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못했어요   (요일 1:9~10)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내가 잘못했어요』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 자식, 부부, 형제, 친구, 이웃 등 수많은 사회조직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라는 상호연관을 떠나서 살수 없기 때문에 원만한 대인관계는 더 없이 중요합니다.
더구나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완전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성격이나 이해관계로 인한 마찰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찰을 잘 해결하지 못하면 많은 슬픔과 아픔과 불행을 가져옵니다. 부딪힘과 마찰은 피할 수 없지만 이를 부드럽게 하고 치료할 수 있는 길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내 탓입니다” 이말 한마디면 부부간, 부모자식간, 형제간, 이웃간 의 수많은 대결과 싸움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렇게 자기 잘못을 시인한다는 것이 쉽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데 자아가 깨어지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는 겸손과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낮추고 깨어지고 회개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 알아야 됩니다.

첫째로, 아담이 타락했을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깨어지고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랬다면 아담에게 제2의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연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자 벌거벗은 수치를 감당치 못하여 나무 뒤에 숨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치마를 해 입고 벌거벗은 수치를 감추고자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면서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장 8절로 9절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왜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셨습니까?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아담이 나무 뒤에 숨은 것 모르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아담이 나무 뒤에 숨어 있는 것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만 하나님은 모른체 하고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아담을 찾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범죄하고 하나님 앞을 떠난 그 정황을 아시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스스로 회개하고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께서 제2의 기회를 주시지 않을 바에는 심판하시고 마시지 아담을 찾으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었으면 아담이 해야될 일은 울며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뛰어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여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벌거벗을 수치를 면치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나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용서해 주고 제2의 기회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 죄를 타당화하고 변명했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먹었냐고 말할 때 스스로를 통회하고 자복하지 아니하고 그는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어주신 그 여자가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도대체 어디 감히 하나님께 책임을 돌립니까? 자기가 잘못해놓고 하나님이 주신 하와 때문에 내가 먹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 다음 자기 아내 하와에게 돌리고 자기 잘못을 전혀 시인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 때문에 그랬습니다. 내가 벌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정말로 이 말이 아쉽습니다. 이 말을 했더라면 아담, 하와와 그 후손이 길이길이 고통과 괴로움에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말했습니다. “하와야, 네가 왜 남편을 꾀어서 선악과를 먹게 했느냐?” 하와는 역시 변명했습니다. 창세기 3장 13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잘못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남편을 꾀었습니다.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하와도 책임을 뱀에게 돌리고 자기 타당화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타당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알고 계세요. 우리가 아무리 변명하고 나무 뒤에 숨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치마를 만들어 입어도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아시며 머리털수도 헤어리고 계시는 것인데 어디 하나님 앞에 자기를 타당화 합니까? 이것을 하나님은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한 자를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자기를 타당화하고 회개하지 아니하고 변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내 탓입니다.” 이것은 관계를 치료할 수 있지만 “당신 탓이오. 당신이 잘못했오. 나는 잘했오. 나는 아무 책임이 없오.” 이렇게 할 때는 관계가 끊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로 24절에 보면 여자에게 하나님은 잉태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를 주셨고 아담에게는 땅의 저주로 평생 수고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살게 되고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죽음의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 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관계의 상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되고 인간끼리 인간과 자연끼리의 관계가 상실되고 말은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타당화하고 남의 탓으로 모든 것을 돌리는 것은 모든 관계를 다 끊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자기와 이웃과의 관계 심지어 자기와 사회생활, 자연과의 관계조차도 두절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사울 왕과 다윗 왕의 다른점을 우리가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사울의 통치하에 이스라엘을 든든하게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자 과거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아말렉의 침공을 당하여 큰 위기를 경험했던 것을 기억하시고 아말렉을 쳐라해서 멸절하실 것을 사울 왕에게 명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절로 3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하나님께서는 죄인 아말렉이라고 말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버림받은 종족을 다 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가서 아말렉을 치되 온전히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지를 않았습니다. 자기의 욕심과 탐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순종하고 부분적으로 거역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7절로 9절에 보면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하나님이 사람과 짐승을 다 진멸하라고 했는데 그 왕을 사로잡고 죽이지 아니하고 그 짐승떼의 기름지고 좋은 것은 다 그들이 노획했습니다. 욕심과 탐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에게 이 사실을 말씀하시고 사울 왕을 위했습니다. 회개하기 위해서 꾸짖은 것입니다. 심판할때는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꾸짖은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13절로 15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컨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변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변명을 굉장히 미워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하나님 말씀하시면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해야지 변명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는 금물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줄 압니까?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 앞에는 우리 변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서 사울 왕을 꾸짖을 때 변명을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사울의 변명에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6절로 21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가로되 말씀하소서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또 변명합니다. 보세요. 두 번째 또 변명해요.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이제는 변명을 하되 백성들에게 책임을 떠맡겼습니다.

