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1-4)

미국 조지아 주의 한 시골 학교 교사인 마르다 베리씨가 당시의 갑부인 헨리 포드씨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용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를 위하여 천 달러를 기증해 주시면 좋은 피아노를 구입하여 어린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사연이었습니다. 포드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거기에는 한 개의 다임(10센트)이 들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베리 선생은 그 회답을 보고도 모욕감을 느끼거나 화를 내거나 절망하지 않고 10센트를 가지고 땅콩을 샀으며 그것을 기초로 땅콩 농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베리 선생은 작은 수확이 있으면 잊지 않고 포드 시에게 수확의 일부를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5년이 지난 후에는 피아노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기본금을 마련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감동한 포드씨는 처음에 부탁한 금액의 열 배인 만 달러를 보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몇 가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돈을 쉽게 주지 않는 포드, 10센트를 받고도 화내지 않고 감사하며 그것을 선용하는 베리 선생 그리고 수확의 일부를 반드시 포드씨에게 보낸 부와 경제 윤리. 더욱 우리가 마음에 새겨 둘 교훈의 축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 성실한 삶 그 자체이며 거기서 모든 축복된 플러스 알파가 되는 것입니다.

이 근원적인 복된 삶의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성실한 삶의 내용으로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명령을 지키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시간 자체가 축복된 삶이며, 하나님은 그 시간의 영속에서 복을 더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과 더불어 살아감이 축복이라면 주님을 보실 수 있는 마음 문을 열어야 함은 무엇보다도 먼저입니다.
계시록 3:20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에는 참 놀라운 깊은 듯이 있습니다.
“서서”라는 헬라어는 ‘헤스타카’(εστηκα)로서 이미 오셔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하고, “두드리노니”는 ‘크루오’(κρουω)로서 지금도 계속 두드리는 것이며, “먹고”는 ‘데이프네소’(δειπνητω)로서 교제를 나누며 즐기는 식사를 말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 곁에 계시며, 언제나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주님과 즐기면서 주님과 교제하는 축복된 사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근원에 대하여 주님은 주는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받기 위해 마음을 열기도 하지만 주기 위해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 말씀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6:38 말씀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주고 받음의 원리에 관한 놀라운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 문이 열리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우리는 그것을 복되다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음을 열어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모리아산 번제물로 바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자기의 꾀를 통하여 잘 살아보려 했지만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벧엘 광야에서 마음 문을 열어 하나님의 복을 약속 받았던 것입니다.

루디아가 마음 문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바울 일행을 돕는 사역에 동참하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남에게 전도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과 사랑을 주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구제하는 것도 먼저 마음이 주어진 결과의 나누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된 삶을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은혜의 복은 예배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예배의 시험은 “신령과 진정”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말은 헬라어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εν πνευματι και αληθεια)인데 직역하면 “영과 진리로” 또는 “영과 진리 안에”입니다.
이 말은 영과 진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외적인 형식, 즉 장소, 시간, 제도 등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되며 오직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 가운데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영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온 몸과 마음, 곧 전인격을 드리는 헌신이 없는 물질 중심적인 예배나 금욕주의적인 예배, 그 밖의 외적 매체를 중심한 예배는 하나님께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이 보실 때 헛된 제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주관적 감상중의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자기주의적 입장에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달음질을 했으며, 뽕나무에 올라갔으며,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를 만날 수 없다는 상황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결국 자신의 신분이나 환경을 극복하고 결국 주님을 만나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껌을 씹는 것,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 예의 없는 자세,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잠자는 것 등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은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에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예배를 통하여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2. 건강의 복은 하나님이 치료자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믿음과 헌신의 시험에 합격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는 가나안 여인이 딸의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눈물겨운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치료자라는 사실을 확신한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소원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가혹한 한 마디를 하시면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는데 가나안 여인의 대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빌립보서 2:25-30에 에바브라디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어 고난을 당할 때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위하여 연보를 하여 그것을 로마에까지 전달하였는데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이 중병에 걸려 죽기에 이르러서도 헌신적인 봉사를 하여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왔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치료자이십니다.(출 15:26)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믿음 있는 자에게 의로운 해가 되시는 예수께서는 치료의 관선을 발하여 치료함을 입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는 은총을 입게 됩니다.(말 4:2)
예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습니다.(마 8:17)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벧전 2:24)

이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시험에 합격할 때 건강의 복을 받습니다.

