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 절제  (수 7:22-26,고전 9:24-27)


오늘은 성령의 마지막 열매인 절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절제를 영어 성경에서는 Self-control 즉 자제(自制)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자기를 통제(統制)한다는 뜻입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통제하는 일은 성을 점령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절제가 어렵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주로 욕망을 억제함을 뜻합니다. 그런 욕망 가운데 오늘은 식욕과 소유욕의 통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식욕의 억제


인간은 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식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릿고개 시절 우리는 배불리 먹어 보는 것이 우리의 큰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너무 많이 먹어서 탈입니다. 해마다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는 일반 쓰레기의 30%를 차지하며, 이것은 5톤 트럭으로 4천 6백대에 해당하는 2만 3천톤이나 되고 돈으로 환산하면 8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양의 과잉 섭취는 노화를 촉진시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상적인 유전인자가 암인자(癌因子)로 변질되기 쉽다고 하였습니다. 동물들은 대체로 먹을 만큼 먹으면 더 이상 먹지를 않는데, 인간은 필요 이상의 것을 섭취하므로 병들고 있습니다.


잠언 23장에 보면 "너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나 고기를 탐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아라. 늘 술에 취해 있으면서 먹기만을 탐하는 사람은 재산을 탕진하게 되고, 늘 잠에 빠져 있는 사람은 누더기를 걸치게 된다"(20-21)고 하였습니다. 먹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그것이 지나치면 개인적으로는 병들고, 사회적으로는 먹지 못하는 자가 생겨나게 됩니다. 북녘 땅의 우리의 형제자매들은 지금 굶주리고 있는데, 저 아프리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는데, 남한에서 음식 쓰레기가 연간 8조원씩이나 버려지고 있는 것은 큰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게 먹어 자기 건강 유지하고, 남은 것으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원래 밥상 공동체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 식사는 화목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저들을 억압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일에 대하여 감사의 제사를 드림과 동시에 남은 제물을 가지고 나누어 먹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유월절 식탁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함께 묶어 주는 끈입니다. 다같이 억압당하던 히브리였는데, 자기들 힘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앞에서 함께 밥상을 대하므로 모두가 평등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시내산 계약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면서 백성들의 대표인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이것을 계약 식사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하는데 왜 사람들이 밥상을 같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면서 그 백성 모두가 한 밥상 공동체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밥상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함과 동시에 이웃을 늘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만 먹어서는 안 되고 이웃과 함께 하여야 한다는 의식이 그들 안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에게는 추수 때 이삭을 줍게 만들어 주고, 돈을 꾸어 주되 이자를 받지 않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전통을 따라 성만찬을 베푸셨습니다.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몸을 우리 인간을 위해 내어 주심을 뜻함과 동시에, 그 구원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식탁이며, 동시에 함께 구원 받은 백성임을 깨달으면서 공동체 의식을 다짐하는 식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에서 같은 밥상 공동체임을 확인하면서 함께 나누어야 함은 물론, 이 밥상 공동체를 세계 속으로 확산시켜 나갈 선교의 사명을 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밥상에서 다른 사람 생각 않고 혼자만 먹기를 탐하는 자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에 "식욕이 마구 동하거든, 목에 칼을 대고서라도 억제하라"(23:2)는 말씀이 있습니다. 높은 사람과 식탁을 같이하였을 때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식탁을 대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늘 배고픈 이웃이 없도록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식욕을 절제하는 것은 바로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필수적이며,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소유욕의 억제


다음으로 문제되는 욕망은 소유욕입니다. 무엇이든지 가지려고 하는 욕망입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최소한도로 필요한 것만을 갖는데 머물지 않고, 풍족하게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큰집을 갖고, 고급 승용차에 비싼 가구에 비싼 옷을 입고 다니면서 자기의 부를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톨스토이의 동화 가운데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바흠이라는 농부인데, 그는 항상 비옥한 넓은 땅을 갖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문을 따라 간 어느 고장에서 넓은 땅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고장에서는 땅을 하루치에 1천 루불리로 팔고 있었습니다. 하루치란 사람이 하루 종일 걸어서 갈 수 있는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농부는 흥분했습니다. 그는 밤잠도 설친 채 아침해가 돋자 바로 출발을 서둘렀습니다. 단지 조건은 해지기 전에 출발점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욕심껏 걸었습니다. 피곤하여 좀 쉬어야 하겠는데, 한치라도 더 갖고 싶은 욕심이 그를 쉬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간밤에 잠도 설친 데다가 뜨거운 햇볕 아래 쉴 사이 없이 걷고 있는 이 농부는 기진맥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을 땅을 생각하니 계속 걷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해질 무렵 그가 출발하였던 지점을 향하여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그만 거기 엎어져 입에서 피를 쏟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하인이 그곳에 6자의 땅을 파서 그의 시체를 묻어 주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여섯자 땅입니다.


