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고전15:8-11))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려서 경험한 부모의 품이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은 대인 관계나 사회생활에서 문제가 없습니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잘 극복합니다. 부모 밑에서 적당한 칭찬과 적당한 책망을 잘 소화해낸 사람은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았거나 학대를 당했거나 상처를 받은 사람은 온전하게 살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부모의 품에서 안식을 경험한 자녀는 부모의 품을 기억하고 잠을 이룹니다.

부모의 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걱정과 두려움에 잠을 설칩니다. 폭풍이 일어나는 바다에 버려진 배와 같습니다. 부모의 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사랑과 용납입니다. 이것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명예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인격적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방치해서도 안 되지만, 과잉보호해서도 안 됩니다. 잘 한 것은 칭찬하고 못한 것을 책망해야 합니다. 부모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미래는 자녀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녀들의 미래는 부모의 품에 달려 있습니다. 보호자와 양육 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들에게 독초를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독초를 먹는 자녀들은 자신에게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지독한 독을 토해 낼 것입니다. 부모를 보면 그 자녀와 가정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부모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폭력적이면 하나님을 폭력적으로 생각하고, 부모가 무책임하면 하나님도 무책임한 분으로 생각하고, 부모가 감정적이면 하나님도 감정적이라고 생각하고, 부모가 관용하지 않고 엄격하면 하나님도 인색하고 엄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왜곡됩니다. 이런 아픈 경험이 있습니까? 부모에게서 얻는 잘못된 이미지들을 빨리 잊어버립시다.

하나님은 우리 부모와 다른 분입니다. 부모는 우리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부모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육신의 부모 보다 더 귀한 것이 영의 부모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칭찬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은 세상을 잘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감사함으로 하루를 마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때로 실수하고 잘못해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하나님 아버지”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하나님 아버지”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느 좋은 부모를 모신 자녀 보다 다 잘 살수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어려서 필요하지만, 영의 부모는 인생을 살면 살수록 더 필요합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육신의 부모의 역할은 줄어들지만,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과 관계는 날이 갈수록 중요해집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치유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 대한 일정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생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작품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든지 원하지 안든지 어떤 인생이 되어갑니다. 여러분은 남자로, 혹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셨습니까? 자신의 혈액형을 선택하셨습니까? 부모를 선택하셨습니까? 황인종이 되고 싶어서 되셨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싶어서 되셨습니까? 현재의 신장과 체중, 머리 색깔, 얼굴 모습을 원하셔서 되셨습니까? 여러분 중에 늙고 싶어서 늙으시는 분 있습니까?

정년퇴직을 하고 싶어서 하십니까? 병들고 싶어서 병드는 분이 있어요? 사고 나고 싶어서 사고 납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다 내 능력 밖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를 뿐입니다. 인생이 하나님 선물이라면 잘났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못났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로써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1. 나의 나 된 것은(8,10).
바울이“나의 나 된 것은”하고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 만약 바울을 세상적으로 소개한다면 그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높은 학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당시 세계에서 최고인 스승에게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히브리 민족에게서 엄청난 존경을 받던 가말리엘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혈통을 가진 자입니다.
바울은 가풍이 잘 닦여 있는 베냐민 지파의 혈통을 갖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지파 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문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자를 선택할 때, 먼저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전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입니다.
1970, 1980년대만 해도 한국 사람이 미국에 한 번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미국으로 유학하려는 사람이 미 영사관에서 비자를 받으려면 영사를 웃겨야 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대화를 하면서 어떻게 영사를 웃길 수 있습니까? 이것은 그만큼 미국 비자를 받는 것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당시에 최강대국인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하는 말처럼 로마시민권이 그만큼 위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능통한 자입니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바울은 육법전서를 달달 외우는 사람입니다. 판, 검사와 변호사가 법을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능통한 자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세상 적으로 말할 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람입니까? 그러나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부터 이러한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8)문자 적으로는 "낙태" 하듯이 난 자란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세상 적으로 꽤 잘난 인생이었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혈통적으로는 순수 유태인 계보인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랍비로서 당대 최고로 존경받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으로 봐서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집안 출신입니다. 유대인 공회가 인정할 정도로 촉망받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자신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로는 자신의 이런 조건들을 심한 말로 "배설물"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빌3:8) "배설물"이란 단어는 "쓰레기"혹은 "오물"(새번역)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단어의 본 뜻은 "똥"이란 뜻입니다. 실제로 영문 KJV 성경에는 "du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인생은 보는 관점에 달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문, 학벌, 재산, 지위 같은 것을 인생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들을 "똥"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 자신도 예수 믿기 전에는 이런 것들을 대단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 들어와서 보니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오늘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아직도 세상 적인 조건들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아직도 참 신앙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분들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재산이 배설물로 보이고, 권력이 쓰레기로 보이고, 지식이 오물로 보이고, 외모나 명성이 똥으로 보이는 경지가 돼야 합니다.

