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4:14-18


신라의[김유신 장군]이 젊은 화랑시절에 친구들과 술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그 술집에서[천관]이라는 아주 어여쁜 여자를 만나서 연애를 하게 됩니다. 아주 예의도 바르고 착하고 용모 또한 예뻐서 김유신이 아주 푹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술과 공부를 게을리 하고 틈만 나면 자신의 애마를 타고 그 술집에 들락거렸다고 합니다. 매일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유신의 모친이 그를 몹시 나무랐습니다.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잘못을 깨우친 김유신은 앞으로[천관]이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발길을 딱 끊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훈련을 마치고 말을 타고 집에 오는 길에 어찌나 고단했던지 그만 말위에서 졸아버렸다고 합니다. 말이 멈추어서 깨어보았더니 말은 평소에 주인이 가던 대로 그 술집 앞에 가버렸더라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찾아 온 김유신을[천관]은 몹시 반색을 하며 맞았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김유신은 말에서 뛰어내려 칼을 뽑아들고“아무리 아끼는 짐승이기로소니 주인 뜻을 거스르는 것은 필요 없다!”하며 말의 목을 단칼에 쳐버렸습니다. 그러고선 우는[천관]이를 뒤로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고 하는 김유신의 결단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최초의 심리치료 이론이라 할 수 있는<정신분석학>에서는 사람이 불안을 느낄 때,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 방법을<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합니다. 그 방어기제중 하나가 바로<투사(投射, projection)>라는 것입니다. 투사는 자신에게 불안이나 불편을 유발하는 감정이나 생각을 다른 대상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자존심 상해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종종 상대방이 말하는 것과 행동을 보면서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자존심도 지키고 사랑도 얻고자 합니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을 죽도록 미워하는 감정이 있음에도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불편하기에,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투사시켜서 생각하여 상대방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처럼 만들어 생각하기도 합니다.

한 때[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와 함께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는[융(Carl G. Jung, 1875~1961)]은 우리의 마음에는<그림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자란 나의 어두운 면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열등한 성격을 그림자라 표현했는데 이것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에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잘 모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그림자 즉 자신의 어두운 면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보면 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잘난 척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잘난 척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림자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잘난 척 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 사람은 잘난 척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잘난 척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무의식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단지 자신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융]은 자신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알고, 그림자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건강한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이 어쩌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은 자못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융의 이러한 주장이 정말 사실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이 잘난 척 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또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상하게도 부자가 부자를 싫어하고 똑똑한 사람이 똑똑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물론 겉으로는 잘난 척 하지 않을 수 있고, 겉으로는 자신감이 있는 척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내면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김유신]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만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벤 것은 바로 말에게 자신의 그림자 즉, 욕정과 소망이 투사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김유신은 그때까지도 천관녀와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서는 천관녀를 강하게 원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억제하고 숨기려했을 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말이 자신을 천관녀가 있는 술집으로 안내했을 때, 김유신은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놀랐던 것이죠. 하지만 그 동안 김유신은 그 마음을 죽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습니까? 노력을 하면서 천관녀를 사랑하는 그 애틋한 마음을 없애버리고 싶었는데, 그 놈의 말이 그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김유신은 재빠르게 그 마음을 말에게 투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마음이 눈앞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칼을 휘두른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김유신이 목을 벤 것은 말이 아니라<자신의 욕정>이었고, 김유신이 목을 베야 했을 대상은 말이 아니라,<자기 자신>이었던 것이죠. 이게 투사라고 하는 현상입니다. 어쨌든 자기 결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김유신의 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의 결단의 의지를 높이 사는 것은 분명한 듯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신을 결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올바른 결단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앙에서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2007년을 시작하는 우리들에게도 특별한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작의 결단이 좋아야 마지막까지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07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가<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여호수아가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고별설교를 하게 되는 데 그 중에 자기의 신앙고백을 하는 본문 수24:15말씀을 중심으로 이렇게 2007년도 표어를 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결단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실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땅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이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가나안의 온갖 우상들 속에 빠져서 자신들에게 편리한 점만 골라서 받아들이려는 개인주의와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편하게 해 주는 양심적으로 뭘 하나는 섬겨야 하겠고 그러자니 자기들 마음에 맞는 종교를 입맛에 맞게 골라서 섬기는 현실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늘 그 모양이니 여호수아가 살아가면서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호수아가 나이 들어 죽을 즈음에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연설이자 설교가 오늘 본문입니다. 그 설교를 마무리 지으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한번 회고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깨닫고 그 분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 그들은 하나님과 이방신을 동시에 섬기는 타락된 역사를 반복하고 맙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부분인 24장에 여호수아, 요셉, 엘르아살의 죽음과 매장을 끝으로 기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신앙의 사람들인 이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 것을 알려 주며 우리들이 신앙적으로 잘 성숙하여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안식을 예시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의 결단을 배워야 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는 만약에 이스라엘의 백성전부가 하나님을 떠난다 할지라도 자기와 자기 가정만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에 담겨져 있는 중요한 의미가 여러분의 신앙적 결단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는 신앙적 결단이라는 것은 다수적인 군중심리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내려져야함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전부가 하나님을 떠난다고 하는 다수가 있더라도 그 다수에 휘말려 자기도 하나님을 버릴 것이 아니라는 의지입니다. 사람들의 심리는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또한 쉽게 휩쓸리기도 하는 것이거든요. 주일을 범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연말과 연시에 온 동해안이 떠들썩하는 해돋이라는 게 있습니다. 왜 생겨났는지를 모르겠습니다만 하나의 명절처럼 되어버렸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해돋이를 보러 간다고 합시다. 예배시간이 꼭 끼어 있거든요. 그래서 좀 고민이 됩니다. 한참 갈등을 하는데 김 집사 네도 간다고 하고 이 집사 네도 간다고 하면 갈등이 확 줄어듭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얼른 차 몰고 가버립니다. 가면서 밀리는 도로위에서도 생각합니다.‘아마 이 중에 나 같은 교인들이 많을 거야!’그러면 한결 마음도 편해지고 양심도 무덤덤해 지는 겁니다. 다수에 휩싸이면 이런 심리가 됩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자신의 신앙에 이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수라도 잘못 된 것은 잘못 된 것이요, 그렇다면 그것은 따라하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이걸 배워야합니다.

