밖에 몰랐습니다. 그야말로 멈출지 모르는 열차가 허공을 향하여 달리는 것같은 이러한 달림만이 그 당시에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바뀌었습니다. 유물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도 돈만 되면 팔아버렸습니다. 부자지간에 돈 때문에 법정투쟁을 하고, 원수가 됩니다. 형제지간에 유산 때문에 싸워서 결국은 원수가 되어서 제사때, 모이지도 않고 외유해버린 사람도 많았습니다. 거기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대인들이 하는 말들을 들어보셨습니까? 결혼대상자, 특히 남자 일번조건이 능력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돈을 벌 줄 아느냐. 돈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이 일번이 아니라구요. 돈이 일번이라구요. 저 성남에 일력시장에 나와서 하루종일 새벽부터 계속 기다리다가 일없어서 소주 먹으면서 한 분이 하는 말을 제가 TV에서 봤습니다. 마누라는 돈 못 번다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 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변했습니까? 열녀가 얼마나 많았고 효자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가 못산다고 한번 부모 박대한 적 있습니까? 우리는 적어도 신앙적이었습니다. 종교야 불교든, 샤머니즘이든, 유교든 신앙중심으로 살았던 저희들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북두칠성을 향하여 새벽마다 빌고 빌던 우리의 가치였습니다. 신앙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유교중심으로 교육받아서 가정을 중시여기고, 부모님을 중시여기고 보이지 않는 윤리와 도덕을 최고로 쳤습니다. '항상 착한 사람이 되어라. 착한 사람이 되어라.' 요즘 여러분 말씀 조심하십시오. 남의 자식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가는 그 어머니에게 뺨맞습니다. 요즘 착해 가지고 어떻게 먹고 사냐고. 능력 있는 아이가 되어야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잘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다가 LG. COM에서 조사한 통계를 보면, 3000명이 동의를 했는데 3000명중에서 54.6%가 '성공이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이렇게 귀결이 나고 말았습니다. 성공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여러분, 1960년대부터 한국의 말씀강단도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목표가 분명합니다. 신앙의 목표는 자아의 변화에 있습니다. 거듭나고 그리고 성화 되어 영화를 얻는 것이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강단의 말씀은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복받는 비결' 복의 근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당시에 병나고, 돈벌고, 그리고 나의 생각대로 추구하는 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바치고, 그리고 남에게 선한 일 많이 해라. 이래서 기복신앙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지상목표가 바로 어떤 데에 두었습니까? 물량주의였습니다.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 이것이 도대체 되는 말이냐고요. 여기다가 기독지성인들은 엉뚱한 행동을 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앞에 내어놓는 간판은 정의실천입니다. 그리고 목표는 우리의 삶의 환경을 바꾸어 놓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무엇이냐? 다름이 아니라 정치, 경제, 제도 구도 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소위 사회국면을 생각하고, 체류탄이 터지는 곳에 마치 조국을 구하는 용사처럼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지성기독인들이 하는 이 일에 결국 우리들은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아! 잘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의 최고의 목표구나!' 기억하십시오. 신앙의 목표는 잘사는 것에 목표가 있지 아니하고, 바로 사는 데에 목표가 있고,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내 영혼이 잘되는 데에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월이 흘러서 1990년대 중반부터는 교회가 점점 힘들고, 세상이 볼 때, 세상도 잘산다고 그러고, 교회도 잘산다고 그러고,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이 무엇이 있어요. 그러니 교회를 안오는 거예요. 달라야 가지요. 같으면 뭐하러 갑니까? 갈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래서 전도문 막히고, 이래서 교회가 성장을 멈추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제물은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라고 주신 나의 분깃일 뿐이올시다. 재산을 관리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버는데도 어렵고, 간직하는데도 어렵고, 쓰는데도 어렵습니다. 버는 것도 어렵고, 간직하는 것도 어렵지만 쓰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돈을 잘 쓰면 행복하지만, 돈을 잘못 쓰면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상승 작용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가난해서 분수대로 사는 것이 오히려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간 재산을 가지면, 더 가지고 싶고, 더 가지면 더욱 더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욕망의 종이 되고, 물질의 종이 되고, 결국은 이 욕망이 건강을 삼키고, 사랑을 삼키고, 명예를 삼키고, 주님을 삼키고, 인간된 본질을 삼켜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신문사가 현상금을 걸고 '돈의 정의를 바로 내리는 사람에게 1천파운드를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행운의 대상자는 수많은 경제학자나 윤리학자나 목사님들을 제치고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이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가 내린 정의는 이렇습니다. '돈이란, 천국 말고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권이다. 