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감동시킨 사람  (눅7:02-10)


세상에는 사람을 평가하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타인을 평가한다는 대상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지위가 낮은 사람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 사회에 속한 사람은 항상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평가를 받도록 조직들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직이 강할수록 혹은 조직이 특수할수록 끊임없는 평가를 통해서 사람들의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그 사람의 마음에 긴장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진사회일수록 평가의 대상에 대해서 금기사항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지위가 낮은 사람이 지위가 높은 사람을 평가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평가하고 국회의원이나 시장을 평가하도록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대학에서는 교수가 학생을 평가하는 것처럼 학생들이 또한 교수를 평가하는 강의 평가서를 내도록 하는 학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늘 학생들을 평가하는 일에 익숙한 교수들이 도리어 제자들에게 평가를 받는 것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의 평가를 지금 받고 있다는 의식을 하게되면 내 삶이 그에게 맞추어지게 됩니다. 용기있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삶을 평가받기를 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가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자신 없게 사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향한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의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냐에 따라 그 삶의 성격이 만들어집니다. 요즘 학교 문제는 아이들의 평가를 누가 해야 하느냐 혹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교육부에서는 학교의 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실력을 선생님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학부형들은 학교 선생님의 평가만으로는 힘없는 아이들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평가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매우 이해하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주님께 두고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판단하시는 주님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주님의 평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악인들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평가에 민감합니다. 사람이 알아주던지 안 알아주던지 그런 상황에 매이지 않고 주님께 기쁨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달라지는 것은 타인에 대한 의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교역자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음이 좋다는 소리를 가장 귀하게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돈이 많다든지 성공했다든지 하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받을 때에 정말 성공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믿고 난 이후에는 무엇보다 믿음이 좋다는 인정을 귀히 여기고 믿음으로 산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믿는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사람이 믿음을 인정받기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 신분이 백부장인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백부장은 높은 지위는 아니었지만 피지배국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에는 매우 중요한 신분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백부장의 축복은 사람이 살면서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주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 바로 백부장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주님께 인정을 받은 내용이 중요합니다. 백부장이 인정받은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 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려면 이 두 가지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정을 받고 믿음을 인정받으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은 인정 받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주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백부장을 보면 주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는 교과서 같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백부장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백부장에 대해서 표현할 때 사랑이라는 단어를 두 번에 걸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찾아온 유대장로들이 예수님께 백부장에 대해서 말하기를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했습니다.

백부장에 대한 설명으로 용감했다든지 아니면 전공을 세웠다든지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설명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인생에게 사랑은 삶의 본질이고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성공을 했다든지 많은 소유를 가졌다든지 아니면 많이 배웠다든지 하는 것은 사랑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무리 다른 재주가 많고 소유가 많아도 사랑이 없는 사람은 결코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목적을 잃은 인생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도구가 아닙니다. 사랑은 인생이 가진 어떤 목적보다도 더 본질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사랑 때문이었지 재주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사랑 앞에서 언제나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은 인생이 하나님께 드리는 열매입니다. 나무에 있어서 모든 것들은 열매를 위해서 있는 것처럼 인생에게 있는 모든 삶의 조건들은 사랑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둘째 백부장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스로보니게 지방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딸이 귀신이 들려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주님께 나와서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이 때 주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철저하게 무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와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보내소서 했습니다. 이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그래도 여자가 주님께 와서 절을 하면서 저를 도우소서 했습니다. 이 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고 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여기 세 가지 단어가 겸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떨어지는 이라는 단어와 부스러기라는 단어 그리고 절하며 라는 단어입니다. 떨어진다는 말은 핍토인데 가장 낮은 곳을 말하고 부스러기라는 말은 프시키온인데 가장 작은 조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절하며 라는 말은 프로스퀴네오 라는 단어인데 무릎을 꿇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낮은 자리에 설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선 사람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위가 어떠하든지 마음으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선 사람이 주님이 보시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어떤 자리에 가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그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큰 일을 하려고 하지말고 작은 일에 감사하며 작은 은혜에 고마움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항상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종이라는 인식으로 항상 살아야 합니다.

은혜에는 영적 법칙이 있습니다. 은혜는 물과 같습니다. 가장 자기를 낮추는 자가 가장 많은 은혜를 받고 가장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다윗은 항상 겸손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여 내가 무엇이길래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을 불러 이스라엘의 머리로 삼으셨나까 했습니다. 다윗은 임종의 순간에도 그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겸손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영광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겸손하므로써 받지 못할 영광이라면 그 영광을 결코 취해서 안 될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와서 배우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자신에게 배우라고 하신 과목이 바로 온유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셋째 백부장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면 그대로 이룰 줄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회당장이든 백부장이든 볼품없는 여인이든 사람을 보실 때에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에게는 아들의 권세가 그 자신에게서 나타난다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역사의 도구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감동시킨 사람이 있다면 아브라함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백 세에 얻은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은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에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출처/조병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