백성 때문에 백성 탓으로... 기름진 양과 소떼를 죽이지 않고 가지고 왔고 또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 제사를 좋아하시는 것이니까.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흉칙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두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데 두 번다 자기를 타당화하고 변명을 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탓을 백성의 탓으로 돌리고 나중에는 하나님 탓으로 또 돌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심판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로 23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버림을 당했습니다. 자기 타당화와 자기 변명을 계속 늘어 놓으면 종국적으로 파멸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코너에 몰아 넣어서 항복시킬려고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돼요.

그러나 다윗 왕은 어떠한 사람인가! 다윗은 사울 왕의 뒤를 이어서 기름부은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 왕은 사울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용사 우리아는 암몬과의 전쟁에 나가서 충성을 다해 싸웠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늦잠을 자고 오후에 일어나서 자기 왕궁 위에서 이리저리 거닐다가 보니까 저 아랫집에 뒷뜰에서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가 눈을 비비고 보는데 그 여인이 너무나 그 눈에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물어 보니까 일선에 가서 싸우는 자기의 충직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자고짜 그 여인을 불러 오라 했습니다. 그 여인은 이름이 바세바였습니다. 그는 그 여인하고 간음을 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다가 그 여인에게서 소식이 왔습니다. “당신이 나와 동침한후로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큰일났습니다. 일국의 왕이 자기의 부하가 일선에서 싸우는데 부하의 아내를 불러다가 간음해서 잉태하게 했으니 창피하지요. 그래서 그는 우리아를 일선에서 불러서 휴가를 주어서 아내와 동침하게 하므로 자기의 죄를 감추려고 했으나 충성스러운 우리아는 휴가에 왔으나 아내하고 동침하지 아니했습니다. 왜, 나의 친구들과 장졸들이 천막을 치고 서리를 맞으며 일선에 있는데 내가 어찌 와서 집에 들어가서 아내와 동침하겠느냐. 두 번이나 왕이 권면해도 집에 돌아가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요압장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아가 일선에 가거든 최전방에 보내서 죽게하라.” 그 편지를 받은 요압이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서 적이 쏘는 화살에 맞아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에게 소식을 보냈습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대로 우리아가 일선에서 죽었습니다.” “허허허 전쟁에서는 칼이 이사람도 죽이고 저사람도 죽이느니라” 이런 철면피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간음하고 거기에다가 남의 아내를 도적질하고 살인까지 했습니다. 있을수 없는 죄를 지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꾸중을 듣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하 12장 9절로 12절에 보면 나단이 와서 말했습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 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하나님은 이유 없이 심판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하나님 모르는줄 알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엄청난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다윗은 사울과 다른점이 있습니다. 사울은 두 번이나 변명했지만 다윗은 즉각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3절로 14절에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변명 안했습니다. 이게 다윗의 장점입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탓으로 말않습니다. 아~ 내가 정원에 거니는데 왜 그 여자가 벌거벗고 목욕을 했노? 그 때문에 내가 범죄했지? 내가 원래부터 범죄했느뇨? 뭐 이런 소리를 했으면 그는 박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범죄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여러분 하나님은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회개 안했으면 하나님은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잘못하였나이다.” 회개하니까 나단이 즉시로 “하나님도 당신을 용서하고 당신 안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탄으로 크게 참소할 거리를 주었으니 밧세바가 잉태한 어린 아기는 죽을 것이다.” 다윗이 그말듣고 7일동안 금식하며 부르짖어도 그 낳은 아기가 죽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회개할게 아니라 즉시로 회개문을 지어서 전국에 반포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시편 51편 1절로 19절이 그때의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공개적으로 그는 자기의 잘못을 통회자복하는 시를 지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이 내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죄를 지었으나 회개할줄 알고 자기 스스로를 돌이킬 줄 알며 나 때문입니다. 내 탓입니다. 그렇게 말할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왜 이 모양입니까? 여러분 알다시피 IMF 이후에 공적자금을 수십 조원을 쓰고 수조 원이 공중에 증발했는데도 한사람도 내 책임입니다. 내 탓입니다. 하는 사람이 없어요. 국민세금으로 여러분 공적자금 수백조원을 갚아야 됩니다. 그래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책임 안져요. 우리나라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도 내탓이라고 말하는 사람 없어요.