돈이란, 행복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갖다주는 공급원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 이 소년이 이러한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었는가? 신문을 배달하다보니까 부잣집도 보았고, 가난한 집도 다 보았습니다. 보고 느낀 바대로 쓴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주일날 다시 기억하십시오. 돈과 행복은 절대 무관합니다. 돈과 행복은 절대 무관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혹시 제물이 많습니까? 왜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재산을 여러분에게 맡길 뿐입니다. 여러분, 저희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시험 때가 되면 둘둘 말린 시험지를 가지고 오시지요. 그래서 손톱으로 찢고는 맨 앞에 앉은 아이에게 나누어주지 않습니까? 이만큼 줍니다. 너 이거 시험 다 쳐서 답안지 써서 내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뒤로 돌려주라고 나누어 준 것입니다. 오늘 소유를 많이 하시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돌려주라고 맡긴 거예요. 착각하지 마세요. 오늘 이 예배를 드리고는 꿈 좀 깨세요.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이 세대에 부한 자'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대에 부한 자라는 말씀이 있으면 결국은 또 다른 말씀이 침묵 속에 떠오르고 있습니다. '저 세대에 부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에 부한 자는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물질 중심이요, 자기 중심으로 사는 부자, 저 세대에 부자는 누구냐? 천국의 부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세대에 부한 자들아, 저 세대에 부한 자들이 되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금하라는 말씀으로 재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출애금하자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어떤 삶을 살아야 출애금하느냐? 첫 번째가 '마음을 높이지 말라.' 그랬습니다. 마음을 높이면 출애금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높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여러분, 부자가 되면 스스로 자기가 의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남보다 부지런해서 좋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리고 뿐만 아니라 머리가 좋아서 그리고 절약을 많이 해서 그래서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그와 반면에 가난한 자를 보고 비판을 합니다. '너희는 돈을 아무렇게나 쓰고,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르고, 너희는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합리적이지 못하고, 너희들은 조상 때부터 생겨먹은 것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야.' 이것이 마음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결코 윤리적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운수가 좋아서 부자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사람이 부자된 것을 보니 기도 많이 했구나. 이 사람이 구제 많이 했구나. 이 사람이 헌금 많이 바쳤구나. 이 사람이 천성이 좋은 사람이구나.' 이렇게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비성서적인 논리입니다. 성서의 논리 주체인 하나님으로부터 논리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맡겼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재산을 맡기고, 건강을 맡기고, 시간 즉, 생애를 맡겼다.' 이렇게 마음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과응보라든지 사필귀정이란 말이 왜 비성서적인 줄 아십니까? 인과응보는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냐? 그 원인이 어떤 데에 있느냐? 인간에게서 원인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성서적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지휘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가졌던지, 내가 무엇을 현재 받았든지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 뜻대로 하라고 명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마음을 높이지 마라. 마음을 낮추어라.' 돈 있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거드름을 피웁니다. 지식이 많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대체로 돈 많이 번 사람 보면, 무리한 용기가 많고, 용감한 사람이 주로 많이 돈을 번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나라의 한 재벌의 자서전에서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 우리 집에 있는 소 한 마리를 훔쳐서 가출한 사람이야. 지금은 내가 어떻게 사는 줄 알아? 전국민 돈 훔쳐서 소 많이 가지고 북한에 갔어.' 대단히 무식하고 용감합니다. 그것도 무슨 자서전이라고 써서 얼굴 붉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재산을 가졌든, 내가 얼마나 지식이 있든, 내가 얼마나 건강하든,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이 취하시면 취해볼 것이다. 아니, 나의 생명도 취할 수 있다.' 겸손하게 마음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출애금에 첫 번째 우리가 해야할 구체적인 행동, 바로 마음을 낮추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또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두 번째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라' 그랬습니다. 