3. 물질의 복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아 하나님께 온전하게 헌금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받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시 50:10-12)
그런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찢으신다고 하셨습니다.(시 50:22)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 가는 자들은 복을 받게 되는 원리를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마 6:19-20)
이와 같은 물질의 올바른 개념이 정립된 사람은 온전하게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헌금의 기준은 십일조입니다.

말라기 3장에서는 십일조를 드리는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 했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는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도적질”의 히브리어 “카바”(עבק)는 원어상 “속여 빼앗다” “약탈하다”란 뜻입니다.
이는 십일조와 헌물이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위하여(민 18:24, 28), 압제받고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신 14:29) 제정된,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의무였다는 점에서 이처럼 십일조 헌물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소유를 약탈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생활은 황충을 금하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모든 과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으로부터 복되다고 말하게 되는 복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의 “황충”은 메뚜기과의 벌레인데, ‘에켈’(לכא)이라는 황충의 문자적 뜻은 “먹어 치우자”를 뜻하는 바 실제적 황충일 뿐 아니라 모든 재물을 파괴하는 세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찬양하면서, 실제적인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신앙 생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 모으는 능을 주셨지만 우리는 내가 잘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처럼 착각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 그 재물로 말미암아 가정도 후손도 멸망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 했는데(갈 3:9), 우리가 믿음을 가진 자라면 온전하게 하나님께 헌금하는 시험에 합격하여 자손 대대로 복을 받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십일조와 헌물을 통하여 시험하시는데 그 시험에 합격하면 물질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4. 후손의 복은 자녀를 통하여 시험을 하시는데 합격해야 복을 받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번제단에 제물로 바치는 시험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이 복을 받은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2장을 보면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중히 여기다가 자식들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고, 며느리는 해산하다가 죽고, 그 후손은 멸절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나는 비참한 결과를 당하게 됩니다.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젖떼면서부터 하나님의 성전에 올려 보내어 하나님께 드림으로 온 이스라엘의 빛이 되게 했고, 그 후손이 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후손이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리석음의 죄를 범치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됩니다.
믿음 안에서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식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고 애쓰지 말고 자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심어 주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심어주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37:25-26의 말씀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았도다”

여러분의 자녀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되는 비정상적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자식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은 안 계십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과외입니까?
남들이 해 주지 않은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을 해 준 것입니까?
명문 고등하교.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한 세상을 살으신 연로하신 분들에게 질문해 봅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먹이고 그렇게 잘 길렀던 자녀들이 지금 여러분에게 얼마나 효도하십니까?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신앙 교육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르치는 것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자손 대대로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의 자녀를 통하여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에 합격해야 후손의 복을 받습니다.
결코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한 자식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한나의 기도로 사무엘이 되었습니다.
모니카의 기도로 어거스틴이 되었습니다.
요게벳의 기도로 모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시험을 하십니다. 우리가 그 시험에 합격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았습니다.(마 21:20)
일을 해야 할 손으로 일을 하지 않을 때 그 손은 문둥병이 발했습니다.(출 4:6)
정욕 시험에 합격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낙제한 르우벤은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35장, 49장)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에 4:14)

미국이 낳은 유명한 설교가 중 한 사람 윌버 체프만 목사의 간증입니다.

청년 목사로 작은 교회를 사역할 때 서부에 살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지만 다녀올 돈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체프만 목사님은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장로님이 주일 예배 때 목사님의 모친이 위독하니 기도해 달라는 광고를 하였습니다. 그날 밤 교인 중 은행가 한 사람이 목사관에 들러서 체프만 목사의 손에 수표 한 장을 쥐어 주었습니다. 수표는 서명만 되어 있고 금액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얼마를 쓰든 필요한 액수를 적어 넣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하는 목사에게 그 집사님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목사님, 염려하시지 말고 충분히 경비를 쓰시며 고향에 다녀오십시오”
그 후 체프만 목사는 설교 시간에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금액을 기입하지 않은 엄청난 수표를 주시며 빌립보서 4:1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출처/박청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