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줄의 삶인 인생 (눅 16:19-31)

어릴 때 마을에서는 단오절이 되면 동네 어귀 느티나무에 그네를 메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단오절을 축제로 즐겼던 것이 생각납니다.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서 그네뛰기, 씨름, 탈춤, 가면극 놀이 등을 즐기며 여자들은 창포에 머리를 감고, 민가에서는 차륜병을, 왕궁에서는 제호탕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단오절의 절정은 역시 그네 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네는 삼겹줄로 잘 꼬여진 것이어야 터지지를 않습니다. 두결줄의 그네는 금방 터져 버리고 맙니다. 당연히 그네를 뛰다가 줄이 터져 떨어져 인명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네는 삼겹줄로 잘 꼬아서 나무에 매달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시골에서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은 소를 먹이는 것인데 소를 이끄는 줄을 타래라 합니다. 그 소 타래도 역시 삼겹줄로 꼬여진 것이어야 쉽게 터지지 않습니다. 황소를 말뚝에 묶어 놓으면 두겹줄 소타래는 금방 터져 버리지만 삼겹줄 타래는 웬만해서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인생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두겹줄의 인생으로는 탄탄한 생애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딘가 불안하고 모자람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겹줄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일생을 감사함으로, 그리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단순히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그것을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식들을 잘 양육하여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을 축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출세 좀 했다고, 세상적으로 무엇인가 한 가지를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을 일생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좋으면 어느 한 가지가 좋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서, 모든 것이 감사하고 모든 것이 평안하며 모든 것이 은혜로운 삶! 그것은 삼겹줄의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에게서 우리는 몇 가지를 먼저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부자는 물질 관계는 탄탄하지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았지만 물질 관계는 좋지 않았습니다. 어느 편도 원만한 축복된 삶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이야기의 결론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축복된 인생을 살아왔는가 입니다. 말할 것 없이 더불어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 생활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질서의 개념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위치 질서입니다. 적당한 장소에 적당한 사람이, 적당한 물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역할 질서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생활을 남용해서도 안되고 경시해도 안되고 포기해도 안 되는 것이 역할 질서의 기본 자세입니다.
셋째는 관계 질서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사회학자들이 갈파했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모든 분야에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기본적인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생의 삼겹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삼겹줄의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1.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된 줄입니다.(대신관계)

오늘 본문의 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31절 말씀을 보면 “모세와 선지자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살아 생전에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들을 깨우치는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고 이웃에 대해서도 무관심했습니다.

돈이 많았기에 좋은 옷을 입었고, 좋은 음식을 먹었고, 자기의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존재케 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존재의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에게는 내세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내세의 소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데 이 부자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동물은 땅만 바라보지만 인간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인간으로 번역된 ‘안드로포스’라는 헬라어는 “위를 본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위를 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적 상황에 눈을 돌려 땅의 것만 바라보았습니다. 결과는 마땅히 받아야 할 음부의 고통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생애는 실패의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삼겹줄의 삶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삼겹줄의 삶 가운데 첫 번 째 줄부터 그에게는 끊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33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이 있습니다.
요한 삼서 2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의 첫 번째 메시지도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첫 번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 곧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인생의 삼겹줄의 삶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을 항상 먼저 튼튼히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른 곳마다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하는 모든 것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조카 롯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롯에게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기름진 땅이었고 소돔과 고모라의 부귀와 영화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이루어진 모든 결과는 불타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을 맺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도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믿음 있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합니다. 교제 생활에서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인간적인 생각을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을 순종하게 되고,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의 나사로에게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이 튼튼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엘리에셀’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이었고, 나사로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사람의 이름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비유 가운데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삼겹줄의 첫 번째 줄이 잘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부자는 음부의 고통을, 나사로는 낙원의 즐거움을 누리는 결과를 갖게 된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사람과 관계된 줄입니다.(인간관계)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관계 또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인생의 두 번 째 줄입니다.
보편적으로 교회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 이상하게 사회 생활에서 실패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말할 것 없이 인간 관계의 문제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기술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사업이 잘 안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의 대부분을 살펴보면 인간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십일조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는데 인간 관계에서는 이상하게 불편하고 화목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외톨이가 되고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당 안의 예수를 믿는 것과 예배당 밖의 예수를 믿는 것이 항상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결과가 얼마나 실패적인 삶이 되는가를 깨닫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행일치, 학행일치, 신행일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또 다른 면의 삼겹줄입니다.

