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깨어 있으라  (본문 눅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장 34-36절)
<목회기도>

추위를 느끼는 겨울을 허락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상에 살던 우리는 허물과 죄가 많지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나와 회개합니다.
용서하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찬양을 받으시고 예물을 받으시옵소서.
복된 자리에 아파서, 혹은 여러 가지 특별한 사정으로
나오지 못한 이들을 긍흉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믿음이 없어, 믿음이 적어 나오지 않은 이들을
하나님 불쌍히 여기시고 주일과 예배를 귀중히 여기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 추운 때에 군대에 나가있는 믿음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객지에, 외국에 가있는 기둥교히 식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들에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복을 주옵소서.
하나님, 기막힌 사연을 마음속에 감춘 채
눈물을 참으며 앉아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 부족한 종이 말씀을 전합니다. 능력을 주시옵소서.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사도행전 2장 6-8절에 보면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 모두 각기 다른 말(방언)을 쓰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한 명인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모두 자기의 언어로 알아들었습니다. 오늘 이 예배 시간에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각기 배움이 다르고, 삶이 다르고, 성격이 다릅니다. 오늘 <고신일 목사>가 설교하지만 여러분 각자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1장 34-36절에는 말세(마지막 때)의 묵시적인 징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말세에 대비하여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8절, 5장 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대비하여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6)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장래를 약속한 사람, 혹은 남편이 군대에 갔는데 그 애인이나 부인이 '휴가를 언제 올 지, 제대는 언제쯤일 지' 궁금해 하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는다면 그 관계는 문제 있는 상태입니다. 아니 어쩌면 깨진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남편이 외국에 출장을 나갔거나 파견 나갔는데도 그 부인이 남편이 돌아오는 날에 대해 관심이 없고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일 난 것입니다. 사모하고 기다리고, 예정된 날 보다 더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정상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고 천국을 소망하며 영원히 살 것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구원 받은 확신이 없는 사람, 영원히 살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오늘 이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는 중에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약 40일 간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 구석구석에 예수님은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6-11) 고 했습니다.
적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이야기를 들으면 애인이 돌아온다는 얘기를 듣는 것처럼 가슴이 설레이고 기다려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에 대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는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을 아예 믿지 않으려 하거나 잘못된 시한부 종말론에 빠진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재림, 종말'을 말하면 무조건 미친 사람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시한부 종말론에 빠진 사람도 문제이지만 무조건 '재림'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돈이 있고 보석이 있는 곳에 도둑이 듭니다. 왜냐하면 귀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재림'이라는 것도 중요하고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각종 이단자들이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생기고 이상한 신비주의자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을 아는 것처럼, 종말이 언제 올 지 아는 것처럼 큰 소리 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곳곳에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말의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에 대해서 준비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저는 부흥회에 자주, 많이 나가지는 않지만… 가끔 부흥회에 나가면 10번에 걸쳐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 교회에서든지 맨 마지막 설교는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21장 34-36절을 중심으로, <뜻밖에 그날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합니다. 제가 어느 교회를 가든지 예수님의 재림, 종말의 때를 대비하고 살아야 한다고 마지막 시간에 설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구석구석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둥교회에서도 1년에 몇 차례씩 때에 따라 재림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도 여러 차례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도 제가 또 이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스스로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스스로 조심하라"(34절)

사람은 누구나 어떤 중요한 일이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자기 스스로 책임지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보면 "스스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의 책임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준비하고 사는 사람, 마음에 준비한 사람, 생활 속에 준비한 사람에게는 '뜻밖에 그날'이 말 그대로 뜻밖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어느 날 하나님이 불러가실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세상에 종말이 올 때 '산아 내게 무너져라, 언덕아 나를 가리워라'하면서 탄식하는 날이 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둔하여지고"(34절)

