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공동체의 생활   (고전 12:12-31)

올바른 교회관이 정립되지 못하면 교회는 예수께서 세우시기로 한 ‘에클레시아’가 아닌 인간의 집단으로 전락하게 되고 인간이 모인 공동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실레이아’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율법이나 교리나 신조나 신경이나 교회 법이나 신학이 아니며 사랑과 용서입니다. 사랑과 용서만이 참 자유를 주고 치유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성전이나 율법이 아니며 유전이나 전통이 아니며 신조나 신경이 아니며 교리나 신학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교세 확장이나 종교 사업이나 왕국적이거나 제국적인 선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지배나 정복이나 군림이나 처단이나 제거에 있는 것이 아니며, 반목과 질시와 대립과 대결과 원수시하는 것과 적대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사명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사랑과 용서로서 가능합니다.
사랑을 새 계명으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실천될 때 산 위의 동네가 되는 것이며, 등경 위의 등불이 되는 것이며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가 복음의 역사를 통하여 광야에 화초가 피게 하고 말랐던 시냇물을 흐르게 하며 낮은 골짜기를 높게 하며 높은 산은 낮게 하고 이 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교회의 참 모습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즉, 가난한 자나 부자나, 지식 있는 자나 무식한 자나, 지위가 잇는 자나 낮은 자나,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때문에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교인들은 분쟁이 있을 수 없고 서로 사랑하며 생사고락을 함께 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교회, 즉 거룩한 공동체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하는 자의 심령이 신령과 진정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령(πνευμα, 프뉴마)은 인간 요소의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고귀한 부분으로서 성령과 상통하는 것입니다.(살전 5:23, 롬 1:9)
진정(αμηθεια, 알레데이아)은 예배에 있어서의 모든 거짓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아름답지 못한 문제들 때문에 스스로 실망을 하면서 교회를 등지는 사람들이 잇게 됩니다. 그것은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교회에 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경솔해서는 안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함께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죄를 짓기도 하고 실수를 하기도 하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을 보고 들으면서 스스로의 신앙생활이 흐트러지거나 쉽게 남을 정죄하거나 그로 인해 스스로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식입니다. 곧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입니다.,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나 스스로 조심하면서 나로 말미암아 다른 지체에게 아픔을 주지 않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자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그와 같은 개인주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파괴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 말씀 한 구절로서도 우리 성도는 개개인이 얼마나 존재의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이며 지체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머리는 3, 눈은 4, 코는 5, 입은 6, 귀는 7, 목은 8. 팔은 9, 다리는 10개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답은 ‘괴물’입니다. 숫자 3,4,5...는 함정일 뿐입니다. 문제는 이런 괴물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둘인 교회는 통일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성교회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의 하나는 허수아비 예수님이고 다른 하나는 목사이거나 장로이거나 등등입니다. 다리가 열 개 넘는 교회도 많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이리 가자 저리 가자 합니다. 그래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는데 발이 많은 교회는 기도원이 있는 산으로도 못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웃고만 넘길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교회의 현실을 풍자한 지적이고 보면 우리는 다시금 올바른 교회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생활이 되며 거룩한 공동체 생활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깊이 배워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잘 감당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14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먼저는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움을 통한 믿음의 확신을 갖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거하라”는 말은 ‘메네’(μενε)라는 말인데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머무르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결코 신앙생활을 확신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이 기초가 되지 않은 신앙생활은 항상 문제를 유발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16-17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확신 있게 하는 성경 말씀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런가 하면 성경은 이와 같은 바른 말씀 위에 생활하기를 싫어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3-4의 말씀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은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귀에 듣기 좋아야 듣고 자기 개인적인 마음에 맞지 않으면 듣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온전하게 교회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8:11절에 이런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에 굶주리면 여름 실과처럼 때가되기 전에 시련을 이기지 못하여 떨어지는 열매가 되리라”

바로 그렇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자기의 위치를 모릅니다. 자기의 위치를 모르면 자기의 할 일도 모릅니다. 자기 분수도 모르고 경거망동합니다. 이것이 말세 교회의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올바른 교회생활을 하려면 자기 위치부터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모르고는 애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야당인지 여당인지 모르고는 정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느 교회 교인인지도 모르고서는 그 교회 교인으로서 아름다운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알아야 자기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모를 때 인간은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인간이 자기 위치를 일어버리게 되는 몇 가지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역대하 26:16절에는 웃시야의 교만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웃시야는 강성하여지므로 교만하여졌습니다. 교만해지니까 자기의 위치를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위치를 분간할 수 없게 되니 자기의 할 일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만 분향하게 되어 있는 제도를 깨고 왕으로서 분향하려 하는 우를 범하게 되고 그 결과 문둥병이 발하여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합니다.