나만 잘났다는 교만에서는 인간 관계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빌립보서 2::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렇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인간 관계가 참으로 튼튼합니다. 인간 관계의 실패는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자기 도취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관계는 항상 긍휼이었고, 겸손이었고, 섬김이었습니다. 인간관계를 가질 때에는 항상 자신을 상대방보다 낮은 자리에서 대화하셨던 것입니다.

남을 존중할 때 남이 나를 존중해 줍니다.
남을 좋게 이야기할 때 남이 나를 좋게 이야기해 줍니다.
시부모 불평하는 며느리는 참으로 보기 민망합니다.
며느리 흉보는 시어른들 그럴 수 없이 추해 보입니다.
남편 욕하는 아내가 가장 가련해 보입니다.
아내 흉보는 남편의 모습, 정말 꼴볼견입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회사를 불평하는 사원이 불쌍해 보입니다.
자기가 몸담고 영적 축복을 받는 교회를 불평하는 사람이 가장 가련해 보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인간 관계는 주는 원리에서 시작됩니다. 마음도, 사랑도, 물질도, 모든 것을 내가 먼저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보시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보시에도 삼시(三施)가 있습니다. 첫째는 법시(法施)로서 진리를 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재시(財施)로서 물질을 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무외시(無畏施)로서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교회생활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 이익만 차리면 그렇게 추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거기서 참으로 가련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삼겹줄의 두 번째 줄입니다. 이 줄이 우리의 삶을 튼튼하게 해 줍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사랑하는데는 사랑의 윤리가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사람을 사랑하고(love person),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use things).
그런데 사람이 물질을 먼저 사랑하고(love things). 사람을 이용합니다(use person).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실패의 삶, 실패한 결과뿐입니다.

3. 세 번째는 물질과의 관계된 줄입니다.(대물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만 중요하고 물질 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삼겹줄의 삶인데 세 번째 줄이 바로 물질 관계의 줄입니다. 이 줄이 있어야 비로소 인생은 삼겹줄이 됩니다.

일찍이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은 악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지식으로만 얻는 것이고 물질은 해악한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물질 세계를 악의 세계로 정의하고 금욕주의를 제창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 그리고 물질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생육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아브라함에게 물질의 복을 주셔서 은금이 풍부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 관계를 바르게 갖는 것입니다. 물질이 귀하지만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면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셨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말했습니다.
“제 아무리 회개를 하였다 하더라도 돈주머니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 회개를 믿을 수 없다”

인간이 물질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수단이 물질입니다. 이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해도 바른 관계를 가지 못하면 그것은 오히려 악이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깨우침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물질 문제에 깨끗지 못한 사람은 절대 물질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질 관계에 정직한 사람은 분명 물질의 복을 받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교회의 예산을 사용하는데 한 치도 부끄럼 없는 사용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하나님의 돈을 겁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철저하게 인간적인 생각으로, 마치 어디서 그냥 들어온 돈처럼 (아니 그런 돈도 함부로 쓸 수 없는데) 쉽게 생각도 없이 제멋대로 사용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사람의 눈을 속인다 해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모든 것을 아시고 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디 할 일 없어 하나님의 교회의 헌금으로 자기의 유익을 챙기고 자기의 얼굴을 나타내고 자기의 멋대로 사용합니까?
각 부서의 예산 집행에서도 아껴 쓰고 절약하고 보다 유익하게 사용하는 습관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남으면 더욱 소중하게 관리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마치 쓰지 못해 안달이나 하듯 안 써도 될 것을 일부러 찾아가면서 허비하는 경향이 있다면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물질 관계를 잘해야 합니다.
드릴 것을 드려야 합니다. 드려야 하는데 드리지 않으면 헛된 돈이 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물질 관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남의 돈 빌려쓰고 갚지 않는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이웃을 도와야 할 때 물질로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일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복을 받을 기회를 잃는다는 심정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물질로 도와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입니다.

왜 본문의 부자가 음부의 고통에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이 끊어졌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의 줄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물질 관계의 줄이 썩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는데 그는 모든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날마다 축복을 노래하는 것 같았는데 그는 날마다 저주의 탑을 쌓아 갔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마쳤을 때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음부의 불꽃이었습니다.

왜 나사로가 낙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을 놓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 이웃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부자의 집 대문밖 찌꺼기를 주워 먹었지만 남을 해롭게 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생을 마쳤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낙원의 아브라함의 품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인생은 삼겹줄의 삶입니다.
그 어느 줄 하나라고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바른 관계의 줄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먼저는 하나님이요, 다음은 사람이요, 그 다음은 물질입니다.
삼겹줄은 두겹줄보다 튼튼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삼겹줄의 삶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들이 이와 같은 삶을 통하여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출처/박청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