16세기의 스페인보다 약소국이던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으로 발전한 원동력은 영국의 상선이나 전선에 탄 선장은 배가 침몰할 때 반드시 배와 함께 죽었습니다. 보트를 타고 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책임진 군함이나 상선은 자기의 책임하에 있기 때문에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그런 책임감이 투철했기 때문에 영국은 세계적인 국가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IMF 이후로 성장발전하고 또 월드컵에서 4강까지 올라 우리의 용기가 충천하지만 우리 국민 가운데 책임진 사람들이 내 탓입니다. 내 잘못입니다 하는 책임감이 없는 이상은 이 나라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 전부 국민에게 다 돌립니다. 정부가 잘못한 일을 전부 국민 다 책임져라. 국민의 포켓에서 돈 내어서 공적자금 날린 것 다 갚아라. 국민은 ‘봉’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르지만 여러분 어마어마한 돈을 여러분이 갚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잘못해서 그런 것 아닙니다. 책임진 자들이 잘못했는데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 이러한 나라가 잘될 수가 없어요.

셋째로, 우리가 오늘 생각해 볼 것은 내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십시오. 이 말을 우리가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말아야 돼요.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만 다 잘못하고 자기만 온전한 사람입니까? 타인에 비해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 악입니다. 시편 53편 2절로 3절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여러분 다른 사람보다 선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여러분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타인에 비해 우월감을 가지는 이것이 그 자체가 악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이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특별한 사람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준엄하게 심판할 줄 알아야 됩니다. 남의 행위를 심판하지 말고 자기 행위를 심판할 줄 알아야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다 두 망태기를 걸치고 있습니다. 앞에 하나 걸치고 뒤에 하나 걸치고 남의 잘못은 앞에 망태기에 다 잡아 놓고 자기 잘못은 뒷 망태기에 다 집어넣고 자기 잘못은 뒤에 있으니까 안보고 앞에 있는 망태기 속에 남의 잘못만 자꾸 들여다보고 파헤치고 남만 자꾸 욕을 합니다. 자기 망태기는 뒤에 걸머지고 볼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부싸움, 직장내 인간관계, 교구 내 마찰등 이 모든 것은 남의 탓입니다. 심지어 설교 들을때도 저것은 나보고 말한 것이 아니라 김 장로 보고 하는 말이야. 박 집사보고 하는 말이다. 저는 우리 셀리더보고 하는 말이다. 자기보고는 해당을 시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시점에서나 자기의 행위를 준엄하게 심판할 줄 알아야 자기도 이웃도 나라도 국가도 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에레미야서 2장 35절에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치 아니하였다 함을 인하여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변명하면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3절로 5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그러므로 자기관리를 우리가 잘해야 됩니다. 자기관리를 잘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준엄하게 심판하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 벌거벗어 놓을 줄 알아야 됩니다.

성경 유다서 1장 20절로 21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동안에 우리 시내 가보면 차 뒤에 ‘내 탓이오’라고 적은 티켓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그려놓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하고서 물고기를 그려 놓았는데 영낙없이 사이에 끼어드는 차는 ‘내 탓이오’하는 차하고 물고기 그려 놓은 차입니다. 내 탓이라고 해 놓은 다음에 왜 자꾸 새치기하고 물고기 그려 놓은 나는 예수 믿는 다는 사람이 왜 남의 차 사이에 끼어 들어 옵니까? 하도 비난받으니까 요사이는 내 탓이오 다 떼어버리고 물고기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차가 많이 붐비는 4차선 도로 건널목에서 과속으로 달려오던 차가 길을 건너는 사람 앞에 급정거를 한 이후에는 그 순간 길을 건너던 행인과 급정거하는 운전사는 서로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와서 눈알을 굴리고 주먹을 흔들고 고함을 치고 건너가는 사람은 왜 사람 앞에서 차를 달려오다가 급정거하느냐, 왜 차 가는데 앞을 지나가느냐 서로 고함고함 치고 파란불이 들어와서 뒤에서 차가 줄을 서서 빵빵 거리는데도 싸움하기에 바빠 가지고서 길을 안비켜 줍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종종 봅니다. 정말 내 탓이오. 내 잘못이오. 그말 한마디면 문제가 해결될 것인데 경찰이 올때까지 그렇게 싸우고 있어요.