돈은 돌고 도는게 돈이에요. 여러분, 동전을 내어보세요. 동그랗게 생겼잖아요. 돌고 도는게 돈인데, 돈에게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나의 통장에 얼마가 있는데, 앞으로 내가 사는데 지장이 없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거기에 의지도 말고, 소망을 두지 말라. 소망을 두실 때는 하나님과 우리의 약속,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바로 약속에다가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하게 약속을 지킬 여호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출애금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찾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요?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라.'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누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린다는 말은 엔조이먼트(enjoyment)입니다. 이 말은 즐겁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히 주십니다. 그리고 후히 주실 뿐만 아니라 후히 준 것을 즐겁게 사용하실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앞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자기가 상상하고 기도하지 마시고 성경의 계약대로 언더라인(Underline)하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께서 만약 재물을 많이 받고 싶으면, '하나님, 여기 본문에 기록해 두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계약대로 하나님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얘기해야, 기도해야 부자가 되지. 쓸데없는 상상만 하고, 기도하니까 응답 못 받지. 앞으로 언더라인 하세요. 부자 되고 싶으신 분들은 언더라인 하시고, '하나님은 후히 주시는 분이다.' 이것을 가지고 기도하시면 하나님께 여러분에게 후히 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 이제 주신 것으로 즐거우면 되거든요. 많이 가지면 뭐해요. 즐거울 줄 알아야지. 즐겁게 해주시는 하나님이다. 즐겁게 해주시는 하나님은 결국 남을 도울 때, 남을 위하야 살 때, 즐거움이 옵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사랑은 고난에서 분명히 열매맺는 바로 사랑이다.' 고난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이란, 예수의 십자가의 나무의 열매가 바로 기쁨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쁨은 쾌락입니다. 그런고로 '너희는 정녕 주는 자가 되어라. 주는 자가 복이 있다. 늘 주기 위하여 받으라. 그래야 너희가 바로 출애금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선한 사업에 부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빙점을 쓴 일본의 기독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소원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내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남에게 어떻게 유익한 사업을 하겠습니까?' 기도하다가 그 당시에 가장 어려운 사업이 채소 장사였습니다. 그래서 채소장사를 하는데 그의 사업의 목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익을 적게 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그랬더니 그 도시의 전 시민이 채소를 사러 이 집에만 모여듭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채소가게들이 문을 닫습니다. 너무 잘되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독선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하다고 남의 사업을 망하게 합니다.' 관둬 버립니다. 여러분, 선한 사업을 꿈꾸고, 선한 사업을 위해서 사업하면, 여러분의 기업이 하나님께서 경영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네 가지 윤리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 처음 윤리가 무엇인가? '내가 너에게 선한 일을 하면, 내가 너에게 값을 것이 없다. 이것을 알고 난 후에 선한 일을 하라.' 만약에 내가 선한 일을 했다가 저 사람이 나에게 갚으면, 하늘에서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도로 깎여 버리고,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라.' 또 '주되 누가 주었는지 모르게 하라.' 또 더 나아가서 '준 다음에는 절대 기억도 몰라. 보상도 바라지 말라.' 그랬습니다. 경건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과 새해가 다가오면은 그가 아주 적절하고도 검소하게 산 다음에 남은 것을 봉투를 만들어서 '목사님, 이거 도울 자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전합니다. 왜? 자기가 전하면 자기가 영광을 받기 때문에 종에게 맡겨서 하나님의 종이 전하도록 합니다. 또 성숙한 선교는 해외 선교, 그리고 농어촌 선교, 그리고 특수 기관 선교, 자기가 직접 찾아갈 수도 없고, 바쁘기도 하고, 또 내용을 모릅니다. 목적 헌금으로 '이것은 오직 선교에만 써주십시오.'하고 연말이면, 하나님께 바치는 분이 많습니다.

여러분, 오늘밤에 우리 교회는 부천 시민회관에서 주일 밤 찬양예배 겸 결식 아동을 위해서, 결식 학생을 위해서 우리가 찬양예배를 드립니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학교에서 급식을 해줍니다. 방학이 되면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위해서 손길을 펼치지 않습니다. 방학 때가 되면, 그들의 배가 더 고파집니다. 이 아이들에게 한 손의 밥을 주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부천 시민회관에서 하나님께 마음껏 찬양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이름이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재산을 잘 관리해서 말씀을 성취하는 부자, 거룩한 부자들이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윤대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