또 하나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신앙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도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함께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가장이라는 신앙적 책임을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이처럼 가장은 무엇보다도 가족의 영적 문제를 책임질 수 있어야합니다. 제사장[엘리]는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패가망신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 할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가 가족들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충분한 가족회의를 했고 가족들도 다 여호수아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라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군소리 없이 따라 준 가족들도 착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쩌면 평소 여호수아가 보여준 신앙의 본이 자연스럽게 가족들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은 이 정도가 되어야합니다. 부모의 신앙생활을 자식이 보면서 자연스럽게, 의례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부모가 섬기는 것을 보면서‘섬김이란 저런 것이구나,’를 스스로 깨닫게 해 주어야합니다. 헌금생활, 봉사생활 하는 것을 보면서‘아하, 신앙생활이란 저런 것이구나!’하는 신앙의 기본을 가르쳐 줘야합니다. 가끔씩 몇 대에 걸쳐서 장로집안이 나왔다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그래서 그런 집안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집안은 정말 존경해야할 집안입니다. 올해는 여러분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됨을 입증하는 한해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여행을 하는 중에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들어갔습니다. 옆 칸에서 누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그래서 엉겁결에“네 안녕하세요?”하고 대답을 하고는 속으로‘목사는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도 알아보는 구나’생각하고 있는데 옆 칸에서 또 말을 걸어옵니다.“목사님, 점심식사는 하셨어요?”그래서 대답합니다.“아닙니다. 볼 일보고 나가서 먹을 참입니다.”한참 동안 잠잠하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목사님, 이제 그만 전화 끊어야 되겠습니다. 어떤 이상한 사람이 자꾸 옆 칸에서 말대답을 하네요.”그러더랍니다. 자기를 부르는지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대답만하다가는 바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얼른 잘 알아듣고 대답해야합니다. 세상이 부르는데 얼른 대답하고 달려가서 세상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도록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07년도 첫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시간이 여러분들의 신앙적 결심이 분명하게 서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누가 뭐라 하든지, 남들은 어떨지라도 나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겠다는 확실한 고백이 여호수아처럼 고백되는 한해의 시작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김철현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