여러분 자신의 죄를 감춘다고 영원히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집에 도둑질을 하던 좀도둑이 주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을 피해서 뒷문으로 도망을 치는데 막다른 골목에 큰 벽이 있는데 경찰이 발목을 잡으니까 죽을힘을 다하여 경찰을 뿌리치고 3미터나 되는 높은 담을 뛰어 넘어서 안에 털컥 내렸습니다. 옷을 털고 “후유~ 살았다.”하고 보니까 그곳이 시 형무소라. 기껏 피한 곳이 형무소 담을 뛰어 넘어 형무소 안으로 들어오고 말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실수를 감추거나 자신에게서 도망친다고 우리의 모습이 완벽해 질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의 양심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용기를 여러분 가져야 됩니다. 수치심을 이겨야 돼요. 내가 죄를 고백하면 부끄러워 안 된다는 수치심을 이겨야 돼요. 자기의 죄와 허물을 고백한다는 것은 놀라운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용기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시편 32편 5절에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보세요. 죄를 회개하면 사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이요, 인생의 법도 그렇치 않습니까? 잠언서 28장 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하나님 불쌍히 여기십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가슴을 치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이웃이나 대중앞에 고백하고 난 다음에 마음에 의기소침하지 않고 상심 안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과 이웃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고 자기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의기소침했으면 자기의 죄를 용서해 줄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남의 죄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도 용서해 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기를 용납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져서 회개하면 많은 사람도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였습니다. 한 1500명 성도가 모였는데 길선주 목사님이 열렬히 설교를 해도 아무도 감동을 입지 않습니다. 아멘도 하지 않고 할렐루야도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길선주 목사는 “이 은혜가 없는 것이 내 탓입니다. 내가 목사로써 잘못했기 때문에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언젠가 제 친구가 죽으면서 내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니 내 재산을 잘 처리해 주게.”했는데 그 재산을 정리하면서 나는 일백원(당시화폐)을 잘라 먹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다 내 탓입니다.” 이렇게 길선주 목사가 자백하자 그만 통회자복이 일어나서 온 성도들이 울고 회개하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1907년도 한국에 대성령회 운동이라는 것이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이 깨어지면 하나님도 감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데 어떻게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까?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유럽에서, 일본은 아세아에서 비참한 반인륜적 전쟁행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후에 독일은 철저히 회개하고 전쟁배상을 하고 천하에 잘못을 공개하고 이것을 교과서에 적어서 자자손손이 가르켰습니다. 그 때문에 독일은 용서를 받고 유럽의 주도적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반대로 전쟁때 행한 범죄를 철저히 은폐하고 상처입은 국가나 백성에게 성의껏 배상치 아니하며 잘못을 회개하고 공개치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이 경제대국이 되었으나 아시아 국가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지도적인 국가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마찰과 상처를 치료하는데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 탓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 말보다 더 좋은 양약은 없습니다. 이 약을 부부간에 쓰고 부모자식간에 쓰고 형제간에 쓰고 이웃간에 쓸 줄 알아야 됩니다. 국가와 국민 가운데도 이것을 쓸 줄 알아야 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로 10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하나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 버림받고 마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나 많은 죄를 짓고 삽니다.
아버지 하나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조상 아담처럼 언제나 자기를 타당화하고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고 남 때문에 이웃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는 이상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이웃과도 관계가 끊어지고 많은 상처를 일으키게 됩니다.
아버지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 탓입니다. 나를 벌주시옵소서하는 이 회개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도 감동시키니 어찌 부부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부모자식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이웃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겠습니까?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고백할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복을 받을수 있고 책임지지 아니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의 죄를 감추고
변명하고 꼬리를 뽑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오히려 연기가 되고 하나님의 저주가 되고 말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솔직히 주님 앞에 다 회개하고 고백하고 깨어지고
책임을 질줄 아는 길선주 목사 같은 그러한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출처/조용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