34절에 보면 "마음이 둔하여져서" 뜻밖에 그날을 맞게 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둔하여지는 이유를 3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방탕함"으로 마음이 둔하여 집니다.
'방탕'이라는 말은 '될대로 되라'는 식의 생활 태도를 말합니다. 아무렇게나 사는 것, 길에서도 자고, 들에서도 자고, 집에서도 자고 아무렇게나 멋대로 사는 것을 '방탕'이라고 합니다. 방탕한 자는 사회의 규범이나 제도도 상관이 없습니다. 학생은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가는 제멋대로 생활하는 것이 방탕입니다.
요즘은 교회 안에서와 바깥의 구별이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과 신앙생활 하지 않는 사람과의 구별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방탕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술 취함"으로 마음이 둔하여 집니다.
'술 취함'이라는 의미는 마시는 술에 취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에 취해 있는 것 모두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에, 권세에, 돈에 취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자존심, 체면'에 취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는 데도 자존심 상해서 교회를 떠나고, 체면 때문에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체면과 자존심이 더 중요해서 하나님과 등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은 술기운에 취해 삽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에 취해 살아야 합니다.

•셋째,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집니다.
세상 염려로 하나님을 등한히 여기는 생활을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신앙생활 잘 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고3이 되어서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1시간 때문에 대학입시에 떨어질 정도라고 하면 대학에 안보내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이번에 대학에서 4학년 학생들의 졸업시험 문제를 출제했습니다. 쉬운 듯, 어려운 듯한 문제를 출제했는데 답을 잘 쓰면 졸업이 되도록 3문제를 출제했습니다. 그런데 채점을 하다 보니 아주 엉터리들이 많아서 몇몇 학생들은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어 낙제를 시켰습니다. 낙제된 학생들은 재시험을 봐서 통과해야만 졸업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한 학생의 답안지에는 자기가 공부 못한 이유와 '믿습니다'라는 말로 딱 두 줄만 적어 놓았습니다. 그 학생이 무엇을 믿겠다고 한 것인지…, 설마 '통과 될 줄로 믿습니다'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떨어질 줄로 믿습니다'라는 뜻으로 써놓은 것으로 제가 이해하고 '믿음대로 될 지어다'하고 떨어뜨렸습니다. 그런 학생은 차라리 공부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주일날 예배 드리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는 말은 핑계입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지만, 생활의 염려 때문에 마음이 둔해져서 하나님을 멀리 하고 "뜻밖에 그날"을 맞게 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보면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는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세상과 타협하고, 방탕하고, 잘못된 것에 취해 있고, 생활의 염려 때문에 하나님께 소홀히 하고 마음이 둔하여 지면 "뜻밖에 그날"이 닥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35절)

심판의 주님이 오시는 그날, 이 세상의 삶을 다 마쳤다고 우리를 데려가시는 그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멸망시키시는 그날, 그날이 "뜻밖에" 올 터인데 "모든 사람에게" 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천년 만년 살 수 있는 사람은 죄송하지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때인가 하나님이 불러가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36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36절)

