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특권과 의무  (로마서 2장 1 ~ 16절)
  
근자의 대중문화에 비친 기독교의 모습은 지나치게 부정적이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박중훈 주연의 [할렐루야], 이영애 주연의 [친절한 금자씨] 그리고 최근의 전도연 주연의 [밀양]과 같은 영화 속에 기독교는 함부로 다뤄지고 심지어 조롱거리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에서 오늘의 기독교를 향해 강펀치를 날립니다. “너나 잘하세요!”

  이 영화에서 기독교는 엉터리 전도사를 통해 그려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속죄를 외치고 성경말씀을 외칩니다. 그러나 뒤로 이 전도사가 살인마에게 고개를 숙이고 돈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돈을 주님을 위해  유용하게 쓰겠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이 엉터리 전도사같다고 비판하면서 주인공 금자씨의 입을 통해 따끔하게 충고합니다. “너나 잘하세요!”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한국인들 눈에 비친 기독교는 그렇게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종교 선호도를 보더라도 천주교 40%, 불교 37%에 비해 기독교는 22%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는 물론이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단연 기독교에 대한 선호도가 으뜸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한국인은 기독교 때문이 아니라 오늘의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답게 살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빨리 이런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바꿔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독교를 믿어야 하겠다.”라고 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너나 잘하세요!”라는 조롱을 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아직 가본 일이 없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장차 선교여행의 도움을 얻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에 자기 소개를 하면서 특히 자기가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부분은 이방인에게는 물론이지만 유대인들에게도 반드시 복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의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해 나갑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한 마디로 말하면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특별한 백성이란 특권을 누리고 자랑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다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택받은 백성의 의무는 까맣게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유사한 문제가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원 받은 성도, 하나님의 축복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는 등한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들도 잘 못하면서 남들에게 문제 있다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너나 잘하세요!”라고 오히려 손가락질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조금 더 확연히 바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 회개의 특권과 의무

   롬 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이방인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정죄하고 있지만 자기들도 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농장에서  버터를 사오곤 하던 제빵업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띠지는 않지만 언제부턴가 버터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이상하게 여긴 제빵업자가 사온 버터를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버터의 무게가 이전보다 더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화가 치민 제빵업자는 그 농장 주인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농장 주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집에서 어떤 저울을 사용하고 있습니까?"하고 묻자 농장 주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버터의 무게를 잽니까?" "그것은 간단하지요. 1파운드짜리 빵의 무게와 같게 만듭니다" "그 1파운드짜리 빵은 어디에서 사오는 거요?" 그러자 농장 주인은 고소인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늘 저 제빵업자한테서 사다 먹습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 제빵업자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비판하고 문제를 삼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눈이 멀었습니다. 비판하지 못하고 문제 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됐을까요? 4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범한다고 해도 인자하게 용납해 주시고 참아주신다고 유대인들이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죄와 허물을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빨리 회개하고 그 죄와 허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입니다. 유대인의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특권은 누리면서 의무는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바로 징계하시거나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인자와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빨리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인자를 베푸시고 오래 참아주시는 것은 우리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죄를 그냥 없던 것으로 덮으시지는 않으십니다. 죄는 회개 없이는 용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뜨거운 눈물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살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그들에게 오늘도 질책이 쏟아집니다. “너나 잘하세요!”


2. 말씀의 특권과 의무

   롬 2: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율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결국 율법 없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타이완에 구걸해서 백만장자가 된 사람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답니다. 샤오라오다라는 사람인데 10년 동안 거리에서 구걸하며 돈을 모아 은행에 3000만 위엔을 예치해 놓았답니다. 원래 농사를 짓던 사람인데 농사로는 주식 조차 해결하기 어렵게 되자 구걸을 시작했답니다.    구걸을 하다 보니 적성에 맞아서 수입이 짭짤하더랍니다. 그래서 아예 “직업 거지”로 나서게 됐답니다. 워낙 구걸재주가 뛰어나서 유치원생에게서 10위엔을 받을 정도랍니다. 이제 구걸 능력을 전수하겠다는 생각으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제자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1)목욕 횟수를 1년에 두 번으로 제한할 수 있어야 하고, 2)추운 날씨에도 거리에서 잠을 잘 수 있어야 하며, 3)몸에 상처가 났을 경우 상처가 곪을 때까지 약을 사용하지 않고도 참을 줄 알아야 하고, 4)지저분한 몸으로도 생활할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돈을 갖는 데만 몰두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돈을 모아 백만장자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거지처럼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돈은 벌 줄도 알아야 하지만 잘 쓸 줄도 알아야 합니다. 돈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쓸 때 그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 백반장자 거지와 같습니다. 율법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열심히 외웁니다. 열심히 공부합니다. 생명처럼 소중하게 율법을 보존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 삶 속에서 말씀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합니다.

   이들의 문제를 2:13절이 지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간직하는 것 그것만으로 다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달리 율법을 듣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없는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남다른 특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들은 사람은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무입니다. 유대인의 문제는 율법을 소유하는 특권은 누리려 하지만 그 율법을 실천하려는 의무는 등한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도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열심입니다. 여기저기 성경통독 사경회가 열립니다. 교회마다 통독 대행진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일도 열심입니다. 갖가지 성경공부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진행 중입니다. 성경 묵상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Q.T.와 최근에 렉시오디비나와 같은 묵상 방법들이 개발되어 열기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은 있으나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의 질책이 쏟아집니다. “너나 잘하세요!”

3. 신앙생활의 특권과 의무

   롬 2:28-2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지만 그 할례는 단지 육신에 받은 할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진정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육신의 할례만을 자랑하면서 실제로는 마음의 할례는 받지 못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이라는 말은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거짓 눈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익숙한 관용어구입니다. 특히 오델로와 같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악어가 큰 먹이를 잡아먹을 때 눈물을 흘립니다. 마치 “나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물을 잡았지만 죽어 가는 동물을 생각하면 너무나 불쌍해서 눈물이 나온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가들 이야기에 의하면 악어가 큰 먹이를 삼키려 입을 크게 벌릴 때 눈물 샘을 자극하게 되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바닷물이나 음식물 때문에 몸에 흡수된 염분을 배출하기 위해서 눈꼬리 쪽에 있는 염류선의 배출관으로 짠 물을 배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악어의 눈물은 속 마음과 전혀 관계 없는 육체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고 단지 생리적 현상으로 흘리는 눈물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유대인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직 육체적인 할례만 받은 채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모두가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맺으시면서 명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태어나 8일이 되면 다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저들에게 주신 특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은 사람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의무입니다.

   29절에 유대인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칭찬은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유대인들이 특권만 주장하면서 사람에게 칭찬 받으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정작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칭찬은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도 다름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사람들의 칭찬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사람들에게 유명해 지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 하다보면 자칫 칭찬 받기 위해 위선적 행동을 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마치 악어의 눈물처럼 슬프지도 않는데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억지로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이기는 하나 매우 방탕하게 살았던 총알택시 운전사와 목사님이 천국에 가게 되었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총알택시 운전사보다 훨씬 더 칭찬을 들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하나님은 총알택시 운전사를 더 칭찬하셨습니다. 기가 막힌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어보자 하나님은 대답했다. "너는 늘 사람들을 졸게 했지만 택시기사는 사람들을 늘 기도하게 했느니라."

   우리가 늘 하나님의 칭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 스스로 만족한 신앙생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초점을 맞춘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사람들의 칭찬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질책이 쏟아집니다. “너나 잘하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시대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기독교 자체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때문에 기독교를 좋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권을 주장하기 보다는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하겠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칭찬에 초점을 맞춘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출처/박봉수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