말씀이 없으면 자기 위치를 모르고 자기 할 일도 모릅니다. 그리고 교만하여지면 말씀도 잊어버리게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지 못하면 교회 생활이 실패케 된 함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말도 하고 그것 때문에 그 말에 걸려들어서 시험에 든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현명하게 하는 사람은 절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와 관련되지 않은 일이라면 절대로 말하지 않는 습관이 교회 생활을 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스스로 실패하고 많은 사람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이 많이 하고 그 많은 말들이 결코 유익하지 못한 쓸데없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과정에 있어서 생각 없이 의견을 말하게 되면 일을 하는데 있어서 거침이 되는 존재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슬픈 말들 가운데 소방차라는 말이나 거침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내가 하필이면 성령의 불을 끄는 소방차 역할을 해야 하고 왜 하필이면 내가 온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진행하는 일에 거침돌이 되어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조심 없이 말하고 기도 없이 일을 하다가 이런 일에 말려 드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에서 맡기는 일에 열심히 충성은 하지 않고 직임, 즉 자리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직임이라는 것은 손은 손 노릇, 발은 발 발 노릇해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성도는 많든 적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주님이 주신 일이라면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의 일을 충성스럽게 해야 하는데 자기가 해야 할 일에는 소홀히 하면서 다른 직임에 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일년 내내 말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바로 교회 생활을 실패케 하는 3요소입니다. 이런 일 모두 말씀을 바로 배우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 집사같이 살아야 합니다. 돌에 맞아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엘리야 선지자같이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우상에게 머리를 숙일지라도 결코 변치 않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니엘 같이 살아야 합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워서 자기의 위치도 알고 자기가 해야 할 일도 바르게 수행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거룩한 공동체의 생활은 선한 일을 실천함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10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갈라디아서 6:9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디모데후서 4:7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렇습니다.
바울의 생애는 정말로 그 자신이 고백한 말씀처럼 선한 싸움을 싸운 생애였습니다.
요셉의 생애도 선한 싸움을 싸운 생애였습니다.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종으로 갔을 때나,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있을 때나,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나 언제나 그는 선으로 살았습니다.
원수 갚을 기회가 있어도 복수하지 않고 선으로 그들을 대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높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교회 일을 하면서 선한 일을 통하여 서로 연합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행해질 때 교회는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교회 생활은 연합을 통한 조화가 특징입니다.

특히 성가대를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성가대의 특징은 찬양의 하모니입니다. 명문 음대 수석 졸업을 했을지라도 전체 성가 대원의 소리에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기만의 그 잘난 독특한 소리가 나올 때 그 소리는 전체를 흐트러뜨리게 됩니다.
교회 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몸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지체는 여럿입니다. 그런데 몸의 지체들이 다투는 것을 보았습니까? 항상 연합입니다. 그리고 조화를 이룹니다. 그것이 몸의 신비로움이며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다리를 잘 못쓰는 장애자는 상대적으로 팔 힘이 강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손끝이 일반인보다 훨씬 민감합니다. 어느 한 부위가 고장나면 그 부분이 고장나서 활동을 못하는 만큼 다른 지체가 그 일까지 감당해 주는 것이 우리 몸의 신비로움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몸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을 들어봅니다. 요한복음 17:20-21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피땀 흘리시면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조화를 이루지 모하며 지체로서의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가 되는 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힘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죽여서 혹은 빼앗아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어항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았습니다. 먹이도 많지 않았습니다. 한 마리가 생각했습니다. “저 놈만 없으면 내가 저 먹이를 다 먹을 수 있는데” 그래서 싸웠습니다.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물고기가 썩는 바람에 살아 있던 물고기도 오래가지 않아 죽었습니다.

둘째는 타협입니다. 이는 서로 협상해서 반씩 차지하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이 최선인 것 같지만 이것은 대립이며 견제입니다. 이 결과 둘 다 무능하게 되고 결국 아무 일도 못하게 됩니다. 상대방을 견제하는 데 신경을 쓰다보니 비생산적이고 비능률적인 생활 관습으로 스스로 지쳐 능력도 사장됩니다.

셋째는 조화입니다. 이것은 하모니입니다. 개성은 개성대로 발휘합니다. 그러면서 상호 협동하여 상호 보강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나의 부족을 상대방의 장점으로 보강하고 상대방의 부족함을 나의 장점으로 충족시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성가대원들입니다. 우리가 부를 노래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론 작곡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지휘자는 성령님이십니다.
여기에는 조화가 절대적입니다. 누구하나 개인적 소리가 나와도 하늘나라 성가대는 0점입니다.
너의 부족함을 나의 장점으로 보강하고 나의 약함을 너의 강함으로 보충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공동체 교회의 생활입니다.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는 아름다운 코로스를 형성하여 조국 대한민국과 세계를 향하여 하늘나라 성가대로서 멋진 찬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공동체로서 성도들의 생활입니다. “주여! 이 말씀을 듣는 사람마다 하늘나라 성가대원으로서 아름다운 삶의 노래를 부르게 하옵소서”

출처/박광현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