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수의 사람들   (요19:25-27)  

오늘은 성찬주일입니다.

특별히 학습과 세례 그리고 유아세례예식으로 함께 드려지는 날입니다. 설교 후에 있어질 예식에 좀 지루한 감이 있어도 하늘나라의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시간임에 기쁨과 감사로 함께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입장에서나 교회의 입장에서도 날마다 이런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오셨던 목적 그대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목숨을 걸고라도 운명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주변에 모여 있는 참 예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림을 한번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때리면 맞고 끌고 가면 끌려가며 침 뱉으면 침 뱉음을 당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 십자가에 높이 달려 물과 피를 쏟고 계신 예수님 그 십자가 아래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네 명의 여인과 요한을 그려 보십시요. 그냥 보면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당할 때로 당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대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참 초라한 그림입니다. 그런데도 그 갈보리 동산이 가장 감동스러운 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 갈보리 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영광스럽기까지 할까요?

  저들 모두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물과 피를 다 쏟으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였고 그중에도 당신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더 걱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셨고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양쪽 강도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또한 십자가 밑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모친의 앞날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아래애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당시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 대하여 동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왜 모든 사람들이 도망을 하였습니까? 왜 배반하며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과의 관계를 외면했습니까? 자신들이 받게 될 불이익 때문 아니겠습니까? 당시 로마정치 하에서 십자가 사형집해에 대해서도 일체의 반론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재판에서 보신다면 십자가형으로 일단 결정되어지면 항소나 재심이란 제도 없이 바로 끌어내어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때 누군가가 억울합니다. 그는 죽을 죄인이 아닙니다 하면 그도 죄인과 함께 같이 처형 되고 맙니다. 또한 누구도 십자가의 죄인에게는 동정심도 표현할 수 없으니 당시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 동정한다는 것은 로마정부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밑에 자신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 더 생각 할 줄 하는 참 예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왜 그다지도 요나단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입니까? 자신보다 다윗을 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바나바가 그렇게 아름다워 보입니까? 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성도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할 때 입니다. 성도의 부끄러움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자기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일 때 감동을 줄 수 있는 성도가 되지 못합니다.


   갈보리 동산이 참으로 감동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끝까지 함께 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떠났는데 모두가 자신만 생각하며 가버렸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는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함께 해 주는 사람들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떡도 생기고 병도 고치고 신비한 이적과 기적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신나게 따라 갈 수 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여하며 종려가지를 흔들며 환호하고 환영하는 대중들의 박수를 받을 때에는 누구든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죽어가는 예수와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더 이상의 계산도 아닙니다. 더 이상의 요구도 아닙니다. 그냥 함께 있고 싶은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있어 준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을 보면서 잘 견뎌준 것이 고맙고 감사한 것입니다. 함께 신앙생활하다 보면 어찌 서운하고 마음 상할 때 없었겠습니까? 목사나 교회는 부부와 비슷합니다. 항상 고맙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제일 서운한 존재들이 될 수 있습니다. 부부를 하나님이 맺어 주셨듯 성도와 목사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귀한 관계입니다.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목사가 아닙니다. 요구하면 할수록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매력은 견디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모두가 떠났지만 그 십자가 밑에 목숨을 걸고라도 함께 해주는 모습 이것이 우리의 감격인 것입니다.  


   십자가위에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지금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들은 무엇이라도 부탁하면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떠나시면서 마지막 염려인 어머니를 형제들에게 부탁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 요한에게 사랑하는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믿을 만 한 것입니다. 요한은 잘 섬겨 줄 줄 것 같은 것입니다. 무엇이라도 부탁하면 늘 들어 줄 것 같은 사람들은 감동자체입니다. 예수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부탁받은 대로 섬기는데 30,40년을 섬깁니다. 마리아가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대신해 모십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베드로나 바울은 열심히 전도나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부탁을 받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삽니다. 어찌보면 베드로나 바울의 선교사역보다는 요한의 일은 작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부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경건을 유지하고 결국에는 요한 일이삼서와 요한복음 계시록을 기록합니다. 적당한 동역자도 베드로나 바울에게는 붙여 주셨지만 요한에게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은 그 부탁에 최선을 다해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셨지만 말도 안되는 요구셨지만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호세아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셨습니다. 음란한 여인하고 사랑하라 결혼하라 하셨지만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어떤 부탁을 받았는가요?

누구보다 많은 은혜를 입은 자이면서도 여전히 내 생각 내 계산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닌가? 1인 2사역지원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내 입장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즉 교회의 일은 주님을 위해 하는 일입니다. 제 2성전부지도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부탁입니다. 그 넓은 대지를 남에게 맡기지 않고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너희가 감당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찬 속에서 주님의 부탁이 더욱 선명해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찬예식가운데 있어지는 주님의 부탁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행하여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기념하라는 말은 되새시고 기억하여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과 피를 찢기고 흘림으로 주어진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의 살과 피를 받으면서 이 보혈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살아 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도에게 있어 주님의 또 하나의 부탁은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주의 죽으심의 은혜가 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다시 흘러 넘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감격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성찬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성찬 후 사명의 십자가를 향하여 가셨습니다. 이처럼 이 헌신의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 헌신의 다짐은 자신보다는 늘 다른 사람을 더 생각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 헌신의 다짐은 주님 곁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 끝까지 함께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하시는 어떠한 부탁이라도 들어 줄 수 있는 믿을만한 사람이 되게 할 것입니다.

네가 해라!
네가 가라!
너하고 해야겠다.
우리 주님의 부탁은 무엇입니까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