이 동화는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으며,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탐욕으로 끝없이 치닫는 현대 문명에 대해 예언자적인 경고를 주는 동화입니다. 야고보서에 이미 일찍이 인간의 욕심에 대해 좋은 경고가 실려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인간의 절제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으로 죄가 시작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한 구절은 인간의 타락의 역사를 집약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잠언 23장에서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을 끊어 버릴 슬기를 가져라. 한순간에 없어질 재물을 주목하지 말아라. 재물은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4-5)고 하였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어느 한 사람이 많이 갖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고 그것은 곧 그 공동체의 와해(瓦解)로 연결될 것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여호수아서 말씀은, 아간이라는 사람의 탐욕으로 인해서 전체 이스라엘이 타격을 입고 낙심한 가운데서 이 아간을 색출하여 그 가족과 함께 처형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거기에 있는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 아간은 이를 어기고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 오십 세겔을 가져다가 자기 장막에 감추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작은 성인 아이 성을 공격하다가 이스라엘은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그 참패의 원인이 아간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가족 모두를 돌로 쳐 처형을 하였습니다. 아간이 가져간 물건은 모두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전리품에 눈이 어두워지면, 그 마음이 흩어져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가나안 점령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고 보시고 이를 금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을 통하여 공동체의 중요성과 더불어 그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살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므로 거기에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이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와 땅을 골고루 분배한 후 더 많이 가진 자도 덜 가진 자도 없도록 절대로 그 땅을 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그런 사회는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인간의 탐욕이 발동하여 남의 것을 빼앗거나 희년에 돌려주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공동체의 평등은 깨어지고 불평등한 관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서 계명을 주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공동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의 명령에 순종하면 탐욕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관심사가 무엇을 먹을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게 하신 것은 거기서부터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마다 모두 자기 먹을 것부터 구하다 보면, 이웃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형제도 경쟁의 대상이 되어 그의 것마저 빼앗으려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의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 생활을 힘쓰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식욕과 소유욕 이외에도 정욕과 명예욕과 권력욕 등 많은 욕망이 있지만 결국 그것은 모두 욕망이란 한 줄에 꿰어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모든 욕망들이 과다하게 분출될 때 이 사회는 어지러워지고, 결국은 피할 수 없는 파멸에 직면하게 됩니다.

절제는 신앙의 필수과목


베드로후서 1장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셔서 우리로 하나님과 교제케 하시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욕을 억제하고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상호 우애를, 상호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려는 것은 단순히 과소비를 주리고, 우리 경제를 살리려 함에서가 아니라, 사회 도덕성의 회복과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함과 동시에, 경건에 이르기 위한 것이며, 사회 공동체를 지향하고자 함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절제하면서 경건을 지향하면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11).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제는 필수과목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읽어 드린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신앙을 경주에 비유하면서 경주에서 이기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하는 것처럼 신앙의 삶도 모든 일에 절제하여야 할 것임을 교훈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복음을 땅끝까지 전한다는 분명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처 복종시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절제 생활을 통하여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완수하였던 것입니다.


절제 없이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갈 5:17,21)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6장에서는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갈 6:8)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면 아간과 같이 되던가, 엘리사의 종 게하시처럼 나병에 걸리던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될 것입니다. 결국 욕망을 억제하는 일은 생명과 관계된 일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소비 현상은 이 사회의 도덕성과 공동체성을 파괴하며, 환경을 오염시키고, 더 나아가 스스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길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절제가 성령의 열매인 까닭은,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절제하도록 역사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의 탐욕 때문에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제하지 못하고 그저 욕심대로 행한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욕망을 다스려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물질 문명의 독소가 뿜어 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절제를 통한 바른 삶을 이루며, 경건한 신앙인의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절제의 생활을 이룩합시다. 신앙의 중요한 덕목인 절제에 실패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절제되지 않은 신앙의 삶은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필연적으로 이 땅에 속한 모든 욕심을 버려야 하고, 그리고 새로운 가치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절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첩경이며, 동시에 이웃과 사귐을 나누는 길입니다. 절제는 또한 자연을 살리는 길이며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절제의 생활에 성공한다면,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코이노니아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목표를 향하여 모든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며, 자신을 위하여는 최소한도로 사용하고 남은 것은 이웃에게로 돌리는 절제 생활을 이룩해 갑시다.


성령의 열매인 절제는 신앙의 필수과목임을 기억하면서 절제를 통한 경건한 삶이 여러분 속에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유경재목사님 설교자료중에서