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라!   (마가복음 4:1-9)


주님이 다시 바닷가에서 큰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는 비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비유를 통해 신비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특히 4장의 비유에서 가장 강조된 말씀은 듣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3절에서 “들으라”로 시작한 말씀은 9절과 23절의 “들으라”로 끝납니다. 그 외에도 “듣는” 것과 관련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들으라!”의 참된 의미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듣기는 듣는데 깨닫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말씀을 들어 왔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깨달았느냐’입니다. 들으라고 할 때 그 말은 듣고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깨달았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식을 쌓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열매를 강조합니다(8,23절).
깨달음이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열매는 행위입니다.
깨닫고도 행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의 문제는 듣지 못한 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행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듣는 자”의 문제

씨 뿌리는 자는 당시로서는 주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밭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씨의 문제나 씨 뿌리는 자의 문제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듣는 자입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공통으로 하신 말씀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2:7,10,17,29, 3:6,13,22).
귀 있는 자가 들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생명력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네 가지 땅

주님은 네 가지 땅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이 땅은 우리의 말씀이라는 씨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떤 땅과 같은지요? 예수님의 해석이 10절 이하에서 나옵니다.

1) 길 가
15절에서 해석해주신 이 땅은 완고한 마음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마음입니다. 오랜 세월 쌓인 고정관념으로 굳어져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적대적이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지만 자기들의 것만을 주장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논쟁을 하고 시험하고 배척하고 결국 교활한 방법으로 주님을 죽이는 자들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순교한 스데반의 표현대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마음입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이런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한 가지에만 익숙해지고 그것이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배타적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의 설교에만 익숙해지지 마십시오. 누구의 말씀이라도 은혜받기를 바랍니다.

2) 흙이 얇은 돌밭
16,17절의 해석에 의하면 경박한 상태의 신앙입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좋으면 기뻐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한 외부로부터 환란과 핍박이 닥치면 넘어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감동받고 주님으로 고백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좇은 것으로 인해 위기가 오니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합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들이 다시 돌아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3) 가시떨기가 많은 땅
18,19절에 나오는 대로 혼란하고 복잡한 마음입니다. 돌밭은 외부에서 오는 방해가 있는 경우라면 가시떨기는 내 안에 있는 문제입니다. 온갖 찌르는 욕심과 죄성이 가득합니다.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이 나를 찌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 걱정도 많습니다. 염려, 걱정이란 욕심 때문에 생깁니다. 말씀의 씨가 자라날 환경이 아닙니다. 잡초가 무성한 밭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영양분은 다 빼앗깁니다. 정작 알곡이 자랄 수 없습니다.
이 경우는 6장에 나오는 헤롯 같은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의 말씀을 달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 자신의 욕심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결국 요한을 죽입니다. 말씀은 헤롯의 양심만 흔들고는 죽었습니다. 열매는 없습니다.
10장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도 그런 예입니다. 10:17에 보면 그는 주님께 달려와 꿇어 앉아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22절에서 근심하면서 주님을 떠납니다. 왜 그랬습니까? 물질에 대한 욕심이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4) 좋은 땅
20절에 나오는 대로 말씀을 잘 받아들여 열매 맺습니다. 이 땅과 같은 마음은 한 마디로 겸손입니다 말씀을 흡수하는 자세도 좋고 겸손하기에 말씀대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땅을 가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려면 땅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파종 전에 땅을 갈아엎습니다. 비료를 주고 촉촉한 땅을 만듭니다. 그리고 씨를 뿌려야 자라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라는 중에도 계속 관리해야 합니다. 잡초를 뽑아주는 김매기를 하고 병충해 방지를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래도 한해를 만나고 태풍을 만나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맺은 열매기에 귀합니다.
교회 생활에도 그렇게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것을 견뎌내면서 열매 맺습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요?
영적으로 말씀이 잘 박히고 뿌리를 잘 내리고 좋은 열매를 맺는지 생각합시다.
오랫동안 단단하게 굳어 있는 길가와 같은 마음은 아닌지요. 워낙 잘 다져져서 웬만한 말씀에는 전혀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는 아닌지 생각하고 살펴보며 회개합시다.
이 네 가지 마음이 내 속에 다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길가 같고 어떤 부분은 돌이 많고 어떤 부분은 가시떨기가 우거져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옥토 같은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좋은 땅의 영역을 넓혀 가십시오.
네 가지 땅이지만 크게 둘로 나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 사람과 듣고 깨닫지 못하여 열매 없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길가처럼 어느새 굳어있는 마음, 흙이 얇은 돌밭처럼 얄팍한 신앙의 깊이, 가시떨기처럼
빨리 마음을 갈아엎어 부드럽고 씨가 뿌리를 내리기 좋은 땅으로 바꿔야 합니다.
갈아엎는 것이 회개입니다. 말씀 앞에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속적인 열매를 맺게 합니다.
얼마나 오래 들었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마음이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말씀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을 받는 나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나는 들을 수 있는지 생각하고 변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출처/김관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