•항상 기도하며
"항상 기도하며"라는 말은 예수 믿음으로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항상 동행하며, 항상 모든 일에 예수 이름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 보면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 이름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하며 모든 기도를 마쳐야 합니다. 아무리 기도할 때 말을 청산유수처럼, 시인처럼, 철학자처럼 기도했어도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는 말이 안 들어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더듬거리고 시원찮은 기도를 했다 해도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기도하면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하며'라는 범사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합니다.
항상 기도한다는 말은
- 항상 하나님과 연결된 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렇게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곳에 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것을 먹고 마시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사는 것, 그것이 '항상 기도하며'사는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산다는 것, 항상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분께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남녀 간의 만남에 있어서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섬김과 희생이 없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희생이 있어야 그 사랑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을 위해서 희생하고 섬기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간의 보물, 땀흘림의 보물, 눈물의 보물, 재능의 보물, 물질의 보물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예배 참석을 잘 하는지, 얼마나 주일성수 하는지, 십일조 생활은 잘 하는지, 절기 헌금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얼마나 봉사하는 지… 강조하고 가르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의 보물, 땀흘림의 보물, 눈물의 보물, 재능의 보물, 물질의 보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관심 갖고 강조하며 가르치고 그런 사람에게 직분을 맡겨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신장을 이식 받지 못하면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무라도 좋으니까 신장을 기증해 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목사님의 혈액이나 여러 가지 수술에 필요한 조건에 맞는 사람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장을 제공해 줄 한 사람만 찾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을 다 살펴 봐도 맞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그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시니까, 다른 목사님 한 분이 설교를 하시고 광고를 했습니다. "여러분, 신장을 기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많은 교인들 중에 한 분 정도야 신장을 기증하실 줄로 믿습니다. 한 명이면 됩니다. 여러분이 모두 기증하고 싶겠지만 한 분이면 됩니다. 그러니 한 분만 뽑읍시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꽃꽂이 위원들이 강단의 꽃 장식에 꿩털을 꽂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꿩 깃털을 하나 뽑아서 "내가 이 꿩털을 불 테니까 꿩털이 머리에 앉는 사람이 신장을 기증하기로 합시다"라고 말했답니다. 목사님의 제안에 교인들 모두 다 "아멘"하였고 목사님은 꿩털을 '후' 불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의 눈은 꿩털이 어디로 날아가는 지 꿩털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꿩털이 그 교회에서 제일 오래되고 봉사 많이 하는 장로님의 머리 위로 날아갔습니다. 온 교인들은 '아멘'을 외치고 있는 데, 그 장로님은 자기 머리 위로 날아온 꿩털을 보면서 힘껏 '아멘'하면서 후 불어서 꿩털이 다른 곳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이번엔 꿩털이 그 교회에서 기도를 제일 많이 하는 여자 권사님 머리 위로 떨어지려 하는데, 이 권사님은 '할렐루야'하며 입김을 강하게 불어서 꿩털이 다른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꿩털이… 아직도… 날아다닌다고 합니다.

자기 것을 드릴 줄 모를 때는 '아멘'이라고 말은 잘합니다. 그러나 꿩털이 자기에게로 날아오려 할 때는 '노멘'입니다. 자기 희생을 거절하는 헌신이 진정한 헌신일까요? 자기 희생을 거절하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항상 기도하며'라는 말은 항상 그분의 뜻에 맞추어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그분의 뜻에 맞춰 사십니까? 그분이 원하신다면 시간도, 재능도, 물질도 그분의 것이라고 드리느냐는 말입니다.

•깨어 있어야
"깨어 있어야"한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준비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영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다가 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애매모호한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죄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금해야 합니다. 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분별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막판으로 몰려 가는 이 때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저 친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얘기하시렵니까? 아닙니다. 스스로 조심하지 않은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여름에 우리는 홍수로 힘들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댐에서 물을 방류했습니다. 많은 양의 비로 논둑이 터져 농사를 망쳤습니다. 그때 얼마나 물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장마 때는 마실 물이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에 오시다가 수많은 교회들을 지나쳐 왔을 것입니다. 교회가 많다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가 드물다는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장로, 권사, 집사들이 많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많다는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적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종말은 있을 것입니다.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그 때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지구의 종말이 올 지,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실 지, 언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던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준비하고 산다면, 잘 준비하고 산다면…, 그날이 언제인들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말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그 날과 그 때는 우리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단자들이 생기는 이유도 그 날과 그 때는 하나님밖에 모른다고 했는데 자기들이 안다고 큰 소리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뜻밖에 그날"은 반드시 닥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로 준비하며 깨어 있어서 기쁘고, 행복하고, 사랑하며, 감사하며, 영원한 소망 속에 살아야 합니다. 비록 힘이 들고 어려워도 때로 눈물이 나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주 님께서 오시는 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아 갔을 때 "제가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살다 왔습니다."라고 보고 할 때 "잘했다. 잘했어.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는 자리에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언제 지구의 종말이 오든,
언제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세상에 다시 오시든
언제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든지
잘 준비하며 바르게 살다가
"뜻밖에 그날"을 맞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혹은
"주님 내가 이렇게 세상에 살다 왔습니다."하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가서 서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로 준비하며 깨어 있는 삶이 되게 하시고
기쁘고, 행복하며, 감사하며, 사랑하며 영원한 소망 속에서 살도록
하나님 부족한 우리들을 도와 주시옵소서.
이제 세상에 살면서 땀흘려 애써 모은 물질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기 아름다운 목소리로 선교회원들이 찬양합니다.
우리들의 물질과 찬양을 하나님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장광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