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2-12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니라(마11:2-12)
세례 요한은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예수님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의 속국이 된지 400년이 지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없었다.
400여년의 침묵을 깨고 한 선지자가 광야에 나타나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메뚜기와 야생 꿀을 양식으로 삼았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나 낙타 털옷 한 벌을 입고 사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는 입을 열어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자들에게 요단강물에 세례를 베풀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람을 <세례 요한>이라 부른다.

사람들이 “당신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까?” 물을 때
“나는 메시야, 그리스도가 아니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메시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인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만큼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요.”
나는 그 분의 "신들메를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오. 겸손하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자였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고백 처럼 빛이 아니었다.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자였다.
위대하신 왕의 행차를 미리 와서 준비하는 자였다..
주님이 걸어가시도록 굽을 길은 곧게 하고, 낮은 곳은 메우고, 높은 곳은 낮추어서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는 자였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세례 요한은 오시는 예수님을 뵙자마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야이시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화려하게 소개했던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자신의 인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아직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예수를 향하여
저 예수님은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인격의 소유자였다.

헤롯 임금이 자신의 동생의 아내, 제수씨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맞았을 때,
“회개하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니 회개하지 않는 자는 찍어 불어 던지 울 것이다”
담대하게 외치고 로마 감옥에 갇힌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세례요한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옷을 탐하는 자가 아니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눅7:28)”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 세례 요한이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3절)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당신이 정말 메시야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이런 질문을 하였다면 이해할 수가 있지만 어떻게 세례요한이 이런 질문을....

세례요한이 왜 이런 질문을 하였는가?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 사람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자유를 원하던 유대인들은
지난 400년 동안 오로지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오셔서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찬란한 왕국을 다시 회복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다.
모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도 이런 왕이신 메시야를 소망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헤롯왕을 무섭게 정죄하고 오늘 로마 감옥에 붙잡혀 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감옥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유대인과 자신이 기대하는 것과 너무나 달랐다.  
사람들을 모아 가르치기는 하지만 로마를 몰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에 사랑하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세상은 강한 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데, 로마 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시지 않고,  
부드러워야 한다. 낮아져야 한다. 온유한자, 겸손한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감옥의 세례 요한에게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기다리던 메시야가 바로 저분일까? 혹시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세례 요한은 결국 제자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그 메시야가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물어보게 된 것이다.  

우리도 이런 시험에 빠질 때가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저런 놈들을 사려 두신단 말인가?
민족을 위기 가운데서 구해 주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셔야 하는데
그런데 왜 잠잠하고 계시는가? 혹시 그분이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 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 가셔서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

세례요한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믿음이 흔들렸을까요?
세례요한은 왕의 오심을 알렸고,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나갔다.
목숨을 걸고 오실 메시아의 심판을 선포했다. 그런 세례요한이 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세례요한이 이런 말을 하게 된 원인은 지금 세례요한 자신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담대하게 정의를 외치다가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세례요한이라고 해서 어디 특별하겠는가?
이 어둡고 칙칙한 감옥에 갇힌 그에게 심각한 영적침체가 찾아온 것이다.


답답한 감옥에서 갇혀서 수 개 월을 지냈다. 성격이 불같은 세례요한은 Stress가 쌓일 대로 쌓였다.
요한 자신은 의를 외치다가 지금 감옥에 갇혀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거기에 대하여 한 마디도 없으시고, 위로도 없고, 면회도 없고, 세례 요한은 너무 답답했다.
"정말 저분이 메시야일까?"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마음에 일어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만일 여러분 중에 누가 의로운 일로 교도소에 들어가 고생하고 있는데
목사가 말 한 마디도 없고, 수개월이 지나도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는다면 어떤 생각이 나겠는가?
세례요한의 심정이 바로 그와 같은 심정이다.
육신이 고통당하는 것은 참을 수가 있었다.
비록 광야에서도 음식을 제대로 못 먹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도 고난당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의 의로운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묻고 있는 것이다.  

고난을 당하다 보니 억울하다 보니..생활이 너무 힘들다 보니... 세례요한도 믿음이 흔들렸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런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일제 말년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예수님 때문에 4년 반 동안을 감옥에서 고생했다.
일제는 그에게 특별히 잠을 재우지 않았다고 한다. 잠 못 자는 괴로움이 얼마나 견디기 힘듭니까?
코에다 물을 들이붓는가 하면 매질은 예사이고 벌겋게 단 인두로 온몸을 지져 태웠다.
그렇게 4년 반을 고생하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이여, 어서 내 영혼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이 고생이 더 오래면.. 저는 순교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랬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켜 스데반 집사님을 구해 주시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내버려 두셨는가?
왜 오늘 세례요한을 구해주시지 않으시는가?
순교가 가장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가장 보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
여러분에게도 세례요한과 같은 질문이 있지 않습니까?
너무 힘들 때 "당신이 오실 그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 말이다.

우리도 믿음 생활하면서 특별히 4가지에 실족하지 아니하여야 하겠다.
첫째, 믿음 생활을 하다가 실족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되겠다.
     목사와 성도, 성도와 성도, 교회와 성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실족하는 일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세상 어디를 가도 그 사람은 시험에 들고 만다.
     실족하는 일은 외부에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원인자이다.
  
둘째, 기도하다가 실족하지 말아야 한다(눅18장).
     기도 많이 하는 분도 실족한다. 금식하고 철야기도를 해도 실족하는 일, 시험 드는 일이 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셋째, 선한 일을 하다가 실족하지 말라고 했다.(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다.
    
넷째, 이 세상에 악인의 형통을 보고,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한다.
     "행악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시37:1-2)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왜 악한 사람 잘되는 것만 보고 시험을 당하는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실족하면, 예수님을 버리고,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게 되는 된다.
끝까지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 한 사람도 낙오병이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축원 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성도가 믿음으로 경주를 하는 일에 있어서 난관이 있다.
열정을 방해하는 많은 적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영적 전투에서 싸워 이기는 자 만이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잠자리 애벌레가 어떻게 푸른 창공을 날 수 있을까?
7번에서 12번에 걸쳐 허물을 벗어야 하늘을 날게 된다.
그것도 물속에서 호흡하던 놈이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볕으로 등이 갈라 터지고 허물을 벗을 때
비로소 날개를 펴고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게 된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 누구든지 흔들릴 수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다윗 왕, 모세, 사도 바울, 베드로.... 누구에게든지 흔들림이 있었다.
이제 그 모든 의심을 떨쳐 버리고 다시 일어나시기 바란다. 심지를 견고히 하시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이 땅 오신 목적은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함이 아니라 저 천국으로 데리러 가기 위함이다.
세상일들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마라!
예수님은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 신앙생활 하다가 실족하지 마라!  

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침범해서 노획하는 것을 의미)
쉽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싸워 이겨야 한다.
하와를 유혹하였던 사탄은 오늘도 무엇이라고 하시더냐?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혹하고 있다.  
나 자신의 정욕과 싸워야 하고,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의심과 유혹으로부터 싸워 이겨야 한다.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의 싸울 것은 육체아니요/
마귀 권세 힘써 싸워 깨쳐버리고/ 죽을 영혼 살릴 것 일세/ (393장 다 같이 찬송)

출처/이상민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