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의 영성  (왕상18:41-46)

우리안에 끊임없이 있어져야 할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여기에 우리가 아멘했다면 성경이 다음으로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사랑, 용서 등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단일주제로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성도님들은 개인적으로 기도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어떤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그것이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사람들마다 각자의 기도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싸움입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어야 합니다. 삶과 기도는 이중적일 수 없듯이 기도는 현실적입니다. 삶이 무질서하면 기도도 무질서합니다. 기도가 간절하면 삶도 간절해집니다. 영적으로 무너져도 대표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은혜 안에 무너져도 봉사가 가능하고 찬양도 가능합니다. 설교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엄청난 기도의 제목입니다. 어느 한 개인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전체의 문제였습니다. 3년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3년 6개월 하늘이 닫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하늘을 열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비를 내리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3년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 문을 열어주심이 있어 천사람 만 사람의 기도가 아니라 엘리야 단 한사람의 기도에 하늘 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요,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떠하십니까? 야고보사도는 5:17절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특별히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엘리야의 기도에 하늘이 열리는 것일까요. 오늘 영적전쟁을 앞두고 엘리야의 기도에 있어졌던 응답의 영성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도는 철저하게 영적행위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다보면 기도는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영적싸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대상16:11절에 여호와의 능력을 항상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합니다. 응답의 영성이 요구하는 기도는 좀더 더 적극적이요 공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무엇으로 응답의 영성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엘리야의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18장1절에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하였습니다. 41절에서는 엘리야가 아합에게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합니다. 이미 비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믿고 기도합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큰 비의 소리 응답의 소리를 미리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큰 비의 소리 응답의 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약속이 있었으니 저절로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강 기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믿기에 더 기도하고 더 간절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함성입니다. 기도 없이 믿는 믿음은 막연한 것입니다. 겔36:37절에 그래도 이스라엘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지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하였습니다.

마7:7절에는 구하라 그리하면 구할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하였습니다. 마음에 응답의 소리를 듣고 기도하는 것은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공급하기를 원하시는데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먼저 응답의 장애물을 제거한 기도였습니다.  

18장1절에 이미 약속을 주셨습니다. 가라 비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실때에는 어떻게 해야 된다 하는 다른 요구도 없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한다든지 회개를 많이 해야한다든지에 대한 요구도 없었습니다. 그냥 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쿤 문제는 물의 문제입니다. 비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응답의 약속은 1절에서 받았는데 41절에 와서야 큰비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럼 그동안 엘리야는 무엇을 하였을까요? 엘리야는 응답의 약속을 받고 급하게 무조건 비오기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곧 바알과 아세라선지자들을 없애는 일을 하였습니다. 우상을 없애는 것입니다. 왜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가 왜 하늘의 문이 닫혔는가 바로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응답만 기다립니다.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먼저 원인을 제거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기 전에 형제와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 예물을 드리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응답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3년반동안 하늘이 막혔던 원인이 그것 때문인데 엘리야는 비만 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응답이 되어지는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제거합니다. 이것이 응답을 사모하며 기도에 깊이 들어가면 회개하는 이유가 됩니다. 사람들은 원인은 제거하지 않고 응답인 비와 하늘만 열어달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먼저 물보다는 불을 요구하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물의 응답을 주시기전에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아니 엘리야의 요구가 이러했습니다. 먼저 불을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보다 불, 불 다음에 물이었습니다.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필요를 앞두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필요에 맞는 응답을 요구하는데 반해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가슴은 냉냉 한데 물만 요구하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내 가슴에 불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우선의 문제였습니다. 진정한 기도의 축복은 단순한 응답이 아니라 성령충만에서 시작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엘리야의 마음은 응답의 장애물이 제거되기를 바랬습니다. 3년 반 전에 하늘이 막혔던 원인이 그대로인데 비만 오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로서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먼저 확인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응답으로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증명해달라는 엘리야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가슴은 냉냉한데 물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라 비를 주겠다 하셨으면 급할 만도 한데 엘리야는 전혀 급하지 않습니다. 41절에 와서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장애물을 제거하고 불을 사모하는 엘리야, 먼저 제단을 회복하고 그 다음에 도랑에 물을 채워야 하는 일에 사람들의 헌신을 요구했고 그런 다음에 1절에서 응답하신 비의 소리를 간구하게 됩니다.


12지파를 통해 12돌을 취한여 여호와의 단을 수축합니다.

그리고 통넷에 물을 담아 세번의 합해서 12번의 12통을 제단에 부은 것입니다. 3년 6개월의 가뭄에 먼저 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제목앞에 먼저 드려짐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큰 기도 큰헌신 앞에 이루어집니다. 33절에 보니 채우라는 것입니다. 떠오라가 아니라 채우라 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마실 물을 조금씩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물의 헌신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런 헌신 앞에 하나님은 불로써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장애물인 우상숭배자들을 제거한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공격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땅에 꿇어 엎드려 분명한 기도의 태도를 갖추고 그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을 끄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몸부림치는 엘리야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사람인 엘리야의 기도는 쉬웠겠는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였듯이 엘리야의 기도가 이러했습니다. 4복음서의 제자들은 대강기도하다 졸았지만 행전의 제자들은 부르짖고 영적으로 싸우는 기도의 용사들이었습니다. 기도는 노동을 넘어 전쟁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기도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 않아서가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는 대강하고 응답은 확실하게 기다립니다.


또한 엘리야의 기도는 응답이 있을 때까지 하는 기도였습니다.

일곱 번의 기도 하나만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에도 응답이 없으면 끝장을 보는 기도입니다. 엘리야는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약속이 있었는데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포기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소리와 환경의 소리 앞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포기합니다. 응답의 시작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기도의 응답을 마음에 채우는 것입니다. 한번 기도가 끝날 때마다 사환에게 가보라 했을때에는 이것은 대강하고 가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고 왔다 갔다 하는 사환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먼저 응답을 마음에 채우고 다음에 환경적 응답을 확신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우리들의 기도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백일, 천일이다 하며 숫자를 채우지만 우리의 기도는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을수록 그릇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작은 응답에 큰 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곧 작은 응답 큰 확신입니다. 사환이 일곱 번째 다녀와서 바다에서 손바닥만한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하며 44절에서 말을 합니다. 하늘이 아니고 바다에서 입니다. 그냥 무시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에 큰 확신으로 그냥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도를 채우고보니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하늘을 덮는 구름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크냐 작냐가 아니라 확신의 문제입니다.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확신은 곧 선포로 이어집니다. 44절에 보니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합니다. 아합은 이런 엘리야의 말에 얼떨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입으로 선포합니다. 나를 향해 기도의 제목을 향해 입으로 선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셨습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을 응답으로 확신하고 입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45절에 말씀합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 지라 합니다. 예레미야 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였습니다. 기도는 선택이 아니라 절대필요요소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엘리야의 기도의 영성과 응답의 영성이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