그는 예수 믿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본명은 사울 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임금 이름이 사울입니다. 사울 왕은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아마 그래서 베냐민 지파 유대인들은 왕의 이름을 따서 사울이란 이름을 많이 붙였던 것 같습니다. 사울 왕처럼 출세해라!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울"이란 이름을 버리고 "바울"이라고 고쳤습니다. "바울"이란 "작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위대해 보이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서 보니까 너무 작습니다. 사도들 가운데는 가장 작은 자요,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때 그는 하나님이 주신 외적인 조건들을 자신의 것인 양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 신지, 메시야가 누구 신지 모르면서 자기 신앙이 제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짜로 잘 믿는 사람들을 오히려 잡아 가두고 돌팔매질을 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세상에서 크게 보였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작게 보입니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이 바라본 인생입니다. 오늘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십시오. 혹시 남들이 갖지 못한 좋은 조건 때문에 교만하지는 않으십니까?

재산 때문에, 지위 때문에, 학벌 때문에, 외모 때문에 잘났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모든 조건은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내가 만든 게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된 것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신앙심이 있어서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뿐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내 인생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출생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자만하지도 말고, 반대로 낙심하지도 마세요. 다만 내 인생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지극히 작은 자라(9).

지난주에 '이야기 설교학'이란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뇌에는 좌뇌와 우뇌가 있습니다. 좌뇌 역할은 언어기능 분석적, 상징적, 추상적, 합리적, 디지털, 논리적, 일시적, 직선적입니다. 우뇌 역할은 비언어적 기능, 통합적, 구체적, 직관적, 비합리적, 아날로그, 전체적, 비 일시적, 공간적입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 사건을 좌뇌로 접근해본다면 "예수 님이 먹이신 사람의수는 몇인가" "무엇으로 먹이셨는가" "처음에는 무엇으로 먹이셨는가"등의 질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등입니다. 우뇌로 접근해보면, "예수 님이 왜 먹이시려고 하셨을까" "왜 제자들에게 그런 불가능한일을 하도록 부탁하셨을까" "어린아이는 왜 도시락을 내 놓았을까" "마침내 기적의 빵이 자기 앞에 왔을 때 이 아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등입니다.

신명기6:5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기에서 보면, 가슴이 제일먼저 나오고 다음에 지성(지식)이 나오고, 맨 마지막에 의지적인 행동이 나옵니다. 이 사실은 교육이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내용이 됩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결과는 지성 적 교육(이성교육)은 삶과 아무런 연결 없이 연구가 가능한 것입니다. 객관적 탐구로써 신앙이 없이도 학문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가슴교육(heart 중심교육)은 삶과 연결되지 않는 교육은 절대로 생각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삶입니다.

좌뇌의 역할이 IQ(지능지수)라면, 우뇌의 역할은 EQ(감정지수)입니다. 신앙은 IQ(지능지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뇌의 역할인 EQ(감정지수)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는 지능지수로 살았지만 예수 믿은 이후로는 감성지수로 살았습니다.

바울이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사도로서 그 사역을 감당할 때에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바울은 정통성이 늘 문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님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직접 예수 님의 제자라기 보다는 뒤늦게 예수 님을 만나고 그리고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바울의 사도의 정통성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바울 서신에 보면 자기가 사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는 말을 하는 것 같이 사도로 하면 서열로 제일 마지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일 후배고 제일 말단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도로서 주의 일을 하는데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를 핍박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데 제일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현장에서 제일 앞장 선 사람이 바로 바울 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핍박할 때에 더 나아가서 다메섹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이 바로 바울 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에 장점도 많이 있고 약점도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돌아볼 때에 나는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사람이고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격이 없는데, 나는 무익한 사람인데, 나는 주의 종으로서 가치가 없는 사람인데, 그런 고백을 늘 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410장은 19세기말의 위대한 전도자였던 무디와 같이 활약했던 다니엘 웹스터 휫틀이 가사를 쓰고, 맥그라나한이 곡을 붙인 것입니다. 이 찬송은 휫틀이 디모데후서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아썼다고 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 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 곳도 난 알 수 없도다. (후렴)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말은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휫틀도 자기 자신을 "이 쓸데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존심이란 사전적인 의미는 "남에게 굽히거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자기의 위신이나 위엄이나 체면을 세우려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자존심도 없느냐?" 하고 흉보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이 자존심이 없어지고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찬송을 쓴 휫틀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세우지 않습니다. 자기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화가 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존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정받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인정받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여기지만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내가 앉을 자리가 어딘가 하는 것을 신경 쓰지만 우리는 그런데 마음을 쓰지 않고 처음부터 맨 끝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칭찬 받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설교를 하는 저 자신은 어떨 것 같습니까? 저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는데, 부끄럽게도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정받고 칭찬 받기를 원하는 제 자신임을 발견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다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어머니학교를 다녀온 자매 님들 이야기가 참 좋았는데, 한번 참석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참석할 때마다 은혜가 새롭다고 합니다. 가정세미나가 그렇습니다. 한번들은 지식으로 가정이 치유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조금 은혜를 받고 치유를 받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대개의 경우 다시 돌아갔을 것입니다. 낮은 자존 감이 다시 상처를 받지 않았습니까? 다시 완전주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다시 낙심과 좌절의 구렁텅이로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다시 죄짓는 습관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다시 메뚜기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독수리의 담대함과 용기를 잃고 다시 참새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치유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지극히 작은 자 의식을 갖고 살 때 은혜의 삶을 살수 있는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삶의 증거입니다(10).

은혜 받은 자는 반드시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가 없는 은혜는 헛된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든지 깨닫는 날부터 언제 어디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하나님의 은혜의 네 가지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겸손입니다"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자은 자라...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 신약성경의 2/3는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으며, 사도행전 9장부터는 사도 바울의 일대기입니다. 12사도 보다 더 위대한 강력한 능력의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해 나타난 능력과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립니다. 오히려 "교회를 박해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고 사도로 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즉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죄인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직 주님의 은혜만 자랑할 뿐입니다. 은혜를 잊지 않으니 겸손하고, 겸손하니 더욱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잠18:12).

감사와 기쁨의 충만한 삶입니다."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자신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된 것을 생각하면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넘칩니다. 그래서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함이 넘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했습니다(고후5:15).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환난 중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항상 "기쁨과 감사"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하나님은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굳게 강하게 견고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개인적으로 고질적인 질병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하나님의 족하신 은혜로 인해 기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자는 더 많은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기도합니다.

비전과 목표입니다"나에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한 것은"하나님의 은혜에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여 거룩한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오직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집중하여 성실과 열심과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습니다. 허무한 인생이 은혜를 받으면 거룩한 사명이 생깁니다. 은혜는 "복스러운 소망과 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과 성실을 다해 일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품게 된 세계 선교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함의 비전 때문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 재능, 물질, 정력, 심지어 생명까지도 투자하고 헌신할 수 있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행20:24).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투자 없이 대가 없이 헌신 없이 이루어지는 꿈은 없기 때문입니다. 꿈을 위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수 있는 헌신과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이 "집중력"있는 사람입니다. 집중할 때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지도자 디모데에게 "은혜 속에서 더욱 강하여지라"고 권면 했습니다(딤후2:1). 은혜가 없이 소망이 없고, 은혜와 사명이 없이 열심과 성실과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증거 했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찬송가 356장 4절의 가사에는“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받은 “만 가지 은혜”가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냥 별 생각 없이 찬송이니까 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그 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나를 구원하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미 죽어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육신 적으로 따져도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 죽음의 죄에서 건져서 생명으로 옮기신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혜를 언제 받았습니까? 로마서5:8절을 봅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일 때에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값없이 주셨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하셨습니다.

나를 인도, 보호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시편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셨고, 잠언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편66:9절에서는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라고 확실한 보호를 말씀하십니다.

나의 미래를 보장하시는 은혜입니다. 세상은 장래의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수많은 보험 상품들이 나와 있지만 영의 생명까지 보장하는 보험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세상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바쁘게 살며,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쾌락에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장래가 확실하게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예수생명보험증권’을 소개합니다.

요한 복음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이어서 11:25-26절입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주님의 이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보험증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 종류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요? 그 보험은 육신의 생활을 조금 더 안정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는 전혀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이를 때까지 모든 육신의 생활과 영의 생명을 보장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감사의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 온 세월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고난과 절망까지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임을 믿고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지켜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은혜는 범사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계명대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철저한 율법주의자가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방장관이었던 국군중앙교회의 이준 장군은 귀감이 될만한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고 뛰어나 육사생도의 최고의 영예인 대표 화랑 출신이며 서울대 심리학과에서 위탁교육을 받아 육사 교관을 지낸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비 하나회원으로 5공 정권 때에 시기와 견제를 받아 오지와 한직만을 돌아다녔으나 그 고난 속에서 절제와 인내를 배웠고, 지금도 공석이나 사석에서도 부하들에게 존댓말을 할 정도로 온유와 겸손의 "인격"을 갖추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날마다 나라와 민족과 부하들을 위해 새벽 기도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결국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 때에 참 군인으로 인정을 받아 군단장을 거치지 않고 4성 장군으로 진급하여 1군사령관이 되었고, 김대중대통령 말기에 국방장관에 중용 되어 역전의 용사가 된 것입니다. 이 장로님은 한 간담회에서 160명의 고위장교들을 모아놓고 장관 취임한달 동안에 10여건의 인사청탁을 받았다고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용서하지만 이후에는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도 청탁을 하면, 진급에서 탈락시키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업무상 호출시 외에는 공관 출입을 금지했습니다. 군대의 진급 비리는 대한민국 사회의 모든 비리의 온상이며 뿌리입니다. "인사가 만사"라고 하는데 히딩크 감독과 같이 진급인사에서 오직 규정에 따라 공정성을 회복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선함과 영광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이며, 바로 성령 충만한 성도가 해야할 일입니다. 목회자는 이러한 성도를 바라보는 것이 기쁨이자 자부심입니다. 세상에 들어가서 오직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진리대로 살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야 합니다. 교회에서 실력과 인격과 신앙을 갖춘 국가적인 인물과 세계적인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과 영향력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결코 하나님의 사람,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무익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자기 자신의 모든 일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 사도로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 만큼 많이 수고하고, 바울 만큼 많이 일하고, 바울 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 만큼 많은 선교 여행을 다닌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전도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 만큼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 만큼 많은 서신을 저술한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훌륭한 전도자요, 훌륭한 학자요, 그 귀한 일들을 감당하면서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매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히고, 풍랑을 만나고 수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다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한 것이 바울 자신의 능력이나 결단으로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가 이 일을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일을 감당했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이런 공적이 나타났다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수고하고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긴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감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익하고 무가치한 자신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사도로 세우시고 일을 시키시고,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귀한 일들을 감당했다고 하나님 은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웨슬레는 사람을 자연인, 율법인, 중생 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종교인들은 삶 속에서 감격, 기쁨, 감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종교를 수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중생인(거듭난 사람)들은 예수 님을 영접하고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구원의 확신, 소명의 확신, 은사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들은 예배 중심의 생활, 예수 중심의 생활, 교회중심의 생활을 합니다. 삶 속에서 감격, 기쁨, 감사,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납니다. 바울은 은혜 받은 사실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주문진 서울의원 원장은 그 동네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구역식구로 정해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예배를 인도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시장에서, 부둣가에서 구역식구들을 찾아가 기도해 줍니다. 그 원장은 자기가 은혜 받은 사실을 이웃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태풍 매미 때 울산에 한마을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태풍오기 전 공무원 한 사람이 배 200척을 육지에 대피 시켰고 철저히 준비한 결과 피해를 보지 안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 선물입니다. 정해진 기간동안만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위나 권세도 잠깐의 선물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루는 업적이란 것들도 다 보잘것없는 것들입니다. 조만간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돌아갈 내세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인생을 바로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하나님 선물입니다. 인생의 업적도 하나님 선물입니다. 자랑도 말고, 낙심도 말고 그냥 열심히 감사하면서 사십시오. 다만 세상사는 동안 내세 준비 하나는 확실하게 해 두시기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고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속죄를 받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자녀의 자격을 얻어 놓으십시오. 세상사는 동안 땅의 영광을 쌓아 놓지 마시고, 하늘 영광을 쌓아 두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때에 영광스런 삶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서 최고의 뉴스를 꼽아보면 한 해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 지난 한 해 동안의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가 고백할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라고 고백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 되새겨보고 감사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가 시작될 때 새해에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지극히 작은 자라는 의식을 갖고, 내일을 준비하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를 담대히 증거 하시는 성도 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원영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